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구원자 (1)
검은 월요일(Black Monday).
1987년 주식 시장 붕괴로 시작된 경기 침체는 미국 부동산 시장에 일대 빙하기를 불러왔다.
80년대 후반 활발했던 부동산 투자의 열기가 주식 시장 붕괴로 인해 순식간에 사라지고, 활황시기 양적팽창을 이루고 있던 시장의 흐름이 한순간 축소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그러자 80년대 활황이 언제 적 이야기였냐는 듯 불경기가 도래, 사람들의 소비가 위축되더니 기존에 있었던 강자들, 부동산 재벌들의 주머니에 돈이 바짝 말라 버리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부동산 시장의 보릿고개, 돈이 돌지 않는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뉴욕증권시장은 패닉상태! 10월 19일 하루 동안에만 무려 22.6% 폭락 - 월스트리트 저널. 1987. 10. 20]
[전문가들 ‘검은 월요일’의 이유는 레이거노믹스! 레이건 정부의 경제정책 비판! - 이코노미스트. 1987. 10. 21]
[‘검은 월요일’로 촉발된 부동산 경기 경색, 부동산 업체들 어마어마한 적자에 시달려 - 뉴욕 타임즈. 1990. 5. 23]
그리고 그 와중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의 거대 부동산 그룹 ‘트럼프 기업’의 총수이자, 80년대 전반 특유의 열정적인 에너지와 파격적인 투자 스타일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던 남자, 나중에 미국의 제 45대 대통령이 되는 남자.
그 또한 이 시기 어마어마한 손해를 입었다.
70년대를 거쳐 80년대 후반까지 성공가도를 걷던 그의 기업들.
그가 공격적 인수합병을 통해 집어 삼킨 기업들의 수익이 악화되면서 공고했던 그의 위치, 한때 성공한 기업가의 전형으로 일컬어지던 그의 위치 또한 무참히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트럼프 회장님. 그랜드 하얏트의 적자폭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재정 적자가 얼마나 되지?’
‘대략적으로 5천만 달러 정돕니다.’
물론 아무리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은 상태라 하더라도 안전한 투자, 예를 틀어 전통적인 가치 투자를 진행했었다면 이렇게 적자의 폭이 이렇게 크지 않았겠지만.
문제는 도널드 트럼프 그의 투자 스타일이 일을 벌이는 스타일.
꾸준한 투자보다는 대규모의 투자 이슈를 통해 이미지를 메이킹, 그를 통해 이익을 보는 스타일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5천만 달러라… 그래 5천만 달러면 아직 괜찮아. 그 정도의 손실은 다른 사업으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지금은 후퇴할 때가 아니라 전진할 때야. 시장이 초토화된 지금이야말로 깃발을 꽂기 최적의 타이밍이란 말이지. 그러니까 지금은 타지마할의 오픈에 만전을 기울이도록 해. 타지마할 프로젝트만 잘 되면 그까짓 빚이야 금방 갚을 수 있을 테니까.’
예를 들어 개장 비용으로만 무려 10억 달러가 넘게 들어간 초거대 카지노 ‘타지마할’.
그리고 3억 9천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들어 매입한 ‘플라자 호텔’.
거기에 비슷한 규모의 부동산 사업체들까지, 시장의 활황이라는 담보를 가지고 추진한 사업들의 그의 생명을 차츰차츰 갉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회장님. 타지마할의 재정적자가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플라자 호텔의 적자도…’
‘후… 빌어먹을….’
하루 재정 적자만 무려 100만 달러!
그 어마어마한 재정 적자가 곧 5억 5천만 달러라는 거대한 해일이 되어 도널드 트럼프 그를 엄습하자, 그 전까지 트럼프의 전횡, 트럼프의 망발들을 수익 때문에 참고 있던 주주들, 그리고 그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파산 법원까지 시시각각 그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트럼프 회장. 당신에게 실망했소. 그동안 우리 주주들이 당신의 전횡을 용납한 건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와의 신뢰 때문이었소. 하지만 당신은 그런 우리의 신뢰를 저버렸지. 당신의 그 알량한 낙관주의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회사의 적자폭이 커진 건 시장의 유동성이 경색되어 있기 때문 입니다. 시장의 경색이 풀리면 필연적으로 자금 또한 흐르기 시작할 터, 그때까지 시일을 두고 자금을 융통하면 지금의 적자 정도는 쉬이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도대체 언제? 우리가 다 늙어 죽은 다음에?’
‘그건… 너무나 극단적인….’
돈이라는 마물의 마음을 잡지 못한 기업가의 몰락이었다.
‘듣고 싶지 않소. 지금 당신의 말은 평소 당신이 입에 달고 살던 말, 그래 패배자들의 말에 불과하니까. 그러니… 선택하시오. 이대로 깨끗하게 물러날지 아니면 지분의 49%를 포기하고 그 자리나마 계속 유지할지. 개인적으로는 이대로 깨끗하게 물러나는 것을 추천 드리는 바이오.’
그런데?
그렇게 트럼프의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도널드 트럼프, 그의 파산 및 완전한 은퇴를 점치고 있던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부동산 업계와는 전혀 관계없는 기업에서 기요틴 앞에 머리를 들이민 트럼프에게 구원의 손을 내민 것이다.
‘제가 도와 드리죠.’
그 기업의 아름은 바로… ‘오라클(Oracle)’2년 전부터 월 스트리트는 물론 실리콘밸리, 할리우드, 패션 업계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큰손이자 투자한 분야마다 어마어마한 수익을 이끌어내는 마이더스의 손.
투자금 대비 100% 정도의 수익률은 우습게 뽑아내는 월가의 블루칩이었다.
