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치유 (2)
따르르릉-
김귀란의 저택과 연결된 직통 전화가 울린 그때, 나는 직감했다.
사건이 터졌다.
드디어 그동안 준비했었던 사건이 터져 버렸다.
그리고 뒤이어 받은 전화, 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나는 저택에 상주하고 있는 송승우를 불러 몇 가지 일을 지시한 뒤, 빠르게 김귀란의 저택으로 향했다.
“승우씨. 제가 전에 지시한 것 있죠?”
“네. 이사님. 준비해 놓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얼마 뒤, 김귀란의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을 향해 뭔가 일갈하며 고개를 푹 숙이는 김귀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가 떨어진다. 언론에는 절대 알리지 마.”
무슨 이순신이야?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개가 모로 꺾인 김귀란의 모습을 본 그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비록 그동안 준비를 해 오긴 했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김귀란, 그녀가 쓰러지는 것을 보니 일순 몸이 떨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법.
나는 우왕좌왕 정신이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쳤다.
“다들 동작 그만!”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도련님?”
아무래도 갑작스런 나의 등장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도련님 큰일 났습니다. 회장님이.”
“알고 있어요. 이제부터 제가 통제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표정에 일순 의아함이 어렸다.
“네?”
하긴 내 나이 이제 15살, 이런 위급상황에 결정을 내릴 만한 경륜은 부족할 나이지.
하지만.
“못 들으셨어요. 이제부터 제가 통제한다고요. 제 지시에 따르지 않으실 분은 지금 밖으로 나가시면 돼요.”
나는 조금 강압적으로 나의 존재를 어필했다.
평소라면 약간 무리였을 말과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긴급 상황.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러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 그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몇몇은 살짝 불만의 기색을 보이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떨떠름하게나마 수락하는 모양새, 몇몇은 그 와중에 약간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어쩐 일인지 김귀란의 오른팔인 전진호 또한 없는 이 상황, 이 긴급한 상황을 책임질 존재가 반가운 거겠지.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면피를 하려는 그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저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기억해 둬야겠어.’
아무튼 그렇게 몇 마디 말로 사람들을 휘어잡은 나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일단 김귀란에게 다가가 호흡과 맥박을 파악했다.
그러자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그녀의 호흡과 맥박이 느껴졌다.
“119, 119는 연락했어요?”
그러자 잠시 놀라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남자 하나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연락했습니다.”
“얼마나 걸린 데요?”
“하, 한 10분에서 15분 정도는 걸린다고 합니다.”
15분이라.
지금이 2020년 내가 살던 시기였다면 그보다 더 빨리 구급차가 도착할 수 있을 테지만 지금은 1997년, 구급차의 댓수는 물론, 구급차의 환경, 그리고 병원과의 거리 또한 꽤나 멀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현재의 도로 사정이나 통신 사정으로 미뤄 보아 10분 혹은 15분이라고 하긴 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모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거기 두 명 이쪽으로 와요.”
나는 힘 꽤나 쓸 것 같이 생긴 장년의 남자 두 명을 지목. 김귀란의 방으로 가 이불 하나를 가져올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는 그들이 가져온 커다란 이불을 펴 간이 들것을 만든 뒤 그들에게 김귀란을 옮길 것을 지시했다.
“조심해서 옮기세요. 조심해서.”
“네, 넷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때.
“도련님. 회장님을 어디로 옮기시려는 겁니까?”
누군가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돌아보니 한성유통의 사장 지만규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김귀란의 사람, 그중에서도 측근에 속하는 사람이라 그동안 안면이 제법 있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현재 내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의 입장에서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겠지. 일반적인 경우라면 구급차가 올 때까지 대기를 하는 것이 다일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하나하나 설명할 수는 없는 일, 나는 그에게 간단하게 대답했다.
“저희 집에 치료 시설이 있어요.”
그러자 그 순간, 지만규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치료시설이요?”
“네.”
“아니 그게 무슨… 도련님. 그러지 마시고 그냥 구급차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어떻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아무래도 그는 일이 잘못될 경우가 걱정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걱정 마세요. 모든 책임은 제가 집니다.”
“아니 책임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칫 잘못하면 회장님이….”
나는 걱정이 가득한 지만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 사장님.”
“네 도련님.”
“그렇게 걱정되면 따라오세요. 따라와서 보시면 되겠네요.”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지만규.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며 강경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만약 아니다 싶으면 바로 병원으로 회장님을 모실 테니 그리 아십시오.”
그러나 잠시 뒤, 그는 자신의 말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현재 나의 집, 나의 저택의 모습이 제법 특이했거든.
“이건….”
“어때요 만족하셨어요?”
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100평 정도의 거대한 지하 공간, 그 안에 들어차 있는 최신식 의료 기기들과.
“Quickly move this way!(빨리 이쪽으로 옮겨!)
“What is the patient condition?(환자의 용태는 어때?)
“Still good. Maybe it's an acute myocardial infarction?(아직은 양호. 아무래도 급성심근경색 같은데?)
“Get ready for the procedure soon!(빨리 시술 준비해 줘!)
