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예상외의 손님 (1)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온 순간 나는 현관문 쪽으로 다가가 귀를 대었다.
어떻게 할까.
만약 밖에 있는 것이 아버지의 가족이 아니라면, 설혹 아버지의 가족이 맞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까?
차라리 그냥 모르는 척 미래의 지식으로 미래를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럼 굳이 불편할 필요도 없을 텐데.
이런 감정이 슬몃슬몃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퍼억-
나는 내 가슴을 힘껏 내려쳐 망설임을 지워 버렸다.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어차피 이대로는 바뀌는 것이 없을 텐데.
물론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 그 전보다 나은 삶을 살수는 있겠지만 10살 남짓한 어린 아이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내가 만들고 싶은 삶. 아무것도 잃지 않는, 나아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삶을 위해서는 내가 가진 한계, 재산과 나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기회를 만들어 줄 사람이, 바로 이 문 밖에 있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좋아. 그럼!’
나는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그러자 끼긱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불쑥 문 안쪽으로 들어왔다.
터벅터벅-
순간, 나는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한 60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고 있는 노파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늦었구나. 조금만 더 늦었어도 그냥 갈 뻔했어."
낮은 목소리. 하지만 사람의 심장을 꽈악 옥죄는 듯한 목소리였다.
‘예삿사람이 아니다.’
나는 조심스러운 눈으로 노파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노파가 천천히 내게 눈을 맞추었다.
"···정말 명우를 닮았군."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언어.
그녀의 눈빛은 보석의 값어치를 재는 하는 감정사의 눈빛에 닿아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렸다.
‘명우’
김명우. 내 아버지의 이름. 이 이름이 나온 이상 이 사람이 나와 관계된 사람이라는 것은 명확하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집안과는 절대 얽히지 말라 하셨지만···.’
어머니와 아버지, 그 두 사람은 쉽게 말해 이뤄져서는 안 될 사이였다.
고전으로 치면 로미오와 줄리엣, 아니 신데렐라와 왕자에 더 가까운 사이로 만난 두 사람은 사랑이라는 감정만으로 자신들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벗어던지고 나를 낳았다.
사랑만 있다면 둘 사이에 존재하는 장애물을 넘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자라던 아버지에게 현실은 가혹했고 결국, 내가 태어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던 날 아버지는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사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 후로는 어머니 혼자 날 키우셨지.’
나는 노파의 뒤를 슬쩍 훔쳐보았다.
아마도 내 친할머니임이 분명한 노파, 그리고 그 뒤를 따르고 있는 정장차림의 남자들을 보니 아무래도 내 친가는 내 생각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집안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무조건적인 호의를 보이리라 생각할 순 없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그들, 아니 정확하게 내 눈앞에 있는 노파는 딱 한번 나를 찾았다.
그렇다는 말은 그녀에게 나 자체는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흐음,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일단 손자다운 모습으로 다가가야 하나? 일반적인 귀여운 손자의 모습으로?
아니, 그것은 악수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사람의 껍질을 뒤집어쓴 사자. 그런 이에게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정말이지 어리석은 짓이다.
물론 내가 아무런 욕심이 없는 10살의 꼬맹이라면 상관없지만, 나는 그녀의 힘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나는 혀를 질끈 깨물었다. 그러자 아릿한 고통과 함께 눈 끝으로 눈물이 핑 돌면서 굳어 있던 몸이 조금 풀려나갔다.
"안녕하세요."
나는 최대한 공손한 모습으로, 하지만 제법 의젓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노파가 속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가만히 나를 내려다본다.
긴장된 순간.
"···명우 놈의 씨답지 않군."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은 시선을 끈 모양.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슬쩍 자리를 비켰다.
그러자 노파가 방으로 들어와 날카롭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마치 사냥터를 확인하는 맹수같이.
"혼자 있는 것이냐? 너희 어머니는?"
어머니가 없는 것을 확인한 노파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빠르게 입을 열었다.
"엄마는 출근 하셨어요."
