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나락의 끝에서 (1)
월스트리트 저널(The Wall Street Journal).
미국 최고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신문이자 뉴욕 타임즈, USA 투데이와 함께 미국의 3대 신문으로 일컬어지는 신문.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와 함께 세계 경제지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미국 경제지 중 가장 공신력 있는 이름을 자랑하는 신문.
전 세계 700여개 미디어 관련 회사를 소유한 '미디어 황제' 루퍼트 머독 회장의 ‘최애캐’그곳에 도착한 우리는 곧바로 월스트리트 저널 본사 건물의 상층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Mr. Kim.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자신들을 치프 에디터(Chief Editor, 편집국장)와 매니징 에디터(Managing Editor 부국장), 데스크 에디터(Desk Editor, 부장) 그리고 시니어 라이터(Senior writer), 비트 리포터(Beat reporter)라 밝힌 사람들이 나에게 연달아 악수를 청해왔다.
“하하 반갑습니다. 저는 치프 에디터 앤디 서랜드라고 합니다. 그동안 한번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저는 매니징 라이터 댄 모리스라고 합니다. 당신의 기사를 그리고 오라클의 대한 기사를 여러 번 검수한 적이 있었습니다.”
“데스크 에디터 시빌라라고 합니다. 사실 오늘 일이 있었는데 당신을 보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뭐지?
뭐 나에게 특집기사까지 내준다는 이야기를 했던 만큼 어느 정도 호의, 환대는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 정도의 환대는 나름 의외였다.
자신들을 데스크 에디터, 그리고 시니어 라이터, 비트 리포터 정도라면 모르지만, 내가 알기로 치프 에디터와 매니징 에디터의 이름값은 그리 가볍지 않다.
말마따나 실세 중에 실세, 월스트리트 저널을 통해 월가의 흐름을 움직이는 이들이 바로 이 사람들인 것이다.
송승우 또한 약간 의외였는지 나를 향해 달려드는 사람들을 막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뭐 그 사람들이 칼을 들고 달려드는 것도 아닌 만큼, 나는 내게 다가오는 송승우를 제지하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반갑습니다. 앤디 서랜드 씨.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한 번쯤 월스트리트 저널에 와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관계를 맺게 되는군요.”
본래 호의(好意)를 보이는 자에겐 맞장구를 쳐 주고 악의(惡意)를 보이는 자에겐 주먹을 내미는 법이니까.
‘뭐 이런 자들과 관계를 맺어 둬 나쁠 것이 없기도 하고.’
그러자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 그들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감돌았다.
아무래도 내 대응이 제법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이런, 그러셨군요. 그럼 더 일찍 초대할 걸 그랬습니다. 저희의 불찰이로군요.”
“하하 아닙니다. 이렇게라도 불러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죠.”
아무튼 그렇게 조금 격한, 아니 솔직히 말해 많이 격한 사람들의 환대를 받은 뒤, 나는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인터뷰 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바쁘신 분을 이렇게 잡고 있을 수도 없는 법이니까요.”
“감사합니다. 승우 씨 같이 가도록 하죠.”
그리고 그렇게 인터뷰 룸으로 자리를 옮기는 와중, 나는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 여기자에게 들리지 않게 조심스레 송승우에게 말을 걸었다.
“어째 분위기가 좀 이상하죠?”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송승우, 그가 묵묵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가 보기에도 아까의 분위기, 아니 월스트리트 저널 전체의 분위기가 약간 특이하다 생각되는 것 같았다.
하긴 지금 이 순간에도 슬쩍슬쩍 우리를 지켜보는 눈들이 보이고 있었으니까.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글쎄요? 그저 이사님에 대한 단순한 호의 아닐까요?”
에이 설마, 월스트리트 저널 사람들이 어린 아이도 아니고….
그런데 그때.
“맞아요.”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내가 고개를 돌리자 우리의 앞서 걷고 있던 여기자, 우리를 안내하던 젊은 인도계 여기자가 우리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짓고 있었다.
“들으셨어요?”
“하하. 네. 제가 귀가 좀 밝은 편이라서요.”
그리고는 살짝 이를 드러내며 웃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실 다른 분들이면 저렇게 치프까지 나올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런가요?”
“네. 하지만 Mr. Kim. 당신은 모르시겠지만 저희 월스트리트 안에서 당신은 꽤 핫한 사람이거든요.”
그녀의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핫한 사람이라고요?”
