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충격요법 (2)
"···때깔을 보니 자메이카네."
아 물론 이어진의 입 안에서 터져 나온 커피의 원산지 말이다.
"푸흡! 으앗!"
"괜찮으세요?"
"아, 다 흘렸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뭐? 한성? 아니 설마 내가 아는 그 한성 말하는 거야?"
믿을 수 없다는 나를 바라보는 이어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가 말하는 한성이 재계서열 12위의 한성그룹을 말하는 거라면. 네 맞아요. 바로 거기가 제 친가에요."
그러자 이어진의 표정이 멍하니 풀려버렸다. 나의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을 감당하기 힘든 것 같았다.
"······허···."
"이제 제가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아시겠죠?"
이어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허 참. 그래. 한성이라면 그나마 말이 되긴 하네. 그 정도 그룹이라면 어디나 빨대 하나씩은 있을 테니까."
그런데 한참 동안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가 갑자기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표정을 일변,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만. 그럼 뭔가 말이 안 되는 게 있는데? 도대체 왜 그런 뒷배를 가지고 고려 증권 같은데 와서 직접 투자를 한 거야? 솔직한 말로 우리 회사 다른 회사들에 비해서 별로잖아. 좋은 거라곤 입사가 쉽다는 것뿐인데. 그거야 직원들 입장에서의 일이고."
그리곤 짙은 의심이 깃든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잇기 시작했다.
"게다가 너 만우제강이 뜰 거라는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15만 원 밖에 투자 안 했잖아. 생각해 보면 그것도 말이 안 되는데? 아니 도대체 왜? 한성가 사람이면서 왜 그런 짓을···?"
그의 찌푸려진 눈동자 안에는 나에 대한 짙은 의심이 담겨있었다.
합당한 의심. 머리에 꽃밭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할법한 정상적인 사고였다.
하긴 재벌가 사람이 15만원이라니 말도 안 되지. 아무리 어린 아이더라도 인정받은 아이라면 무제한적인 돈을 사용하는게 바로 재벌가다.
애초에 그들과 일반인의 상식선, 돈에 대한 가치가 다른 것이다.
"그건······."
하지만 나에게는 그가 모르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이유를 그에게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전 인정받지 못한 혈육이거든요."
그것은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김귀란이 관련된 이야기. 내가 회귀를 했다는 것을 제외한 우리 가족의 이야기였다.
‘물론 약간 소스를 쳐서.’
그러자 잠시 후.
"허······."
이어진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혀를 내두르며 머리를 쓸어내리는 모습이 마치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길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는 모습이다.
"···그러니까 너는 아직 너희 할머니한테 완벽하게 인정받지는 못한 상태인데 시험을 통해 인정을 받으면 한성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지? 만우제강에 대한 정보를 준 건 시험의 일환이고?"
그의 추측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의 빈곳을 그의 상상력이 대신해 주었다.
"네. 맞아요. 저희 할머니. 그러니까 한성그룹 회장님은 능력 없는 사람은 먹여 살릴 쌀이 아깝다는 주의시거든요. 뭐 그나마 혈육으로 인정받은 사람에게는 그게 좀 덜하지만 아직 저나 저희 어머니는 그런 것도 아니니까요."
이어진이 입을 허 벌리며 말했다.
"거 진짜 무서운 할머니네. 그런데··· 나한테 왜 이런 이야기까지 꺼내는 거야? 아니 물론 만우제강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물어봤지만, 그냥 대충 이야기할 수도 있었던 거 아니야?"
나는 불안과 기대가 공존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천천히 분위기를 잡으며 말했다.
"아저씨. 아저씨 보다 보니까 제법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는 거 아세요?
"으, 응?"
"아, 어른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건 실례인가요. 죄송해요. 그런데 아저씨. 아저씨도 이쯤 되면 눈치 채셨을 거 아니에요."
내 말에 이어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일견 어린아이에게 이런 말을 들어 불편하다는 모습. 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자신의 속내를 들켰다는 당황이었다.
"아니, 참. 거, 너는 무슨 열 살 애가···."
"아저씨."
이어진의 말을 끊으며 나는 조용히 속삭이듯 혀를 움직였다.
"그냥 툭 까놓고 말씀드릴게요."
그리곤 다소 긴장어린 기색의 이어진을 바라보며 나와 그의 미래를 바꿀 이야기를 입에 담기 시작했다.
"전 한성을 손에 쥐고 싶어요."
이어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뭐어?"
나는 그의 당황을 밟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으신 그대로에요. 저는 한성을, 한성 그룹 전체를 제 손에 쥐고 싶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10살 아이 혼자선 한계가 있어요. 그러니까 아저씨가 저를 좀 도와주셨으면 해요."
내 말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의 표정이 여러 번 바뀌었다.
당황, 불안, 의문, 의심, 그리고 미약한 기대.
그 모든 감정들을 확인하며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잠시 말 없이 나를 바라보는 이어진.
한참 동안의 침묵 끝에 천천히 그의 입이 열렸다.
"후, 그러니까 지금 나를 스카웃하고 싶다는 거지? 니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렇죠."
"어우 진짜··· 무슨 10살짜리 애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했겠지만···."
말을 멈춘 이어진이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 내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나 열어 보고 싶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포기한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뭐 굳이 증거가 있냐고 묻지는 않으마 보아하니 네가 그런 것도 없이 말을 꺼냈을 것 같진 않으니까."