"어디로?"
나는 고민했다. 이맘때쯤 어머니는 동대문에 있는 의류 소매 업체에서 일하고 계셨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말할 순 없었다. 아직 나는 10살이었으니까.
그러니, 간단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10살 어린 아이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명확하고 힘 있게.
"동대문이요. 옷가게에서 일하세요."
그러자 노파가 가만히 자신을 수행하고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을 바라보았다.
냉막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아이의 어머니라면 지금 동대문에 있는 쇼핑몰에서 의류 소매업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라··· 아직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건가? 누가? 남자 자신이 아니면 노파가?
나는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곧 노파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의류 소매업? 어떤 업체지?"
"지원 의류라고 브랜드 없는 옷을 주로 판매하는 곳입니다."
"브랜드가 없는 옷?
"네. 평화시장에서 소규모로 생산하는 제품들을 판매하는 곳이라 브랜드를 특정할 수 없는 곳입니다."
노파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어머니의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
"···집안 꼴을 보니 장사는 그리 잘 안 되는 모양이구만."
"그게··· 사실 사장이 아니라 오후파트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있습니다."
점입가경이라는 듯 노인이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곤 날카로운 눈빛으로 잠시 방 안을 쓸어보더니 이내.
"따라오너라."
짧은 말을 남기며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뭐?
순간 나는 당황했다.
아니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한다고?
설마 실패한 건가?
하지만 우르르 수행원들이 빠져나간 뒤, 방금 전 노파의 질문에 대답을 한 남자가 여전히 남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원래 저런 식이구나. 원래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하고 움직이는 구나.
부자들의 마이페이스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보았지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약간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앞에 자리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두고 보겠다는 듯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어떻게 할까? 일단 그들이 누구인지 물어볼까? 아니면 어디로 가는 것인지 물어봐?
제법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갔지만 나는 잠시 그 질문들을 접어 놓기로 했다.
노파가 내게 선택권을 준 이상 과감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인 모습은 독이다.’
나는 남자를 스쳐 지나며 입을 열었다.
"가죠."
그러자 냉막한 인상의 남자가 잠시 멈칫 하더니 이내 천천히 내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
밖으로 나오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거대한 자동차, 과거 회장님들의 전용차량으로 일컬어지던 국산 대형 세단들의 모습이었다.
"여기 타시면 됩니다."
앞을 보자 검은색 1992년형 뉴그랜져 한 대와 그 옆에서 뒷좌석 문을 열고 있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젊은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노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차가 한두 대가 아니었으니 아마 다른 차들 중 한 대에 타 있겠지.
슬쩍 뒤를 돌아보자 갑자기 벌어진 일에 놀란 동네 사람들이 다문다문 담장 너머로 고개 들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긴 내가 사는 곳은 성북구 미아동. 성동구 금호동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다.
그런 곳에 평소 보기 힘든 차들이 줄지어 들어왔으니 신기하기도 할 것이다.
그들에게 익숙한 차라곤 티코 같은 소형차나 오래된 봉고 같은 것들일 테니까.
‘뭐 이웃에 대해 관심이 많던 시기이기도 하고.’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 사이 나와 내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의 주인집 딸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조만간 어머니에게 이 소식이 전해질 것 같았다.
‘어머니가 놀라시겠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이제 곧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후.’
나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숨을 몰아 내쉰 뒤 차에 탔다.
그러자 서서히 차가 출발하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눈앞에 거대한 도시의 모습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1993년의 서울.
내 눈에 들어온 도시 서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푸르른 한강과 저 멀리 보이는 63빌딩.
아직 그리 높지 않은 건물들과 미세먼지 하나 없이 맑게 갠 하늘, 저 멀리 보이는 남산과 남산타워, 그리고 멀리 보이는 인왕, 북악산의 풍경까지.
차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분명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만약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여러 장 사진을 찍어 놓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스마트폰은커녕 플립 폰도 없는 시대지만.’