김귀란을 향해 달려오는 파란 눈의 외국인 의사들, 간호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뭐 어머니가 쓰러지셔?”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한성가의 차남이자 한성전자의 사장, 김명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어머니.
김귀란.
한성가의 창업자이자 총수.
이날 이때까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던 철인, 그런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네. 그렇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 그가 어머니의 근처에 박아 놓은 자의 말은 그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아니 어쩌다?”
[그게… 오늘 아침나절에 회의를 주관하시다가 갑자기…]
“그래? 확실한 거야?”
[네. 제가 똑똑히 보고 나왔습니다. 확실합니다.]
순간, 김명현의 표정이 일변했다.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는 믿을 수 없는 사건. 이 사건이 과연 사실이라는 생각이 든 순간, 약간의 상실감이 듦과 동시에 그의 가슴 속에 짙은 욕심이 가득 찼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드디어.’
사실 그동안 그에게는 불만이 많았다.
둘째라는 한계. 재벌가에서 태어났지만 장자가 아니라는 그 한계, 벗어나고 싶지만 벗을 수 없는 태생적 한계가 이날 이때껏 그를 괴롭히며 그를 힘겹게 만들어 왔다.
능력도 없는 인간.
장남 김명석.
언제나 자신의 앞에서 첫째라는 이유로 자신의 자리였어야 할 자리를 꿰차고 있는 모습이 세상 그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 설 능력도 없는 인간이 항상 나를 비웃었었지.’
물론 장남이 아닌 차남 그것이 주는 부와 권력 또한 상당했지만.
본디 인간이란 가일층 욕심을 가지는 존재.
그중에서도 어릴 적부터 욕심을 미덕이라 교육받아 온 그에게 형이라는 존재는 장애물, 자신의 것을 거짓 선점하고 있는 침략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동안은 장자라는 이유, 빌어먹을 인습 때문에 그 자리를 박탈할 수 없었다.
아니 그 자리를 선망하고 또 선망했지만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해 장남의 자리를 공격했다간 지배자의 손에 의해 그나마의 권력조차 박탈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그러나 이젠 다르다.
공고한 지배자.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 어머니가 쓰러진 이상 드디어 자신에게도 기회가 도래한 것이다.
‘사장들이야 잘 구워삶으면 되겠고 문제는 명준이랑 성아인데… 명준이야 뭐 별 위협도 안 되겠지만, 성아 그 계집애는 호텔을 잡고 있단 말이야.’
결국 머릿속으로 빠르게 견적을 내린 김명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어디야.”
재계서열 9위, 시가총액 15조 원의 거대 그룹. 한성의 왕좌를 거머쥐기 위한 레이스. 그것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의아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네?]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며. 입원하셨을 거 아니야. 거기가 어디냐고.”
다소 날카로운 김명현의 물음, 그 물음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 그가 빠르게 대답했다.
[아, 그, 그게 아무래도 평창동 저택에 계신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
[네. 아무래도 회장님이 쓰리지시기 전에 외부에 알리지 말라는 말씀을 하셔서… 그리고 사건이 있자마자 준영 도련님께서 외부 인사들을 밖으로 내치신 바람에…]
순간, 김명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수화기 너머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름, 지난 2년간 듣지 못했던 이름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그 꼬맹이가?”
[네. 아무래도 의료진들을 집으로 부른 게 아닐까 합니다.]
일순 김명현, 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김준영. 그 녀석이 왜 어머니의 집에? 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과거 어머니가 그 녀석을 못내 귀애했던 것이 생각났다.
‘아니 도대체 왜?’
물론 그렇다고 그 녀석, 기껏해야 올해 15살쯤 되었을 녀석을 자신의 라이벌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못내 마음에 걸렸다.
육감(六感). 다른 말로 촉. 이날 이때껏 키워 온 감각이 움직인 것이다.
“…그렇단 말이지?”
허나 욕심은 그의 감각을 막기에 충분했다.
잠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이내 고개를 흔들며 평창동으로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됐어. 뭐 가 보면 알겠지. 다들 움직여! 평창동으로 간다! 부회장보다 빨리 움직여야 하니까 인원은 최소한으로 하고.”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김준영이 왜 거기 있느냐가 아니라 어머니의 상태, 그리고 그의 형인 장남 김명석의 상태였으니까.
‘일단 움직인다. 생각은 그 다음이야.’
그러나 잠시 뒤.
평창동에 도착한 그는 전혀 예상 밖의 모습을 목도하게 되었다.
“도착했습니다. 사장님.”
“좋아. 부회장은?”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빠르게 평창동 김귀란의 저택에 도착한 그가 저택 안으로 들어갔을 때.
“어머니! 괜찮으십니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
“괜찮다마다. 그래. 회사는 어찌하고 여기 온 것이냐.”
서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김귀란의 모습.
그리고 그녀가 앉아 있는 휠체어를 밀고 있는 김준영의 모습과 그 앞에서 죄 지은 표정을 짓고 있는 장남 김명석, 막내 김성아의 모습이었다.
그 예상치 못한 모습에 일순 김명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 쓰러지셨다며?’
짧은 꿈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