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구원자 (2)
다음날.
나는 오라클 맨하탄 지점, 센트럴파크가 내려다보이는 이스트 73번가 고층 건물의 맨 꼭대기 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변을 바라보자 보이는 풍경, 그것은 과거 TV영화 속에서나 보았던 모습.
드넓은 하늘과 엷게 떠 있는 구름, 아래를 보면 어퍼사이드의 오래된 가게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고,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의 머리가 마치 쌀알처럼 작게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 사람, 올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려 바라보자 그곳에는 세련된 외형의 남자, 고급 수트와 잘 관리된 머리칼, 성공한 사업가의 전형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3류 증권사에서 하루하루에 고통스러워했던, 하지만 이제는 수백만 달러의 연봉을 자랑하는 사업가, 이어진이 내게 커피잔 내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라.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어제 있었던 일, 트럼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트럼프요?”
“그래. 그 사람.”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 사람, 오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나 싶어서.”
이어진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긴,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런 말, 그러니까 내가 어제 했던 말을 듣고 분노했을 수도 있겠지.
성공한 사업가들이란 대부분 이성적인 사람들이지만, 개중엔 감정적인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그의 걱정을 가볍게 웃어 넘겼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트럼프, 도널드 트럼프라는 인물은 순간의 감정에 휘둘려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네. 오지 않고서는 못 배길 테니까.”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이어진, 그가 한 모금 자신 몫의 커피를 마시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치만 그 사람, 들리는 말로는 자존심이 제법 센 사람이라던데?”
“하하. 자존심이 세긴 하죠. 하지만 그보다는 욕심이 더 강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분명히 올 거예요.”
내가 아는 트럼프, 그라면 분명히 그럴 테니까.
그리고 잠시 뒤.
오전 10시 45분.
내가 트럼프 기업 사람들에게 통보한 시간이 불과 15분 남짓 남아 있던 그때, 마치 운명처럼 누군가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세요.”
그러자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오라클 직원, 그녀가 나에게 한 사람의 도착을 알려 주었다.
“무슨 일이죠?”
“1층 로비에 트럼프 씨가 도착했다는 연락입니다.”
순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네.”
“그럼 이쪽으로 모시세요.”
그렇게 말을 마친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이어진을 바라보았다.
“봤죠?”
그러자 이어진, 그가 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어 보였다.
“그래 맞네.”
아무래도 남아 있던 걱정이 이제야 사라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트럼프가 온 것에만 만족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기세싸움.
그것이야 가장 기본적인 것, 현재 힘의 강약이 명확하고 갑을 관계가 명확하니 트럼프 쪽에서 다소 자세를 낮춘 것이지만, 우리 쪽에서 빈틈을 보인다면 금세 역전될 수 있는 허망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도록 하죠.”
“그래. 일단 먼저 트럼프 기업의 부채 상황부터 짧기 확인하고 갈게.”
“네.”
“먼저 현재 트럼프 기업의 부채 대부분을 가지고 있는 건 시티 은행이랑…….”
때문에 나와 이어진이 트럼프를 맞을 준비를 빠르게 마친 그때.
“트럼프 씨가 도착하셨습니다.”
드디어 그가 도착했다.
직원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트럼프가 내 회사, 내 영지에 도착했다는 말을 들은 그때, 찌르르- 날카로운 바늘이 검지 끝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어디쯤 왔죠?”
“엘리베이터 쪽입니다.”
아무래도 과거 내가 보았던 그의 모습, 그의 이미지, 그의 영향력을 현재의 내가, 내 몸이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트럼프라면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 현재 내가 밟고 있는 땅의 대통령을 지냈던 남자. 여러모로 이색적인 사건들을 만들어 낸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거기에 매몰되서는 안 되겠지.’
나는 곧 내 몸과 정신을 진정시켰다.
분명 위험한 상대를 앞에 두고 방심을 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겠지만 눈앞의 상대를 필요 이상으로 크게 생각하는 것 또한 지양해야 할 일이었다.
명확한 파악과 확실한 대응.
그것이 사업가에 기본 조건이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명확히 봐야겠지.’
그러자 순식간에 내 몸을 채웠던 기대와 긴장이 사르륵-, 마치 고여 있던 피가 빠지듯 사라지며 그 자리를 가벼운 평정이 가득 채웠다.
“준비하죠.”
“그래.”
그리고 그때를 맞춰, 달칵-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그 순간, 내 눈앞으로 익숙한, 하지만 조금은 낯선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것은 직원의 목소리와 함께 내 시야 안으로 들어온 남자.
황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칼을 반짝이며 회의실 안으로 불쑥 몸을 들이민.
거대한 체구, 거의 2미터는 족히 되어 보일 법한 체구의, 부리부리한 눈빛이 인상적인 사내.
바로 도널드 존 트럼프(Donald John Trump).
과거, 내가 있는 이 국가,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의 제 45대 대통령의 모습이었다.
‘도착했군.’
나는 회의장 안으로 들어온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는 도널드 트럼프, 현재 내 체구의 거진 4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자를 향해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환영합니다. 트럼프 씨. 제가 바로 오라클의 주인. 김준영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일순, 이채를 띤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트럼프.
약간은 피곤해 보이는 안색을 한 그가 특유의 눈살을 찌푸린 표정을 짓더니 이내 천천히 무릎을 굽혀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반갑소. 듣던 대로 무척이나 ‘젊은’ 분이군.”
그리고는 가볍게 두어 번 손을 흔들고 천천히 손을 떼며 몸을 바로 했다.
