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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99와 1의 문제

거대한 나방 같은 마왕이 추락하는 모습을 백정민은 먼 곳에서 지켜보았다.

데리고 다니는 요정만큼이나 버러지 같은 마왕이었다.

나르키스가 꿈틀거리며 헤집어놓은 거리는 앞으로 삼백년 동안은 인간이 접근조차 못할 것이다.

그런 땅을 만들어놓고도 정작 본인은 사망해 던전으로 귀속시키지도 못한다니 안타깝게 됐군.

그러게 후발주자가 부르그골처럼 본체를 키우는 데 주력해도 소용이 없다고 말했건만.

마왕의 힘은 그런 식으로 쓰는 게 아니다.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백정민은 자그마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어깨엔 다나우가 앉아있었다.

“버러지 생각.”

“아까 훔친 걸로도 부족해서?”

다나우가 비꼬았다.

아까 채승지와 백정민이 마주쳤을 때, 백정민이 보인 동작은 인사가 아니었다.

채승지의 존재가 가까이 있을 때, 그의 인벤토리를 열고 다나우를 빼내오는 동작이었다.

마치 인사처럼 보이던 손을 내린 백정민은 다나우의 머리에 걸려있던 성좌 인벤토리도 풀었다.

그 인벤토리의 주인은 계약자의 싸움에 정신이 팔리느라 사소한 개념의 움직임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역시 광대에게 기대할 순 없나.

잔뜩 화가 나있던 다나우도 나르키스가 인간들에게 공격당하는 걸 보고 약간 기분을 풀었다.

백정민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딱히 네 친구를 버러지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야.”

“그럴 만한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잖아.”

백정민은 부정하지 않고 낮게 웃었다.

“망할 마왕 새끼들.”

“이봐, 같은 편을 그렇게 욕해서야 되겠어.”

다나우는 한숨을 삼켰다.

어째서 자신의 계획은 계속 반대역에게 방해받는지 모르겠다. 그만 보면 마음이 불쑥 앞서버리니.

백정민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환각 안개를 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니까 진작에 광대는 버리라고 했잖아. 그건 끝까지 이해하지 못할 걸.”

“난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렇겠지.”

백정민은 앞이 아니라 뒤쪽에 동의했다. 다나우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도.

백정민은 한낱 인간에게 날개를 뜯겼던 나르키스가 볼썽사납게 다시 날아오르는 장면을 여유롭게 구경했다.

입을 꽉 다물고 있던 다나우가 다시 말했다.

“대역이는 살려줘. 대가도 잔뜩 받아 처먹었으면.”

“그것들 진짜 마왕도 아니었잖아? 되다만 마왕들을 주워 먹어서 오히려 탈이 날 지경이라고.”

다나우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자신이 채승지에게 알려준 대로 알러트 간부들을 찾아가기나 할 것이지. 고작 범윤오 같은 마왕이 하나 더 생겨봤자 뭐 얼마나 위험하다고.

다나우는 채승지와 백정민을 마주치게 하고 싶었다.

백정민도 다나우에게서 위치를 전달받아 막 마왕으로 깨어나려는 알러트 간부들을 먹어치우고 다녔으니까.

자신은 마왕들과 한 계약 때문에 직접적인 진실은 말하지 못한다.

그러니 우연히라도 둘이 마주쳐서 알았어야 했는데, 저 멍청한 계약자 놈이 자기 위치를 광고할 줄이야!

다나우가 스스로를 미끼로 써가면서까지 이끌어낸 기회는 채승지가 범윤오를 사냥하러 가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알러트? 경계하라고?

본인도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멍청한 놈!

다나우는 다시 한 번 범윤오와 계약한 것을 후회했다. 이용하긴 쉬웠지만, 그만큼 사고도 너무 많이 쳤다.

마지막 사고가 제일 뼈아팠다.

다나우는 유유자적하게 필터 끝까지 담배를 빨아들이는 백정민을 노려보았다.

그가 제일 싫어.

담배꽁초를 떨어트린 백정민이 발로 비벼 껐다.

“어쨌든 마왕이 되고 나서도 우리와 계약을 유지하려면 성좌의 형태로 숨어있어야 할 텐데 왜 네 계약자까지 마왕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군.”

“범윤오가 너무 징징거렸어. 그래서 마왕으로 만들어 치워버리려고 한 거야.”

