199/198화 남의 돈 (3)
제일은행을 나온 우리는 곧바로 이동을 시작했다.
“최대한 빨리 이동하죠.”
“아니 지금 바로요?”
오늘 조상제한서를 비롯한 시중 은행들에 대한 작업을 시작한 만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은행들과의 만남을 마무리 지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이죠.”
“아니 그러지 마시고 식사라도… 아직 성장기신데 무리하시면….”
물론 물리적인 시간의 한계상 하루 만날 수 있는 은행들의 숫자는 정해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느긋한 마음을 가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좁아터진 한국 금융계의 특성상 시간을 주고 느긋하게 움직인다면 어떠한 결과가 나타날지 예상됐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제가 얼마나 클지는 다 알고 있으니까.”
“얼마나 클지 알고 계신다고요?”
“네. 180센치. 아마 거기까진 클 거예요.”
“아니 그걸 어떻게….”
“다 아는 수가 있죠.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지금 중요한 건 우리 이야기가 퍼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 그것 자체죠.”
때문에 나는 일단 제일은행에서 벗어난 뒤,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은행.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상업은행으로서 조상제한서 은행들 중 수좌로 군림하던 은행.
한때 은행 업계의 최강자로서 발권 은행의 자리까지 넘볼 정도였었던.
그러나 2003년 정부의 매각 방침으로 신한금융지주에 매각되어 버린 비운의 은행.
조흥은행으로 향했다.
“…알겠습니다 보스. 그럼 먼저 어디로 모실까요?”
“조흥은행으로 가죠.”
소문이 퍼지기 전 조흥이라는 공룡에 작살을 박아 넣기 위해서였다.
“조흥으로요?”
“네. 그 은행을 빼고는 이번 일이 이뤄지지 않은 거나 다름없거든요.”
사실 조흥은행은 무너질 이유가 없는 은행이었다.
물론 이 당시 다른 은행들처럼 부실채권 문제가 제법 있긴 했지만 다른 은행들에 비해 그 규모가 현저히 적었고 은행 자체의 체력 또한 제법 괜찮았다.
예를 들어 IMF당시 부실 금융기관들에 수혈된 165조 원의 자금들 중 조흥은행에 수혈된 자금은 고작 2조 7천억 원.
물론 2조 원이라는 금액이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70조 원대를 훌쩍 넘는 조흥은행의 자금을 생각하면 그 규모가 크다 볼 수 없었다.
무려 15조 원이 넘는 돈이 들어간 제일은행이나 각각 7, 8조 원씩이 투입된 한빛 서울은행과 비교하면 규모에 비해 부실의 규모는 현저히 작았던 것이다.
그런 만큼 내가 조흥은행을 다음 타겟으로 고른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었다.
은행의 덩치가 크고 그 상태가 제법 양호하다는 이야기는 곧 내가 집어 먹을 수 있는 것 또한 크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조흥이라면 제일에서보다 적어도 1.5배 많으면 2배 정도의 이익을 볼 수 있겠지.’
그 결과.
나는 제일은행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흥은행에 도착, 그곳에서 본격적인 딜을 진행할 수 있었다.
“자 이쪽으로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엔 어쩐 일로…?”
일단 전체적인 딜의 내용은 제일은행의 경우와 대동소이.
앞으로 한 달 안에 예정된 수익을 제안하며 조흥은행 측에서 한 달간 외환을 빌리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니까. 저희 은행에서 외환을 빌리고 싶다 이 말씀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뭐 빌리는 것 자체는 별문제가 없을 겁니다만… 얼마나 빌리시려는 건지…?”
그것도 약간 규모를 키워서.
“간단하게 15억 달러 정도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네? 15억 달러요?”
“그렇습니다.”
그러자 조흥은행 측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조흥은행의 은행고가 75조원을 넘는다손 치더라도 15억 달러, 1조 5천억이라는 액수는 자금은 큰돈이었으니까.
“흠, 조금 당황스럽군요. 이렇게 갑자기 그렇게 큰 금액을 이야기하시니….”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글쎄요… 아직은….”
하지만.
돈 앞에서 장사는 없는 법이라고 우리가 제일은행에서와 같은 조건을 내걸자 곧 그들의 얼굴이 표변했다.
“2천억 원.”
“네?”
“20억 달러를 3개월간 빌려주시면 그 정도의 이자를 챙겨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
제일은행에서와 같이 저쪽에서 제법 솔깃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아니 2천억 원이요? 지금 진심이십니까?”
“물론이죠. 어떠십니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그게….”
“담보는 확실합니다. 남은 것은 귀행 측의 선택뿐입니다.”
“흠… 솔깃한 제안인건 사실입니다만….”
물론 그렇다고 단박에 그들이 우리에게 외환을 빌려주겠다는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일은행에서와 비슷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 당시 은행의 매뉴얼, 그리고 구성원들의 욕심이랑 비슷비슷했으니까.
“마지막으로 말씀드리지만 저희가 이런 제안을 드리는 것은 앞으로 이번에 마지막일 겁니다. 지금은 꽤나 특별한 경우란 말이죠.”
“그렇습니까?”
“네. 만약 조흥은행이 아니었다면 일본 측에 문의를 했을 테니까요. 솔직히 외환 보유고는 일본이나 서구 유럽 국가들 쪽이 월등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게… 하하 이거 부끄러운 이야깁니다만 저도 한국 사람이라고 일본은행 측에 이익을 나누는 것은 좀 꺼려지더군요. 그래서….”
“아, 그런….”
“네. 기왕이면 이익은 한국사람 끼리 나누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뭐 그 와중에 약간의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좋습니다. 일단 검토를 해 본 뒤 바로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제일과 조흥이라는 고래들을 요리하고 난 뒤 나는 조상제한서의 은행들을 차례대로 순례하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의 결과를 만들어 내고 싶었던 것이다.