과거, 그가 여러 국가의 정상들을 만날 때 손에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꽈악 힘을 줘 악수를 했던 것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가벼운 접촉이었다.
‘하긴, 내 외면을 보면 성인이었던 정상들과 같은 방법은 사용할 수 없겠지. 바로 티가 나기도 하고 또 지금은 그가 아쉬운 소리를 하러 온 상태니까.’
아무튼 그렇게 첫 인사를 마친 우리는 준비된 자리로 다가갔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그럽시다.”
그렇게 회의장 안쪽으로 들어온 사람은 나와 이어진, 트럼프와 어제 보았던 트럼프 기업의 부사장 레널드 딕슨을 비롯한 각 회사의 직원들 한 명씩. 계약의 성사 여부를 결정하는 자리인 만큼 실무진들을 제외한, 각 그룹의 수장들만 회의장에 남았다.
“차는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굳이 따지자면 콜라, 다이어트 콜라로. 가능하겠소?”
“준비해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온 차를 마시면 간단히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쯤, 도널드 트럼프 그가 무거운 낯으로 입을 떼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어제 일은 무척이나 유감이오.”
살짝 굳은 얼굴과 무겁게 움직이는 입가. 그의 모습에서 어제 일에 대한 불편함이 묻어났다.
아무래도 그의 입장에서는 많이 참을 것일 것이다.
과거, 그의 스타일로 미뤄보아 당장 협의를 파투내지 않은 것도 용하니까.
‘그 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말이지.’
하지만.
그럴수록 나의 미소는 더욱 더 짙어질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저리 속내를 보일수록, 그의 초조함을 알아챌수록, 나의 돈이 가지는 가치가 더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까?”
“그렇소.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미리 말씀을 하셨으면 될 텐데.”
“글쎄요. 장소의 문제라기보다는 마음가짐의 문제였으니까요.”
“그 말은?”
“제 성격상 장난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도널드 트럼프, 그가 이내 이채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만약 그가 어제 했던 행동, 26층까지 나를 불러들인 그 행동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면 지금 당장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되물었을 것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듣던 대로 나이에 비해 조숙하시군.”
그래, 이렇게 대답하겠지.
나는 겸연쩍은 표정을 짓는 도널드 트럼프,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조숙이라는 단어는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나이란 가만히 있어도 공짜로 먹는 것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현재겠죠.”
그러자 그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좋소. 그럼 과거의 이야기는 이쯤 합시다.”
그리고는 조금은 목이 마른 안색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콜라를 들어 그것을 마신 뒤, 묵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리다. 우리 트럼프 기업에 대한 오라클의 투자, 얼마까지 가능하겠소?”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그가 더 몰린 것 같았다.
아마 평상시의 그였다면 이렇게 빠르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니까.
물론 마음만 같아서는 그런 그를 좀 더 조련하고 싶었지만.
궁지에 몰린 생쥐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법, 이 이상 더 그를 자극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5억 5천만 달러.”
나도 조금은 그에게 맞춰 줘야겠지.
그러자 내 대답을 들은 사람, 도널드 트럼프, 그가 살짝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5억 5천만 달러?”
아무래도 내가 부른 액수가 약간 놀라운 것 같았다.
“네. 5억 5천만 달러. 어떠십니까? 이 정도면 만족하십니까?”
“…의외로군.”
“그런가요?”
“그렇소. 오라클 측의 태도 때문에 터무니없는 액수를 부를 줄 알았거든, 그런데 혹시 우리 회사 이야기를 들은 건가?”
“어떨 것 같은가요?”
그러자 그가 조금은 무거워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들었겠지. 그렇지 않으면 나오지 않을 액수니까. 뭐 이 바닥에 워낙 입이 싼 놈들이 많기도 하고.”
“뭐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트럼프 씨 입장에서는 그게 더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금액을 조율하고 또 줄다리기를 할 시간을 줄일 수 있을 테니까.”
“그 또한 맞는 말이지… 뭐 좋소. 그럼 내 다시 한번 확실하게 묻지. 귀측, 그러니까 귀사 오라클 측에서는 정말로 우리 트럼프 기업에게 5억 5천만 달러를 투자할 생각이 있는 것이오?”
“물론입니다. 원하신다면 그 이상도 가능합니다.”
순간, 그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 이상?”
아무래도 5억 5천만 달러, 이상도 가능하다는 내 말에 살짝 놀란 것 같았다.
“네. 그 이상. 당신이 원하는 만큼의 돈을 투자해 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10억 달러를 원한다고 해도 말이요?”
“물론입니다.”
“…뭐라고?”
“믿기지 않으십니까?”
그의 얼굴에 일순 경계가 감돌았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살짝 찌푸려진, 짙은 생각을 담고 있는 눈동자.
그렇게 한참동안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던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도대체 나한테 바라는 게 뭐지?”
“바라는 것이요?”
“그래. 나는 바보가 아니야. 모든 거래에는 그에 맞는 목적이 있지. 하지만 자네, 아니 당신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에게 그 목적을 이야기하지 않았어.”
그가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제가 그랬던가요?”
“틀림없이. 그러니 나는 듣고 싶네. 당신. 그래 김준영이라고 했던가.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거지? 도대체 내게 원하는 게 뭐야?”
그의 물음에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내게 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의문을 해소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가 느껴졌다.
“제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 말입니까?”
“그래.”
“그런 건 없습니다.”
“뭐?”
“제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은 그것은….”
잠시 말을 멈춘 나는 천천히 도널드 트럼프, 그를 바라보며 말을 맺었다.
“지금의 당신은 줄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래. 나는 그의 미래에 투자를 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