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272화 블랙홀 (2)
김우중을 태운 차가 골목을 돌아 사라질 즈음이었다.
갑자기 저 멀리서 차량들 여러 대가 언덕을 올라오더니 주르륵 집 앞에 멈춰섰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바로…
“준영아! 괜찮아?”
이어진을 필두로 한 사람들이었다.
이 양반 한발 늦었네.
보아하니 아무래도 김우중이 왔다는 소식, 그 소식을 듣고 온 것 같았다.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내가 묻자 내게 다가온 이어진, 그가 빠르게 내 몸을 훑어 내렸다.
“어떻게 알았긴 막 연락받고 왔지. 그런데… 괜찮아?”
약간은 걱정 어린 표정, 저번에 봤었던 그 표정이었다.
“…또 왜요?”
“아니 이번엔 진짜 맞았을 거 같아서.”
……아니 이 양반이?
그의 말에 내가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자 그가 진지한 낯을 지우며 피식 웃음을 보였다.
“농담이야. 보니까 괜찮은 거 같네. 그나저나 김 회장은?”
그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저 멀리, 이제는 멀어지고 있는 김 회장의 차를 가리켰다.
“저기 가네요.”
“…저 차 한 대?”
“네. 아무래도 비밀리에 오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하긴, 우리 쪽에서도 이쪽에서 연락받고 알았으니까. 그런데….”
그가 슬쩍 나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빨리 끝났어? 아니 뭐 30분도 채 안 지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렇게 빨리 대화가 끝난 것이 약간 의외였던 것 같았다.
뭐 일반적인 경우 총수 간의 대화는 길어지기 마련이니까.
“뭐 김 회장이랑 제가 그리 길게 이야기할 사이는 아니잖아요. 적어도 아직은.”
그러자 그 순간, 눈썹을 꿈틀거리던 이어진, 그가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보았다.
“준영아, 너 설마?”
아무래도 이제야 생각이 닿은 것 같았다.
“네. 맞아요. 김 회장에게 이미 말했어요.”
“뭐라고?”
“당신을 스카웃하겠다고.”
순간, 이어진, 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정말로 그 이야기를 했단 말이야? 아니 당신을 스카웃하고 싶다는 말을?”
“네.”
“천하의 김우중이한테?”
“네. 물론이죠.”
이어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야만 대우도, 또 대우를 만들어 낸 사람도 제 손에 쥘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이어진, 그가 허탈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뭐 뻔하다. 아마 이제 그를 왜 스카웃 했냐고 그 이유를 묻겠…
“아 망했다.”
응?
뜻밖의 목소리에 이어진을 바라보자 그가 허탈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망했다고요?”
“그래. 망했어.”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에휴, 그게… 아니 레이첼이랑 내기를 했거든 정말 김 회장한테 그 말을 하나 안 하나. 지는 사람이 차 한 대 사기로 했는데….”
그가 아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그는 내가 김우중, 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에 건 것 같았다.
거참.
“……아저씨. 제가 언제 빈말하는 거 봤어요?”
때문에 내가 그를 타박하듯 말하자, 그가 약간 멋쩍은 표정으로 나를 향했다.
“아니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랬지.”
“어휴…….”
“그런데… 김 회장이 뭐래?”
그가 슬쩍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분명 내가 말하지 않을 거라는 쪽에 베팅을 한 것 같지만 그러면서도 궁금하긴 한가 보다.
“뭐라긴요. 그냥 노발대발하고 나갔죠. 자기 놀리냐면서.”
“그래?”
“네. 그리고 두고 보라면서 나가 버리더라고요.”
그러자 잠시 기대로 물들어 있던 그의 얼굴이 실망으로 물든다.
아무래도 약간의 기대, 그것이 사라진 것 같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의 기대도 이해가 갔다.
만약 김우중, 그가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그가 나의 제안에 따라 정말 내게 자신을 팔았다면 우리는 앉은 자리에서 대우라는 기업과 또 대우라는 기업을 만들어 낸 사람, 그 둘을 모두 다 손에 쥘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하, 뭐 그럴 것 같긴 하더라. 그 사람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는 소리가 파다했으니까. 음… 그럼 원래 계획대로 워크아웃 후에 정부 쪽이랑 이야기해 봐야 하는 건가?”
“아뇨.”
“응? 그럼?”
“대우를 통째로 물어올 사람이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죠.”
순간, 그의 얼굴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뭐? 아니 니가 방금 그랬잖아? 김 회장이 노발대발 하면서 나갔다고.”
“분명 그랬죠. 그런데……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에요.”
말을 마친 나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 하나의 점으로 남은 김우중의 차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이제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요.”
사실, 처음부터 그리 쉽게 될 일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분명 김우중, 그를 궁지에 몰아 넣음으로써 그를 낚을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과정이 그리 쉬운 일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이빨이 빠졌다고 해도 김우중 그는 대우그룹의 창업자이자 총수, 이날 이때껏 싸워 온 남자, 쉽게 포기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반발, 그 반동이 그리 얼마 가지 않을 것임을.
그의 외면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왜냐하면.
“그 사람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그의 욕망, 그것이 향하는 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보는 이어진, 그가 걱정 어린 낯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아무래도 나의 확신이 빗나갈 상황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네. 물론이죠.”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뭐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어요.”
그때엔 그때에 맞는 방법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얼마 뒤.
나는 나의 생각, 나의 판단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 날, 내가 사람들을 이끌고 그룹을 정비하고 있던 그때.
