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228화 새 집을 짓다 (2)
12월 말, 차가운 아침 공기에 머리털이 곤두서는 시기, 나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맡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 했죠 참을 수 있었죠 그 날을 위해….’
그 노래는 과거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노래, 힘들고 상처받은 이를 위로하는 노래로 유명했던 노래였다.
가만히 그 노래를 듣고 있다 보니 노랫말 한 구절 한 구절이 마치 과거의 내 모습을 비추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과거 김귀란의 저택에 거의 처음 올 때, 그때에도 나는 애써 그 긴장을 숨기며 노래에 나의 긴장, 나의 떨림을 감췄었다.
그때에 나는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며 나의 크기를 키워 보이기 위해 애썼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그 떨림을 감추느냐 감추지 못하느냐가, 나의 크기를 키워 보일 수 있느냐 없느냐가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때 실패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거대한 존재, 손끝으로도 나라는 존재를 날려버릴 수 있는 존재에게 나를 어필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는 하나의 티끌.
끊어질 듯 이어져 있는 간당간당한 인연에 기댄 채 거대한 존재의 숨 하나 눈빛 하나에 덜덜 떠는 숫자 하나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거대한 존재와 나란히 할 수 있는 존재, 오히려 그보다 더 큰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뭐 그 과정이 간단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하자 새삼 시간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동안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듯 짙게 인식한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거참 이제서야 제대로 인식되다니.’
때문에 그렇게 내가 과거의 기억을 반추하고 있던 그때.
“도착했습니다.”
귓속으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서히 속도를 늦추는 차의 떨림, 그것에 고개를 들자 내 눈앞으로 거대한 저택의 모습이 들어왔다.
내가 생각을 하고 있던 사이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았다.
“벌써 도착했나요?”
내가 묻자 운전기사가 나를 향해 조심스런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네. 아무래도 차가 없어서… 좀 더 기다릴까요?”
“아뇨. 뭐 굳이 그럴 것까지야. 들어가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를 태운 차가 천천히 저택을 향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 뒤, 제법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한 김귀란의 영지. 김귀판의 평창동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시선을 돌려 저택 전체를 조망하자 도저히 집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 다소 고압적으로 보이기까지 한 저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몇 년 전과 같은 저택의 모습, 하지만 그때와 달리 저택은 평범해 보였다.
물론 절대적인 크기는 그리 작지 않았지만 모든 감각은 주관적, 과거와 달리 김귀란의 저택은 거대할지언정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기지 않고 있었다.
그저 평범한 집, 그 느낌만이 들었다.
‘아마도 익숙해진 거겠지.’
그런데?
잠시 뒤 한 가지 특이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
나를 태운 차가 저택 안으로 스미듯 흘러 들어갔을 때쯤, 주차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용인들 중 익숙한 얼굴을 본 것이다.
‘저 사람은….’
그는 바로 과거 나를 맞이하러 왔던 남자, 처음 김귀란이 나를 데리러 왔을 때 나를 수행했었던 남자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한선규? 한진규? 아, 맞다 한규선이었지.’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제법 반가웠다.
생각해보니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에게 삼촌이니 어쩌니 했었던 것이 새삼 떠올랐다.
‘그땐 정말 뭐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지.’
나는 그 시절을 생각하며 나는 작게 웃어 보였다.
과거의 나를 발견하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벌써 5년이구나.’
이윽고 차가 멈춰 섰다.
그러자 익숙한 얼굴. 한규선이 조심스레 차 문을 열고 내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의 구부러진 허리, 평평한 등을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오랜만이네요.”
그러자 그 순간, 움찔, 한규선이 몸을 떨더니 이내 슬쩍 나를 올려다보았다.
“네, 네. 도련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의 떨리는 눈동자를 보니, 그의 당황을 읽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이 왜 말을 걸지?’ 생각이 느껴졌다.
뭐 그렇다면야.
나는 천천히 당황으로 물든 한규선의 얼굴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겨 나갔다.
그러자 곧 사람들이 우르르 나를 따르기 시작했다.
주차장 밖으로 나와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곧 한성가의 공기가 폐부에 가득 차고, 뒤이어 신전의 일부 같아 보이는 새하얀 대리석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는 어디 계시죠?”
내가 묻자 내 뒤에 따라붙은 한규선, 그가 숨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게… 본관 다이닝룸에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본관 다이닝룸이라.
그곳이라면 김귀란을 만나며 몇 번인가 갔었던 곳, 집안에 주요한 행사가 있을 때 모이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그곳에 있다고?
“오늘 스케줄이 뭐였죠?”
때문에 내가 묻자 한규선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회장님 말씀이십니까?”
“네.”
“회장님이라면… 오전 내내 임원분들과 회의를 진행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니 다이닝룸에서요?”
“네. 아무래도 제법 광범위하고 중요한 화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
“그 밖에는요?”
“그 밖에는 오후에 잠깐 부회장님 내외분과 만나셨을 뿐입니다.”
“…가족들은 자주 오나요? 그러니까 큰아버지들이나 고모 말이에요.”
“요즘에는 자주 찾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가끔씩 부회장님이나 둘째 사장님께서 자제분들을 데리고 오시기는 하시지만 워낙 회장님의 강경하셔서요.”
하긴, 그 양반 성격에 자식 손자라고 살갑게 대할 사람은 아니지.
더군다나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사람들을.
‘…뭐 그런 것에선 나도 비슷하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나갔다.
“…좋아요. 안내하세요.”
그러자 퍼뜩 정신을 차린 한규선이 빠르게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네. 이쪽입니다. 따라오시죠.”
그리고 잠시 뒤.