“그렇다면 네가 숨어있으려는 각성자를 따로 찾았나보군?”

백정민이 의미심장하게 떠보았지만 다나우는 눈썹을 까딱이는 걸로 답했다.

자신이 이미 점찍어둔 인간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지.

백정민은 깊게 캐묻지 않았다.

“뭐, 좋아. 글라세로도 이미 성좌인 척 틀어박혀서 잘 지내고 있으니 내가 확인할 건 다 보았어.”

“꺼질 거야? 돌아가면 아흔아홉 명의 마왕 중에서 내가 들어갈 자리나 비워놔. 난 골라서 갈 거니까.”

백정민이 피식 웃었다.

“지금 하나 더 생겼군.”

그가 손을 까딱였다. 다나우는 날아가던 나르키스가 갑자기 무엇에 맞은 듯 경련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성좌신의 힘이 천천히 마왕을 감싸 으깨는 것을 보았다. 인간에게 임하여, 발동되는 스킬의 형태로.

“죽었네.”

“그래.”

“한 자리가 더 생기다니 좋지.”

구경하던 백정민이 갑자기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니, 둘이군.”

“뭐?”

백정민의 미소가 진해졌다.

“한 번에 두 자리야.”

* * *

류의건은 대한민국 상공에 나르키스가 출현했을 때부터 쏟아지는 연락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번태가 나는 나만의 길을 간다, 라는 성격을 내세워 대충 연락을 피하는 대신.

류의건은 협조적인 랭커의 모범을 위해 각종 정부와 언론의 연락을 끊지 못했던 것이다.

덕분에 그는 해외에서 온 랭커들의 입국문제까지 바락바락 듣고 있어야 했다.

“엄연한 대한민국 상공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반드시 그들을 지상으로 떨어트려 끌고 와야 하네!”

“반드시 외교문제로 끌고 가야 해. 자네도 이 문제를 확실히 할수록 수입이 확실해지지 않나.”

“…….”

류의건은 피로한 눈으로 연락을 끊었다.

이 문제를 공격할수록 류의건의 회사에서 납품하는 각성자 제제장치가 불티나게 팔려나가겠지.

하지만 마왕이 침입했는데도 이런 은근한 정경합작을 노리는 연락들이 지겨웠다.

류의건은 해외 랭커들이 단순히 마왕을 처리하는 걸 돕기 위해서 왔다는 식으로 선전할 방법을 찾으며 날아왔다.

그런데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나르키스가 사냥당한 뒤였다.

짙게 퍼져나간 무지갯빛 환각제들이 조금씩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걸 본 그는 크게 낙심했다.

나르키스의 환각제는 신성스킬로도 치울 수가 없다.

당장 가벽을 세우고 시가지와 분리해야 하지만, 류의건은 우선 마스크부터 둘러쓰고 인명수색에 나섰다.

조금씩 녹아내리는 빌딩과 자욱한 환각제들이 살아있는 마물처럼 흘러다녔다.

가장 격렬한 싸움의 흔적을 본 류의건은 곧 웅성거리는 소음을 발견했다.

“거기 괜찮습니까?”

가까이 다가간 류의건은 그들이 외국인이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약간 당황했다.

그러다 곧 나르키스가 나타난 곳에서부터 따라온 랭커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해외 랭커 분들이십니까?”

그들 중에서 몇몇이 류의건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류의건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각성자니까.

해외 랭커들이 조심스럽게 그들이 부상을 치료하고 있던 사람을 내보였다.

류의건이 눈을 크게 떴다.

“유월 씨?”

유월은 부러진 칼을 잡은 채 기절한 상태였다. 류의건이 얼른 무릎을 꿇고 앉아 신성스킬을 흘려 넣자 파르르 눈이 떨리며 열렸다.

“정신이 드십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유월은 나르키스에게 찔러 넣었던 대검이 부러진 자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가 죽었나요?”

“마왕이라면 사라졌습니다. 여기 오는 길에 어떤 미션도 뜨지 않았어요.”

“…….”

유월은 긴 머리카락에 반짝거리는 나르키스의 환각제를 잔뜩 머금은 채 주먹을 그러쥐었다.

“아뇨. 범윤오요.”

“예?”

어리둥절한 류의건에게 해외 랭커들이 아까보다 몹시 꺼림칙한 기색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있는 범윤오의 반쪽 몸뚱아리가 보였다.