내가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주르륵 내 연혁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네. 불과 11살의 나이에 하버드 대학 입학, 그리고 투자 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하더니 조지 소로스와 함께 일본 외환시장을 뒤흔들고, 얼마 뒤엔 30억 달러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요 근래엔 야후와 아마존이라는 걸출한 회사의 IPO까지 성공적으로 끝냈고요. 어때요. 이 정도면 경제 전문지인 우리 WSJ에서 꽤나 핫 할 만하지 않나요?”
…듣고 보니 그럴 듯하긴 했다.
하긴 그들의 입장에서는 나와 내가 일으킨 사건 하나하나가 신기해 보일 수도 있겠지.
불과 2년. 짧다면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난 일들 치고 꽤나 특이한 일들이었을 테니까.
“저에 대해 조사를 좀 하셨나 봅니다.”
내가 가볍게 웃으며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하하, 인터뷰 대상에 대해 조사하는 건 기본이니까요. 아무튼 그 덕분에 우리 회사 안에서 그 당신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당신의 생각보다 더 커요.”
그리고는 천천히 인터뷰 룸의 문을 열며 말을 이어나갔다.
“왜냐하면 당신은 가장 미국적인 사람이니까요.”
“제가 가장 미국적인 사람이라고요?”
“네.”
그녀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저를 보세요 Mr. Kim. Mr. Kim도 아시겠지만 저는 인도 사람이에요. 정확하게는 펀자브 지방, 그것도 불가촉천민 출신의 여자죠. 이런 제가 인도에 있었다면 어떤 삶을 살 수 있었겠어요?”
그녀가 장난스러운, 하지만 전혀 장난스럽지 않은 말을 입에 물었다.
“……아마 지금 같지는 않겠죠.”
“네. 맞아요. 아마 지금 같지는 않을 거예요. 어쩌면 지금쯤 아이를 낳다가 죽었던가 혹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상황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지금 여기 월스트리트에서 기사를 쓰죠. 사람들의 존경도 받아요. 제가 있는 곳이 인도가 아닌 이곳 미국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당신도 그렇죠.”
인터뷰 룸에 들어간 그녀, 그녀가 우리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을 통해 보여 주고 싶은 겁니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혈통, 어떤 인종이든 이 땅에서는 성공을 거둘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혈통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 그것만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 라고요. 왜냐하면 당신은… 하워드 휴스(Howard Hughes). 그래요 하워드 휴즈 같은 사람이니까.”
“꽤 재미있는 말이군요.”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당신에게도 유익한 기회가 될 거예요. 이 기사가 나가고 나면 아마 나스닥 시장에 관심을 두지 않은 사람들치고 당신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녀가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긴 뭐 모든 사람들이 알 것이라는 것은 약간 과장이 섞여 있겠지만, 이번 인터뷰가 내게 도움이 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매체를 통한 공신(公信). 그것은 쉬이 얻을 수 없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 기사를 당신이 쓰는 겁니까?”
그러자 내 말을 들은 여기자, 그녀가 아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이거 실례했군요. 소개가 늦었습니다. 제 이름은 찬드라 세르카(Chandra Serka). 월스트리트 저널의 제너럴 어사인먼트 리포터(General assignment reporter)이자 오늘 Mr. Kim. 당신의 인터뷰를 맡은 사람입니다.”
순간, 나는 멈칫했다.
찬드라 세크라.
찬드라 세크라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아.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의 이름이 있었다.
그것은 앞으로 20년 뒤, 월스트리트 저널 사상 최연소 사장, 인터넷 시대 이후 월스트리트 저널을 이끌었던 기자 출신의 CEO의 이름이 바로 저런 이름이었다.
어쩐지 말하는 모습이나 분위기가 예사 사람 같지 않다 생각했더니 참….
그렇다면 이야기가 참 재미있게 되었다.
“찬드라 세르카라고요?”
“네. 왜 그러시죠?”
“아니요. 생각보다 더 재미있는 인터뷰가 될 것 같아서요.”
나는 가벼운 미소를 보이며 그녀와 악수했다.
과연 미래의 WSJ의 CEO가 쓰는 내 기사가 어떨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
이후의 인터뷰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쉽고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아 그렇다면 지금 영화도 준비 중이신 거군요.”
“네. 그렇습니다. 지금 저와 소로스 씨를 대상으로 한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고 또 제가 투자한 영화들이 올해 말, 혹은 내년 초에 상영을 앞두고 있습니다.”
찬드라 세르카, 그녀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능숙하게 나와의 인터뷰를 진행해 나갔던 것이다.
“자 그럼 일상적인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기로 하죠. Mr. Kim. 당신의 투자 방식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투자했던 기업들 모두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으니까요. 혹시 언제부터 투자를 시작한 건지 알 수 있을까요?”
