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교요(敎擾) (1)
“순순히 항복할까?”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 그 소리에 고개를 든다.
그러자 이어진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가요?”
내가 묻자 내 쪽으로 숙인 이어진, 그가 입을 열었다.
“재벌들.”
간결한 말.
아무래도 그는 아까 신세현의 집에서 나눈 대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하긴, 대상이 대상인 만큼 미래가 궁금할 테니까.
“당연히 항복하지 않겠죠. 그러기엔 그들이 쥐고 있는 것이 너무나 크니까. 뭐 원체 버릇이 없기도 하고요.”
“버릇이 없다?”
“네. 그들은 일평생 손에 쥐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자신들의 자리를 당연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이죠. 그런 이들이 직접 나서 항복을 하고 포기를 한다? 말도 안 되는 말이죠.”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이어진, 그가 혹시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부 쪽에서 대놓고 압박을 하면 그들 또한 힘겨울 텐데?”
그는 정부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겠죠. 지금이 5공 때라면.”
“5공 때라면?”
“네. 그때라면 그들 또한 바짝 몸을 사렸을 거예요. 그땐 정말 물불 가리지 않았을 때니까. 하지만… 이미 늦었어요. 이제 이 나라에 있는 건 언제 총 맞아 죽을까 두려워하던 새끼여우들이 아니니까요.”
나는 가만히 우리가 노리는 이들을 생각했다.
분명 우리나라의 재벌들이 아직 어설펐던 시절이 있었다.
1공화국에서 5공화국 시기까지 정부의 애완견이 되어 배를 불리던 시절의 재벌들이었다면 정부의 컨트롤이 가능했다.
그땐 재벌들도 국책사업에 목말랐던 시절이니까.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경제가 변하면서 그 입장과 위치가 달라져버렸다.
탈주한 짐승.
만약 주인이 강제하려 한다면 주인의 목을 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의 재벌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신세현, 그의 개혁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자본이면 자본, 경험이면 경험, 사람이면 사람, 모든 역량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아….”
“네. 그러니 신세현도 만약 움직인다면 그는 처참한 실패를 겪을 거예요. 물론 당선 초반인 지금에야 반짝 성과를 거둘 수 있겠지만 결국 절망하겠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시간도 자본도 그의 편이 아니지.”
“그렇죠. 아마 그를 보호해 주던 방패. 민심이 이반하는 순간 그는 쇠락하겠죠. 그리고… 타협할 거예요. 그 순간이 자신의 몰락지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에요.”
그러자 이어진, 그가 조금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거참, 항복은 신세현 저 사람이 하게 되겠구만.”
그의 말은 과거 내 기억과 닿아 있었다.
“아마도요. 물론 우리가 끼어들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거기까지 말을 마친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정부의 목줄을 잡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기업의 목을 잡는 거죠.”
“……방법은 있는 거야?”
“방법이요?”
“그래. 아무래도 이번에 건드리는 사람들이 사람들이니까.”
이어진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약간의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뭐 제법 숫자가 많긴 하죠.”
“제법 정도가 아닐 텐데?”
“그 정도면 제법 정도죠. 많아 봐야 90개. 뭐 중견까지 합해도 1000개가 안 될 테니까.”
“야! 그건….”
“농담이에요.”
말을 마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나는 피식 웃으며 차창 너머로 보이는 불빛들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아까 말씀 드렸다시피 이건 서로가 서로를 향해 칼을 들이미는 전쟁이 아니니니까.”
“전쟁이 아니다?”
“네. 이건 전쟁이 아니에요. 나간 짐승을 돌아오게 만드는, 야성을 죽이는 과정. 그러니까….”
나는 말을 맺었다.
“교요(敎擾 짐승을 가르치어 길들임)죠.”
“교요?”
“네. 전쟁은 항전을 낳고 항전은 소모를 낳죠. 굉장히 비경제적인 행위에요. 그러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죠.”
사냥꾼이라면 그럴 수 있다.
사냥꾼이라면 야성의 짐승을 사냥하는 것을 즐기는 이들이라면 피를 즐길 수도 있다.
하지만 사냥꾼, 유목민은 제국을 이룰지언정 그 제국을 유지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미래를 가꿔야지.
“필요의 문제인가?”
“필요의 문제예요. 돈이 일하게 만들어라. 사람이 일하게 만들어라. 너를 위해. 그러니… 죽어 가는 짐승을 먹어치우는 것보다는 가둬 놓고 키우는 것이 더 남는 장사죠.”
언젠가 들어보았던 잠언. 나는 그 말을 입에 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순순히 잡히지 않을 텐데?”
“물론 그렇죠. 하지만….”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눈앞에 거절할 수 없는 맛좋은 먹이가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뭐?”
“먹음직스러운 먹이, 그 전까지 전혀 맛본 적 없었던 먹이. 그 먹잇감이 눈앞에 어른거린다면. 그렇게 된다면….”
나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물었다.
“그들이 멈출 수 있을까요?”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
2003년 2월 25일.
몇 주째 계속된 로또 광풍에 힘입어 로또 복권의 1등 당첨금이 835억 원으로 치솟고 가수 보아의 2집 앨범이 한국 가수로서는 최초로 일본 오리콘차트 1위에 오른 그때, 대한민국 정치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국민 여러분! 저 신세현은 오늘 이 자리에서 선언합니다!”
그것은 바로 봉황의 의자, 그것에 앉는 자가 변했다는 것.
지난 5년간 왕좌를 차지하고 있던 존재, 김대중 대통령이 왕좌에서 물러나 초야로 돌아가고 그 자리에 신세현이라는 젊은 피가 수혈되었다는 것.