나르키스에게 당한 부분보다 뿔이 달리고 몸 자체가 우둘투둘하게 변화한 것이 더욱 흉물스러웠다.

저도 모르게 역함을 느낀 류의건이 흠칫하며 물러났다.

“저게 설마 범윤오입니까?”

유월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이 한 점 흔들림 없이 범윤오의 시체를 확인했다.

“네. 맞네요.”

이로써 동생의 성좌를 돌려받을 희망은 작살났다.

입술을 꾹 깨문 유월이 호흡을 가라앉혔다. 그가 미련 없이 부러진 검을 버리고는 바닥을 짚어 일어났다.

“이 애긴 나중에 하죠. 승지 씨랑 번태 씨는 먼저 대피했나요?”

“…네? 그분들도 여기에 있었습니까?”

오히려 되묻는 대답이 돌아오자 유월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유월과 류의건이 거의 동시에 번태와 승지에게 연락을 넣었다. 그러나 그들이 답장을 받는 일은 없었다.

앞으로도 계속.

* * *

승지는 가족을 원하지 않았다.

이는 다시 말해 깊은 관계를 쌓는 걸 기피한다는 뜻이었다.

무관심은 가풍이나 다름없었고, 승지는 그 자리를 자유로 대체했다. 만족스러운 생활방식이었다.

그러나 승지가 광대인 반대역을 만났을 때를 생각해보면. 유월을 만났을 때를 생각해보면. 완전히 무감각한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전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었으므로, 살아있는 사람이 감당해야 할 의무는 잘 지켰다.

성좌신마저 행운을 할당하지 않는 무수한 인간들에게 왜 그러한 것이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마왕들이 뿌려놓은 씨앗은 대개 그럴 때 피어나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

승지는 점점 가속되는 프레임 속에서 상대방이 소멸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비명을 지르는 채로 굳어버린 나르키스의 경련이 입으로 이어진 범윤오와 번태에게로 전달되었다.

소멸은 너무도 뚜렷한 징후였다.

광대는 승지의 공격이 성공했다며 기뻐할 수 없었다.

완벽한 콤보 때문에 천천히 뜯겨나가는 대상은 나르키스만이 아니라 한 명이 더 있었다.

번태였다.

“승지야…!”

“제기랄, 뭐야!”

하얗게 질린 광대의 목소리와 함께 승지는 당혹스러워했다.

분명히 마왕만 제거할 생각이었는데?

지금까지 완벽한 콤보가 승지의 생각과 다르게 발동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고작해야 나뭇가지 하나를 부술 때도, 마왕을 잡을 때도.

언제나 완벽하게 생각한 바를 달성하지 않았나.

그럼 지금 이건 뭔데?

충격을 받은 승지의 머릿속에서 아주 담담하게, 누군가가 지적했다.

생각할 게 있냐? 이건, 번태도 마왕이라는 소리지.

눈을 부릅뜬 채로 승지는 뚫어져라 번태를 노려보았다.

지금 자신이 가증스럽게 모든 사람을 속여 온 마왕을 죽이는 것인가?

아니면 대한민국의 랭커 1위를 죽이는 것인가?

가공할 만한 혼란 속에서 번태의 입이 움직였다. 1프레임씩 뚝뚝 끊기는 장면으로.

“맡, 아, 주, 게.”

이해할 수 없는 혼돈에 잠겨있던 승지에게 광대가 한 글자씩 따라 읽어주었다. 반쯤 무의식적으로.

콰앙!

완벽한 콤보가 요란한 폭음을 내며 목적을 달성했다.

폭발한 나르키스의 몸과 번태가 다시는 되살아날 수 없을 지경으로 흩어졌다.

그 스킬 속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부위를 가진 건 마왕조차 되지 못한 범윤오의 시체 밖에 없었다.

번태가 죽자 승지를 태우고 있던 뇌룡도 함께 사라졌다.

승지는 다시 환각의 안개 속으로 추락했다.

이게 뭐야? 방금 그건, 내가 본 건.

승지는 답을 찾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그러자 추락하는 자를 위해, 각성자를 위해, 깨어난 자를 위해 알림음이 울렸다.

띠링!

[ 축하합니다! 당신은 울고 있는 성자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세계가 사라질 때까지 그와의 연결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

-광대라면 99콤보까지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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