“회장님!”
“무슨 일이죠, 레이첼?”
한 가지 메시기가 도착한 것이다.
“대우 측에서 연락이 도착했습니다.”
“네? 뭐라고요?”
“그게…….”
그것은 바로…
[…팔겠네.]
대우의 항복선언, 김우중 그의 백기투항이었다.
[나를 팔겠네. 그러니 나에게도… 부디 미래를 보여 주게.]
순간,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재계서열 3위, 자산총액 75조 원, 전 세계 직원 수 15만 명의 거대 기업 대우가 내 손에, 내 손바닥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환영합니다. 회장님. 절대 후회하시지 않을 겁니다.”
드디어 문이 열렸다.
*
1999년 4월.
나토군이 유고연방의 본토 및 코소보 유고연방군의 기지에 무차별 공습을 단행하고 미국 다우존스 지수가 사상 처음으로 1,000P를 돌파한 때.
그리고 노동부가 컴퓨터 고용정보망 '워크넷'을 개통하고 국민연금관리공단이 국내 최초 국민연금 의무 가입제도를 실시하기 시작하던 그때.
대한민국에 한 가지 충격적인 뉴스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바로…
[대우 그룹과 오라클 그룹 합병 논의! 오는 10일 구체적인 계획 나올 것! - 매X경제. 1999. 04. 07]
재계서열 3위의 대기업 대우와 재계서열 7위의 오라클의 합병 소식이었다.
그러자 대한민국 전체가 놀이기구에 탄 듯 들썩거렸다.
불과 얼마 전 분식회계 문제로 구설수에 오른 회사, 한때 검찰 조사까지 받은 회사 대우가 재계서열 7위권의 대기업에 눈독을 들이는 게 말도 안 된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뭐? 대우차랑 오라클 합병? 아니 이게 또 무슨 소리야?”
“……글쎄? 아무래도 대우의 고육지책인 것 같은데? 왜 저번에 분식회계다 뭐다 해서 말이 많았잖아.”
“그래?”
“그렇다니까. 그런데다 정부랑도 별로 사이가 안 좋아졌다고 하고. 그러니까 최대한 덩치를 불려서 버티려고 하는 거겠지. 아무래도 대마는 죽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드러난 결과는 놀라웠다.
아니 충격적이었다.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흡수하는 쪽은 대우가 아닌 오라클이었던 것이다.
[오라클, 대우자동차 인수 본격화, 인수비용은 약 50억 달러 규모! - 매X경제. 1999. 04. 10]
[대우전자의 지분 17% 결국 오라클의 손으로… 오라클 대우전자의 최대주주로 등극 ? 한X경제. 1999. 04. 25]
[김우중 회장 (주)대우 내의 자기 지분 1조 5천억 정리, 대상은 오라클 ? 조X일보. 1999. 04. 30]
그러자 사람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작은 쪽이 큰 쪽을 먹어치우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뭐야? 아니 대우가 오라클 인수할 거라며? 덩치를 키워서 배 째라고 할 거라며?”
“……어? 그, 그런데, 이게 왜 이러지?”
하지만 그 놀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아니 오래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뒤의 일이 더 놀라운 일이었거든.
[충격! 오라클 그룹, 대우자동차에 이어 대우전자 또한 인수추진 ? 한성일보. 1999. 05. 05]
[이번엔 건설이다! 오라클, ‘대우건설 이달 안에 인수할 것!’ - 한성일보. 1999. 05. 10]
[‘대우중공업’ 매각 절차 밟아, 매각 대상은 오라클이 유력! - 한성일보. 1999. 05. 17]
[또다시 오라클? 대우, 오라클 측에 대우증권 매각 가능 ? 한성일보. 1999. 06. 05]
[오라클 대우무역 인수추진 약 3조 원대 사업 ? 한성일보. 1999. 06.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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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처음 오라클의 대우그룹 합병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들, 오라클이 욕심을 부리다 배가 터져 죽어 버릴 것이라 생각하던 사람들 또한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러게… 이건 도대체….”
마치 블랙홀에 빨려들어 가는 항성처럼 대우그룹이 오라클이라는 그룹에 빨려들어 가는 모습에 경악한 것이다.
“미쳤어! 아니 정말 대우를 먹어 버릴 셈인가?”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 김우중이 그 사람이 미치지 않은 이상….”
“도대체 정부는? 정부는 뭐하는 거야?”
게다가.
[오라클, 대우 그룹 계열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다이어트 시작 ‘군살 쫙 뺄 것’ - 한성일보. 1999. 06. 20]
오라클이 인수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대우그룹의 고질병, 차입 경영에 의한 문제들이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거 잘하면 일 한번 나겠다고.
이대로 계속 가다 보면 정말 큰 일이 벌어지겠다고.
그러자 처음엔 오라클의 인수, 아니 흡수에 가까운 일을 부정적으로 보던 사람들 또한 ‘설마?’ 하는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만약 이대로 사업이 진행된다면, 정말 오라클이 대우를 먹는다면, 대한민국 경제계에 지각 변동이 올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거… 큰일 한번 나겠지?”
“…아무래도 그럴 것 같구만….”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99년 7월 19일.
과거 대우그룹 운명의 날로 불리던 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바로…….
[오라클(Oracle)]
자산총액 75조.
계열사 수 50개.
전 세계 직원 수 12만 명의 거대한 기업을 말이다.
“지, 진짜 성공하다니….”
“허….”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권력지층에 균열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