정답이었다.
탁!
나는 테이블 위에 가방에서 꺼낸 것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갑작스런 상황에 이어진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보통 10살짜리 어린애의 가방에서 나올 만한 물건은 문구점에서 산 사탕이나 만화영화 주인공의 얼굴이 그려진 딱지 쪼가리 정도겠지.
하지만 내 가방에서 나온 것은 다르다.
두툼한 서류 뭉치 한 묶음.
그것은 판교의 땅 3만 평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리는 문서였다.
<소유주 : 김준영>
김귀란에게서 얻어 낸 이 땅은, 단순히 내 재산을 넘어 신분증 역할을 한다.
세상에 어느 평범한 10살 어린이가 부동산 3만 평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겠냔 말이다.
내가 나의 나를 증명할 증자를 보이자 이어진이 헛웃음을 내쉬었다.
"판교라면 분당 옆에 있는 데잖아. 안 그래도 요즘 그쪽을 좀 알아보고 있던 중인데···."
"알아만 보면 안 되죠."
"어휴, 너어는 진짜···."
10살 어쩌구 하는 말을 하려던 이어진의 입이 조개처럼 합 다물렸다.
이내,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어진 쪽이었다.
"···그런데 그와 별개로 너도 알고 있지? 네 생각, 엄청나게 허황된 이야기라는 거?"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재벌가라는 건 그렇게 쉽게 넘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너도 거의 사생아 비슷한 거라며."
마치 ‘아직 어린 너는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이미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보다 더 재벌의 위상이 공고해진 2020년의 세상을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일반적이라면 그렇죠. 하지만 전 자신 있어요."
"그래?"
"네. 그리고 아저씨만 도와준다면 가능성은 더 올라갈 거고요."
"허허···."
내 칭찬에 이어진이 잠시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슬쩍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연다.
"뭐 그래. 그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건 네 바람이지. 내 바람은 아니지 않냐?"
아무래도 그는 나에 대한 시험을 계속하고 싶은 것 같다.
"그래요?"
내가 의문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자 그가 다듬다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마따나 내가 너를 도와 한성가를 잡을 수 있다고 치자. 그럼 나한테 그런 능력이 있다는 이야긴데··· 그런 능력이 있는 내가 왜 굳이 너를 왜 따라야만 할까? 그 능력으로 다른 일을 하는 게 더 나한테 이득일 텐데?"
말을 마친 그가 어찌 대답할 것이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내가 무슨 대답을 할지 두고 보겠다는 듯한 표정, 내 대응에 따라 결정을 하겠다는 태도였다.
"아저씨."
나는 그를 바라보며 슬쩍 웃어보였다.
그러자 그가 심드렁한 표정을 유지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
"아저씨 혹시 삼국지 좋아하세요?"
내 말에 이어진이 뜬금없다는 듯 눈을 얇게 뜨며 나를 보았다.
"아니. 예전에 한번 읽어 보긴 했는데 그 이후로는 별로. 그런데 지금 그게 왜?"
"전 삼국지 좋아해요. 지금 이 시대에는 보기 드문 치열함과 낭만이라는 게 있거든요."
말을 마친 나는 오른손 검지를 펴 커피 잔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게 뭔데?"
"그건···"
나는 이어진을 향해 슬쩍 웃어 보이며 커피잔 속에 넣었던 손가락을 꺼냈다. 그리곤 천천히 테이블 위에 세 조각으로 잘린 동그라미를 그렸다.
三顧草廬.
"답을 찾아 세 번 정성을 들이니, 마침내 와룡이 깨어나 천하삼분을 논하였다."
순간, 이어진이 묵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삼고초려."
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서서가 떠난 뒤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가 등용하는 장면이에요."
삼국지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장면인 만큼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어보였다.
나는 왜 이런 말을 하는 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이어진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아저씨. 아저씨가 생각하기에 왜 제갈량은 조조도 손권도 아닌 유비를 주군으로 방랑 생활을 시작했을까요? 이미 근거지가 있던 두 사람을 마다하고요."
"그거야. 유비에게는 명분이 있었으니까. 다른 두 사람은 그게 없었고."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죠. 하지만 전 좀 다르게 생각해요."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휴지로 손가락을 닦으며 말했다.
"힘 쎄고 잘난 놈 옆에서는 아무리 잘해 봐야 티가 안 난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자 옆에서는 그렇지 않다. 아무것도 없는 자는 자기 수중에, 그리고 자기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만큼 나의 능력을 귀하게 여겨 줄 테니까."
"그건···.···"
이어진이 뒷말을 삼켰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뭐 정확한 이유야 당사자인 제갈량이 아닌 이상 아무도 모르겠지만요."
"······."
"그러니까 아저씨. 기회가 왔을 때 잡으세요. 아저씨가 제 와룡이 되어 주시면..."
나는 이어진의 눈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저도 아저씨를 위해 유비가 되어드릴게요."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이어진 그가 이어진이 말없이 자신의 커피 잔을 내려다보았다.
커피가 반쯤 차 있는 커피 잔.
그리고 이미 다 식어 버려 향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커피.
제법 유치하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정말로 그를 와룡으로 만들어 줄 자신이 있었다.
‘평소라면 몰라도. 심적으로 궁지에 몰린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그렇게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던 그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허, 참 열 살짜리에게 설레 보긴 또 처음이네."
상당히 고조된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