“작년 초부터였을 겁니다. 일단 일본에서 필요한 자금을 조달한 뒤 바로 투자를 시작했죠.”
“하버드에 다니며 투자를 병행하기란 힘들었을 텐데요?”
“뭐 그렇긴 합니다만 주말을 이용했죠. 중간중간 있던 방학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당신이 투자한 회사에는 어떤 회사들이 있었습니까?”
“음… 일단 기본적으로는 실리콘밸리의 회사들에 투자를 했습니다. 개중에는 전통적인 제조업, 서비스업 기반의 회사들도 있었지만 중점을 둔 회사는 벤처기업들이었거든요. 주요 기업으로는 얼마 전 IPO를 진행한 야후와 아마존 같은 기업들이 있겠군요.”
“야후와 아마존이라… 요즘 들어 나스닥에서 자주 이름을 보이는 이름들이군요. 혹시 그 회사들의 초기 투자에 참여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제리 양과 제프 베조스, 두 사람이 단칸방에서 샌드위치를 뜯을 때부터 참여를 했죠.”
“하하, 그 두 사람이 나스닥 역사상 가장 빠른 시간 만에 억만장자가 된 걸 생각하면 정말 어마어마하군요.”
물론 그녀가 인터뷰를 진행하는 와중, 가끔씩 민감한 내용들에 대한 질문들이 튀어나오긴 했지만, 나는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그녀의 질문을 넘겨 버렸다.
“좋습니다. 다음 질문입니다. 음… 이건 좀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혹시 당신이 이번 IPO로 벌어들인 자금의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위험한데요? 저도 IRS(미국 국세청)는 무서워서.”
“하하 대략적으로라도 가능하시면 알려주시죠.”
“간단하게 말하면… 음, 월스트리트 저널. 이 회사가 입주해 있는 건물 정도는 어렵지 않게 살 수 있겠군요.”
그리고 그 결과, 나는 약 2시간가량여의 인터뷰를 거의 끝마친 뒤, 마지막 질문을 앞둘 수 있었다.
“자 그럼 마지막 질문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씀하시죠.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나를 바라보며 마지막 질문을 던지는 여자. 찬드라세카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슬쩍 시선을 돌려 우리의 인터뷰를 바라보는 사람들, 그녀의 시니어들의 모습을 한차례 확인했다.
그런 뒤 곧바로 자세로 바로 한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Mr. Kim. 앞서 말했다시피 당신은 미국 시장, 정확하게는 나스닥 시장에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죠. 하지만 일각에선 나스닥 시장의 전례 없는 활황, 호조가 단기적일 것이라는 전망이 대부분입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그녀, 아니 나아가 월스트리트 저널이 내게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 가장 알고 싶었던 질문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질문을 통해 나에게 듣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
나는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럴 리 없을 겁니다.”
“…그럴 리 없다고요?”
“네. 나스닥 시장의 활황. 그건 단기적인 작용이 아니라 장기적인 시장의 변동일 겁니다. 컴퓨터와 인터넷, 기술 발전과 사람들의 니즈. 그것들이 지금의 호조를 이어 갈 테니까요.”
“그 말은?”
“이 활황이 단기적이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 지금이 바로 투자의 때라는 말이죠.”
그러자 잠시 말을 멈춘 채 나를 바라보던 찬드라 세르카, 그녀가 기대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는 말은 Mr. Kim. 당신의 나스닥 투자 또한 앞으로도 계속될 거란 말입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죠. 물론 꼭 그것만 하지는 않겠지만.”
“…혹시 다른 사업을 준비하고 계시는 겁니까?”
“네.”
“구체적으로 어떤…?”
그녀의 시선을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간단합니다. 미국에서의 부동산 사업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동산 사업이요?”
“네. 그렇습니다.”
“실례지만 미국에서의 부동산 사업은 한국에서의 그것과는 많이 다를 텐데요?”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미 계획은 다 짜 두었으니까요.”
나는 나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찬드라 세르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긴, 그녀가 보기에 나는 전형적인 증권 투자자, 혹은 기업 투자자다. 그러니 내가 갑자기 부동산을 하겠다는 말을 꺼냈으니 약간 의아할 만도 하겠지.
하지만.
이미 나에게는 그럴 듯한 계획이 다 계획이 있었다.
‘내가 잘 모른다면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을 이용하면 되는 거니까.’
순간, 내 머릿속에 부동산 사업을 통해 대통령이 된 남자, 가발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풍성한 금발을 자랑하는 거구의 남성, 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