[투자회사 ‘오라클’, 만성 적자로 허덕이는 트럼프 기업에 투자 의사 밝혀 - 뉴욕 해럴드. 1996. 05. 10]
[루키의 실수인가? ‘오라클’ 도널드 트럼프의 구원투수로 나설 듯 - 뉴욕 타임즈. 1996. 05. 11]
[기적! 위기의 빠진 도널드 트럼프에게 예언자(Oracle)가 다가오다! - 월스트리트 저널. 1996. 05. 11]
물론 그렇다고 드라마틱한 반전, 영화와 같이 주주들이 마음을 돌려 트럼프를 지지하는 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단순히 반전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물론, 주주들의 트럼프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깊었는지, 개중 어떤 이들은 이번 사건, 그러니까 오라클의 구원의사 타전이 트럼프의 자작극일지 모른다는 의심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그 전과 비교해 훨씬 더 나아졌다.
분명 의심어린 눈초리를 보내고 있긴 하지만, 오라클의 투자가 이뤄지는 것이 사실이라면, 5억 5천만 달러라는 돈이 구원을 위해 투입된다면, 죽기 직전의 병자 상태인 트럼프 기업의 숨이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오라클과 트럼프간의 빅딜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다들 이 세기의 빅딜이 성공 유무에 호기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런데 과연 진짜 오라클에서 돈을 풀까?’
‘글쎄, 아무래도 가능성은 낮지 않을까? 다들 알다시피 트럼프 기업의 적자 규모도 규모고 또 트럼프 그 사람 개인적인 능력도 믿을 수 없는 게 사실이니까.’
‘역시 그러려나?’
‘그럴 가능성이 높지. 뭐 만에 하나 오라클이 투자를 한다면 트럼프 개인의 입장에서는 정말 다시없을 기회긴 하겠지만.’
그리고 그 타이밍.
이번 협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기대 드글드글 끓고 있는 시점에 나는 전격적으로 협약의 당사자. 도날드 트럼프를 만나러 왔다.
“준비됐죠?”
“물론이지. 가자고.”
나는 나를 바라보는 남자. 어이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차에서 내려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십 수 대의 차량들, 그 안에서 오라클의 실무진들이 우르르 내려 내 옆으로 모였다.
“연락은요?”
“출발 전에 해 놓은 상태. 그리고 카폰으로 따로 연락해 놨으니까 이대로 들어가면 될 거야.”
이어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서서히 걸음을 옮겨 나갔다.
그리고는 나를 에워싸는 사람들, 이어진과 레이첼을 비롯한 오라클의 실무진을 이끌고 맨하탄 5번가에 있는 도널드 트럼프의 거대한 성.
트럼프의 취향에 맞게 황금빛으로 번쩍거리는, 주변의 존재하는 건물들을 윽박지르는 듯한 모습의 거대한 건물, 트럼프 타워 안에 발을 내딛었다.
“이곳이….”
“트럼프 타워지.”
“제법, 아니 많이 화려하네요.”
“그렇지. 찾아보니까 1층에서 6층까지는 고급브랜드 상점, 그리고 그 위부터는 고급아파트랑 사무실들이 있다고 하더라고. 듣기로는 스티븐 스필버그 그 사람도 여기 살고 있다고 하고.”
그래?
흐음, 그렇다면 조금 기대가 되었다.
과거, 그러니까 아직 내가 회귀하기 전, 스티븐 스필버그 그가 만들었던 영화들을 제법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우리가 트럼프 타워의 내부를 살펴보고 있을 때쯤,
“오라클에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일단의 사람들, 트럼프기업 측에서 나온 이들로 보이는 이들이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네. 그렇습니다. 그쪽은?”
“실례했습니다. 저는 트럼프 기업의 부사장을 맡고 있는 레널드 딕슨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을 모시러 왔습니다. 오시는 길에 불편함은 없으셨는지요.”
“네, 뭐 걱정해 주신 덕분에. 그런데 트럼프 씨는 어디에 계시는지?”
“아, 그게… 사무실이 있는 26층에 머물고 계십니다.”
순간, 나와 이어진의 시선이 마주쳤다.
“…26층에 말입니까?”
“아, 네. 아무래도 여러분들을 맞을 준비를….”
약간은 차가워진 이어진의 말에 레널드 딕슨, 그가 조금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하긴, 누가 봐도 지금 상황은 우리가 그들을 도와주러 온 상황이니까.’
그나저나 트럼프 이 양반, 급하다고 들었는데 아직 살 만한가 보네?
그게 아니면.
‘…나를 길들여 보겠다는 건가?’
물론 나의 착각일 수도 있었지만.
과거, 도널드 트럼프 그가 이런 식으로 상대방의 감정을 휘저어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일부러 약속 시간에 늦게 나간다거나 악수를 할 때 상대방의 손을 꽈악 잡는 식으로 압박을 가해 심리적 우위에 서는 등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뭐 이렇게 구원을 주려는 사람에게까지 이런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지만.’
그렇다면?
“그렇습니까?”
이쪽에서도 그에 맞는 대접을 해 드려야겠지.
“네.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우리를 안내하겠다는 듯 우리를 향해 손을 내민 사람들, 트럼프 기업 측 사람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네?”
“그쪽으로는 가지 않을 겁니다.”
“그게 무슨…?”
나는 다소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트럼프 기업측의 사람들,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스트 73번가. 오라클 맨하탄 지점. 시간은 내일 오전 11시.”
“…네?”
“회의는 그때 그곳에서 있을 겁니다. 그러니 트럼프 씨에게 전하십시오.”
나는 26층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직접 와서 가져가라고.”
누가 우위에 있는지는 확실히 하는 게 좋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