김귀란의 저택을 가로지른 나는 곧 본관 건물, 새하얀 대리석으로 마감된 성에 도착, 곧 오늘의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내 눈앞에 거대한 테이블, 그 테이블을 독차지하고 있는 여자.
김귀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왔느냐.”
그녀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
다이닝룸 들어선 나는 곧 김귀란과의 독대를 시작했다.
주변을 바라보자 방금 전까지 그녀가 보고 있던 서류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한규선이 오전 내내 회의가 있었다고 했더니 그 흔적인 것 같았다.
슬쩍 자리에 앉으며 서류들을 훑어보자 곧 그녀가 어떤 내용으로 회의를 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경기고등학교 총동문회 내에서 이인제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것을 자체적으로 엄금했다는 정보가 나오고 있음. 경기고등학교 내의 여론은 이회창 후보에 대한 지지로…]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사건의 경우 이인제 후보 캠프 쪽에서 먼저 정보가 나온 것으로 판명됨. 이에 따라 이회창 후보와 이인제 후보의 단일화 가능성은…]
[김대중 후보의 정치자금 문제는 일단 세 후보 간의 정치적 합의로 처리되었음. 이후 처리에 대해서는…]
‘대선 때문에 모였구만.’
하긴 생각해 보면 생각이 많을 만도 했다.
이제 곧 12월 18일 대통령 선거일이었다.
그러니 긴장이 될 만도 하지.
기업이란 권력자의 의사에 따라 정책에 따라 웃을 수도 또 울 수도 있는 존재이니까.
‘뭐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하긴 하지만.’
그런데 그때.
“그래. 무슨 일이냐? 요즘 제법 바쁘다고 들었는데.”
김귀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살짝 피로가 묻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손자가 할머니 찾는데 딱히 이유가 있나요?”
“그래서 이유가 없이 찾아온 적은 있고?”
“없죠.”
그러자 못 말리겠다는 듯 그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내가 말하고 나서도 조금 면구스럽긴 했다.
하지만 뭐 그렇다고 미안해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런 것으로 미안해하기엔 그녀도 나도 일반적인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대신.
“그런데 대선에 대해서 고민이 많으신가 봐요?”
이런 것을 물을 수는 있어도.
일순, 김귀란 그녀의 얼굴에 빠르게 하나의 감정, 기대라는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뭐 그렇다.”
“조언 하나 해드릴까요?”
“왜 또 팔아먹게?”
그녀가 피식 웃으며 내게 말했다.
아무래도 과거 내가 그녀에게 정보를 팔았던 것을 떠올린 것 같았다.
“아뇨. 이 정도는 서비스죠.”
“거짓말. 네 녀석이 공짜로 정보를 푸는 녀석이더냐?”
뭐 맞는 말이긴 한데….
하지만 내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 김귀란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됐다. 누가 이기든 이미 준비는 끝났어.”
“준비가 끝났다고요?”
“그래. 뭐 누가 이길지도 대충 짐작은 가니까.”
“도대체 누굴 생각하시는 거죠?”
내가 약간 의아한 어조로 묻자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합친 놈과 나뉜 놈 중에 누가 이기겠느냐. 당연히 합친 놈이 이기겠지. 그런데 네놈 꼴을 보니 너도 그렇게 생각했나 보구나.”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합친 놈과 나뉜 놈.
합친 놈은 김종필 박태준과 후보 단일화에 성공한 기호 2번 김대중 후보.
나뉜 놈은 기호 3번 이인제와 기호 1번 이회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거. 이 정보로 면이나 세울까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할 말 없게 만드시네요.”
때문에 내가 멋쩍게 웃으며 말하자 그녀가 피식 웃더니 천천히 자세를 바로 했다.
“흰소리는… 그래. 말해 봐라. 뭐 때문에 갑자기 연락을 한 거냐? 요즘 회사들을 인수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알고 계셨어요?”
“그렇게 돈을 푸는 데 소문이 안 나면 이상하지. 사방 천지에 소문이 났더구나 요즘 미친 듯이 돈을 쓰는 사람이 있다고. 그 녀석이 꼬맹이라고.”
그녀가 식은 차를 마시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간 내 이야기를 조금은 들었던 것 같다.
“뭐 그렇게 막 쓰지는 않았어요.”
“그렇다면 다들 해태눈깔이었나 보다.”
그렇게 잠시 고개를 끄덕끄덕하던 김귀란,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힘들진 않더냐?”
순간, 나는 살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순 그녀에게서 평범한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뭐 재미는 있었어요.”
“뭐 재미? 하하 이 녀석 돈귀신 다 되었구나. 좋다. 이제 말해 보거라. 그래 갑자기 보자고 한 이유가 무어냐? 설마 재미있다고 하던 놈이 우는 소리를 하려는 것은 아닐 테고.”
나는 조금 진지해진 김귀란의 표정, 그것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간단해요.”
이제 할 이야기는 조금은 불편할 이야기일 테니까.
“할머니. 아니 회장님.”
“……이 녀석이 징그럽게 무슨. 그래 왜 그러느냐. 뭔데 이렇게 뜸을 들여.”
“웃으면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서요.”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김귀란의 얼굴이 굳었다.
“…뭐냐?”
그 모습은 나를 처음 보았을 때의 김귀란 그 모습에 닿아있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자세를 바로했다.
“회장님. 맡겨뒀던 것을 받으러 왔습니다.”
“맡겨뒀던 거?”
“네.”
말을 마친 나는 천천히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딱- 조금은 세게 테이블을 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회장님께 맡겨뒀던 물건들.”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물건들?”
“네. 그러니까 한성 유통, 전자, 패션, 금융 계열사 일체.”
나는 조금은 날카로워진 그녀의 눈빛을 직시하며 말을 맺었다.
“이제 저에게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순간, 김귀란의 얼굴 근육이 불편하게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