대한민국의 한 세대가 끝을 맺고 다른 세대가 시작되었다는 것, 그것이었다.
“우리 대한민국은 가능성이 있는 나랍니다!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그만한 가치를 인정받을 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만큼 저는 이뤄보이겠습니다! 우리나라, 우리 대한민국의 모두가 평등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를!”
그러자 사람들은 열광했다.
언더독(Underdog). 이길 확률 2%의 불가능을 뚫고 승리한 자. 흙수저 출신으로서 입지전적인 신화를 이룩한 자. 대한민국 유일의 만기 육군병장 출신의 대통령.
신세현. 그가 이 나라 대한민국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신세현 대통령, 오늘 오전 청와대에 입성, 김대중 전 대통령과 대담 후 관저로 이동 - 조X일보. 2003. 02. 25]
[신 대통령 내각 관료들 인수인계 마치고 본격적인 업무 시작, 대전략 드러날 듯 - 중X일보. 2003. 02. 25]
[국민들 제16대 행정부에 기대 급등! 코스피 지수 장중 25포인트 상승! - 데X리경제. 2003. 02. 25]
[Y2K : ㅋㅋㅋ 내가 뽑은 대통령이다 ㅋㅋㅋ이번엔 잘 할려나?]
[그렌라간 : 뭐 시작은 괜찮을 것 같은데? 연초부터 유가도 떨어지고 코스피도 정상화 되고 있으니 상황은 나쁘지 않아]
[nayo241 : 오 그래?]
[인천고양이 : 그렇다니까 아무래도 오라클이 타이밍 좋게 쭉쭉 치고 나가는 판이니까. 일단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단 말이지]
[기간토마키아 : 그렇다는 말은…]
[체리쥬빌레 : …잘 하면 바뀔 수도 있단 말이지 이 나라가]
하지만 잔치가 벌어졌다고 모두가 웃을 수는 없는 법. 그 와중에 이를 숨기며 찬웃음을 짓는 이들도 있었다.
“이거… 취임사 한번 번지르르하구만 아주 패기가 넘쳐.”
그들은 바로 자본가들.
대한민국의 경제계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들이자 이 나라의 목숨을 쥐고 있는 자들, 반 백년이 넘는 시간을 이용해 자신들만의 왕국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겨우 평검사 출신에 딴따라가 말 한 번 잘했다고 참… 아니 뭐 개나 소나 다 정치한다고 이 난리 아닙니까.”
“그 개나 소가 대권을 잡았으니 큰일 아니겠습니까. 무식한 놈이 힘이 센 법이라고 주책없이 휘둘러 대는 칼에 꽤나 많은 일이 벌어질 겁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그래도 그치가 눈치는 없는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번에 보니 말은 좀 통하는 사람 같던데….”
“아뇨 필연입니다. 그가 서민 대통령이란 슬로건을 깔고 나온 이상 그는 물러설 곳이 없어요. 그와 우리 사이엔 타협은 이뤄지지 않을 겁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목숨줄일 테니까요.”
그들에게 신세현이라는 남자는 운 좋게 왕좌를 차지한 남자, 초임 국회의원 시절의 인기를 통해 대권을 잡은, 소위 족보 없는 딴따라였으니까.
“하긴 뭐 그렇긴 하겠죠.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현실을 보여 주는 거죠. 이상만으로 살기엔 이 세상이 너무 팍팍하다는 걸. 그리고 나서 살살 달래면 지깟 것이 어쩌겠습니까. 아마 순순히 목줄을 매겠죠.”
“하하, 명안이십니다. 명안이에요. 그러면 일단 평소대로 언론사부터 시작할까요?”
그렇기에 그들은 움직였다.
그들의 인식 하에 대한민국이란 그들의 영지, 그런 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자를 가만히 내버려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론은 물론 인터넷 조작도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요즘엔 그런 것들로 여론이 만들어진다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측근들의 모럴을 건드리는 게 좋습니다. 원래 민주당쪽에겐 그쪽이 아킬레스건 아닙니까.”
하지만 얼마 뒤.
“회장님!”
음모를 꾸미고 있던 그들, 신세현을 향한 칼을 갈고 있던 그들. 그들은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지금 회의 중인 거 안 보이나?”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급한 일이라….”
“급한 일?”
“네. 그게… 정부 쪽에서 긴급발표를 한답니다.”
“뭐어? 긴급발표?”
왜냐하면 그들의 앞에 도래한 현실이 그들의 예상을 뛰어 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네. 아무래도 개혁정책에 대한 발표인 것으로 사료됩니다.”
“빌어먹을! 다들 사태가 이렇게 될 때까지 뭘 하고 있던 거야!”
“그, 그게… 아무래도 비밀리에 일이 처리되어….”
“변명! 지금 그게 변명으로 끝날 일인 것 같아! 당장 움직여 그리고 어떤 발표일지 찾아내!”
그렇게 갑작스러운 사태를 맞아 바쁘게 움직인 그들,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대한민국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 인프라 뉴딜! 총사업비 54.1조 원 투자, 일자리 100만 개 창출.
2. 안전망 강화 뉴딜! 총사업비 28.4조 원 투자, 일자리 33.9만 개 창출.
3. 디지털 뉴딜! 총사업비 58.2조 원 투자, 일자리 90.3만 개 창출
4. 그린 뉴딜! 총사업비 73.4조 원 투자, 일자리 65.9만 개 창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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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자금 300조 원대의 대한민국판 뉴딜(New Deal) 정책.
대한민국의 화려한 비상을 향한 아주 달콤한 미끼였다.
“이, 이건….”
“도대체 이 무슨…?”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