그렇게 차는 강변도로를 지나 서서히 종로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삼일빌딩, 교보문고, 국제빌딩 익숙한 건물들과 기억 속에서 사라진 건물들의 모습이 보이고, 거리에 선 사람들, 내가 보기에 조금 촌스러워 보이는 패션의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확실히 1993년은 1993년이구나.’
그러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현재 내가 아는 것이라곤 나의 친족, 아마 아버지의 혈족으로 짐작되는 노파가 제법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뿐, 그녀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또 어떤 사람인지 하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한 상황이었다.
물론 내게 여러 번 이런 기회가 있다면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주어진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았다.
‘예전에도 딱 한 번만 찾아왔었으니까.’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기회에 내 존재를 그녀에게 각인시켜야만 한다.
아주 명확하게.
그렇다면··· 일단 그녀가 누구인지 또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해야만 한다.
‘그래야 그에 맞출 수 있을 테니.’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조수석에 있는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러자 조수석이 타 있던 남자, 아까 내게 문을 열어 준 서른 초중반쯤으로 보이는 말끔한 인상의 남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네 말씀하시죠."
"저 삼촌. 지금 저희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순간, 그가 멈칫 하더니 이내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한규선 비서, 아니 한 비서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아무래도 내가 삼촌이라 부른 것 때문인 것 같다.
물론 나 또한 과거 내 나이 또래의 아니, 나보다 어려보이는 남자에게 삼촌이라는 말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지금으로선 어떻게 해서든 이 남자에게 정보를 얻어내야만 했다.
나는 어린 아이 같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에이, 엄마가 저보다 나이 많은 분한테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삼촌이라고 부를게요. 괜찮죠?"
내 말에 한규선이 떨떠름한 표정을 보였다. 하지만 굳이 거부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던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그의 위에 올라갈 확률이 그리 높지 않으니 상관없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긴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쉽게 말을 놓을 수 없었겠지.
새삼스레 내 위치를 확인하는 느낌이라 슬쩍 씁쓸했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최대한 밝은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규선 삼촌, 지금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식사를 하러 가는 중입니다."
"식사요?"
"네."
그러고 보니 지금은 12시 슬슬 식사를 하러갈 시간이긴 했다.
나는 고파오는 배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디로요?"
"그룹 소유의 호텔입니다."
순간, 오금이 부르르 떨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룹과 호텔.
그 말이 뜻하는 것은···
재벌(財閥).
내 아버지의 혈통이 재벌, 혹은 그에 준하는 집안의 그것이라는 소리였다.
‘미친···’
노파의 포스나 노파를 수행한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그들이 타고 온 차를 봤을 때 제법 힘 있는 사람일 것이라 생각한 했지만 설마 재벌이었다니··· 나로선 잭팟이 터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어느 호텔이에요? 혹시 신라 호텔?"
나는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물었다.
만약 신라라는 이름이 나온다면 정말 이 자리에서 빤스바람으로 탱고를 출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럼 그렇지.
아무래도 신라호텔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아직 기대를 접는 건 이르다.
나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한규선을 바라보았다.
"그럼···?"
그러자 그가 슬쩍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한성 호텔입니다."
순간.
‘아···’
나는 천국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하필이면!’
나는 보이지 않게 이를 악 물었다.
내가 기억하는 바에 따르면 한성 호텔은 재계서열 12위의 거대 기업인 한성 그룹에 속해있는 호텔로, 90년대 호텔 체인의 대표격으로 여겨지던 곳이다.
하지만 이 시기 한성 호텔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한성 호텔이란 말이죠?"
"그렇습니다."
"하······."
재차 확인한 나는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4년이라······.’
나는 물끄러미 차창 너머로 비쳐 오는 한성 호텔을 바라보았다.
"···좋네요."
나는 짧게 탄식했다.
희망과 절망이 묘하게 섞인 소리다.
그도 그럴 것이 한성 호텔은 5년 뒤 망하기 때문이다.
IMF 그 빌어먹을 것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