“휴, 일단 제일이랑 조흥은 끝났네요.”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이만 댁으로 모실까요?”
“아뇨. 아직 시간이 좀 남았잖아요. 최대한 시간을 활용해야죠.”
“하지만 벌써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드셨는데….”
“괜찮아요. 지금은 먹지 않아도 배부른 느낌이니까.”
일단 수많은 기업들의 주거래 은행이었던 상업은행을 시작으로 다른 은행들과는 달리 가로가 좀 더 긴 통장이 인상적인 한일은행.
그리고 시작은 서울지역 은행이었으나 금세 전국구 은행으로 발돋움했던 서울은행까지 조상제한서의 모든 멤버들을 방문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오라클의….”
그 와중에 어떤 이들은 우호적인 스탠스를, 또 어떤이들은 적대적인 반응을, 또 어떤 이들은 관망하는 자세를 보이며 우리와 협상을 지속했다.
다들 우리의 제안에 깃들어 있을지 모르는 함정, 그것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자신들의 욕심들도 함께.
“흐음… 분명 매력적인 제안입니다만….”
“죄송합니다만 내부적으로 검토를….”
“이익률을 좀 더 늘려주시면….”
하지만.
그들 모두 종국엔 우리의 제안 쪽으로 몸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이대로 끝내도록 하죠.”
이미 그들의 약점, 그들의 두려움, 그들의 목표를 내가 알고 있었으니까.
“네?”
“저희의 제안이 꺼려지신다면 제안을 취소하겠다는 말입니다.”
“아니 그건 아니라….”
뭐 얼마 뒤 우리나라 전체가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나뿐이었으니까.
“둘 중 하나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예스입니까 아니면 노입니까.”
“그건….”
그 결과.
나는 이뤄낼 수 있었다.
조상제한서 다섯 은행을 순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은행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보스!”
“무슨 일이죠, 레이첼?”
바로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연락이.
“은행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어느 은행이죠?”
“조흥은행입니다!”
순간, 나는 짙은 웃음을 입에 물었다.
분명 우리가 제안한 금액, 그 금액 모두가 다 우리의 손에 들어오진 않을 테지만 그에 상응한 금액이 내 손에 들어올 것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준비했대요?”
“10억 달러. 그 이상은 힘들 것 같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일찍 자금을 마련했네요?”
“그게… 아무래도 외부에서 자금을 융통한 것 같습니다.”
“그래요?”
“네.”
하긴 우리가 돈을 빌리기로 한 기간은 단 3개월. 그 정도라면 다른 곳에서 돈을 빌려 이익을 볼 수 있다 생각했겠지.
빚을 져 돈을 버는 것이 그들의 주특기니까.
그런데… 지금 이 시기에 돈을 빌려줄 만한 은행이 있나?
다들 동남아나 다른 곳에 투자를 했거나 혹은 조심하고 있을 텐데?
“어디에서 빌렸대요?”
내가 묻자 레이첼이 가벼운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아무래도… 일본 쪽 자금인 것 같습니다.”
응? 일본?
“일본이요?”
“네. 단기로 자금을 융통한 모양입니다.”
거참 이 양반들은 안 끼는 곳이 없군.
뭐 부자가 망해도 삼대는 간다고 80년대 버블 붕괴의 후폭풍이 잦아들 타이밍이었으니 이제 슬슬 움직일 만도 했다.
“어떻게 할까요?”
“상관없죠. 그대로 전하세요. 전액 받아들이겠다고.”
어차피 목을 조이는 건 그들일 테니까.
그리고 그때부터 정말 물밀 듯이 자금이 밀려 들어왔다.
가장 먼저 일본을 통해 10억 달러라는 자금을 조달한 조흥은행부터 7억 달러를 조달한 상업과 제일은행, 마지막으로 5억 달러를 조달한 한일은행까지.
무려 27억 달러라는 막대한 외환이 우리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레이첼, 지금까지 얼마나 들어왔죠?”
“잠시만요… 오늘까지 모두 다 해 27억 달러. 계약한 금액 모두가 들어왔습니다.”
아무리 썩어도 준치라고 아직까지는 대한민국 전체의 대외적 신용등급과 은행의 신용등급이 그리 나쁘지 않은 덕분이었다.
“은행들에서 다른 말은 없고요?”
“계약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 이외에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이 당시 그 누구도 대한민국이 무너지리라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3개월 뒤 그들의 돈을 갚아줘야 하는 돈이 어마어마했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며칠 후면…
‘…환율이 요동칠 테니까.’
그리고 그때가 되면 달러를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시점이 도래할 것이다.
지금의 이자율 따위는 웃으면서 지불할 수 있을 정도의.
현재 900원 남짓한 환율이 무려 1700원, 한때 2000원 선까지 왔다갔다 하는 시기가 도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모두가 지금의 결정을 후회하게 되겠지.’
지금까지의 자신들의 행위, 남의 돈으로 돈을 버는 그 행위가 가진 위험성을 실감하면서.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 키핑. 제가 지시할 때까지 기다리세요.”
“대만 공격은 어떻게…?”
“이번에는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할 일은 이제 총알을 쟁여두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얼마 뒤.
때가 도래했다.
9월 중순.
조지 소로스가 대만을 공격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할 때쯤.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에 돈을 빌려준 해외자본들이 국내 외채의 만기 연장을 거절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이내 환율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달러(USD) / 원화(KRW) 915.00 ▲ 10.00]
↓
[달러(USD) / 원화(KRW) 925.50 ▲ 10.50]
↓
[달러(USD) / 원화(KRW) 930.20 ▲ 4.70]
이른바 폭풍의 상륙.
한국 외환위기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