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던전에서 던전으로 (4)
콰아아앙!
압축된 힘은 거대한 압력이 되어 옆으로 날아갔다. 그 일대에 있는 모라타들이 한꺼번에 휩쓸렸다.
“!”
“피하십시오!”
같이 모라타를 잡고 있던 유청과 류의건마저 말려들 만큼 엄청난 기세에 두 사람이 급하게 몸을 빼냈다.
아직 땅 위에 있던 모라타들이 입을 벌리며 쫓아왔지만, 그 느린 속도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함께 날아가고 말았다.
“맙소사…….”
피가 나도록 칼을 움켜쥐고 있던 이연주가 멍하게 손을 늘어트렸다.
마치 해일이 일어나듯 바람에 딸려간 모라타들이 파도처럼 쓸려갔던 것이다.
“그어…!”
“끄륵!”
등껍질끼리 부딪치는지 이상하게 딱딱 거리는 소리가 나는 폭풍은 이 주변을 한 바퀴 다 헤집을 때까지 멈추질 않았다.
나무들이 들썩이고 대지 위로 숨어있던 모라타들이 모두 튀어나왔다.
[(*˃o˂*) 와아앙! 굉장해! 다 날아간다!]
“…와!”
스킬을 쓴 장본인인 승지마저도 감탄하고 구경만 했다.
지난번에 배를 박살냈을 때도 장관이었는데. 끝내준다.
노랗게 올라온 모라타들은 그대로 한참 멀리 떨어진 벽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쿠우웅!
한 덩어리가 된 모라타가 부딪치자 던전이 다 떨릴 만큼의 진동이 울려 퍼졌다.
멀리서 후두둑 떨어지는 모라타들을 대충 세어 봐도 유청이 잡은 것의 세 배는 훨씬 넘었다.
이건 따지고 말고 할 필요도 없겠다.
“내가 이겼네.”
승지가 의기양양하게 씩 웃었다. 그러나 돌아본 인간들의 표정에 승지의 웃음기가 바로 사라졌다.
“……승지 씨.”
류의건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 근육을 간신히 움직였다.
아직 그의 검에 묻은 모라타의 피가 식지도 않았는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주먹을 새까맣게 물들인 유청도 살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라, 뭐지? 이 좆 된 기운은?
천하의 역적 바라보듯이 쳐다보는 두 랭커를 보니 아무리 승지의 간이 배 밖에 있더라도 살짝 쫄렸다.
“왜 그렇게 쳐다보냐…?”
지금은 칭찬할 타이밍 아니냐고.
쿠구궁.
그때 안전하다고 확신한 이연주가 다른 각성자들을 보호하고 있던 스킬을 해제했다.
당연히 아무것도 모르는 사라설은 웅크려 있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헉, 준호 씨!”
“으으….”
“일단 준호 씨 다리부터 치료하죠.”
이연주가 급히 준호에게 다가갔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한 상처였는데도 용케 기절을 안 했다.
“끄으윽…!”
“곧 약효 돌 거예요.”
“세상에… 준호 씨는 괜찮은가요?”
“괜찮… 습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하세요. 금방 낫긴 할 테지만.”
이연주는 신속 정확하게 다리에 포션을 부었다.
그동안 승지는 여전히 자신에게 달려있는 랭커들의 시선에 되레 성질을 냈다.
“또 뭐, 왜!”
“승지 씨. 정말 2차 각성자 맞습니까?”
“아, 이거 서운하네! 뭐 2차 각성자는 강하면 안 되냐?”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짓을 하고 그딴 소리를 하시죠.”
“이세계는 그럼 시발 논리가 있냐!”
“…그건… 제법 설득력이…….”
류의건의 말에 유청이 순간 빡쳤는지 목소리가 커졌다.
“류의건 씨. 세상엔 당신 성좌처럼 착한 인간들만 있는 게 아닙니다. 대체 언제까지 저런 인간들 말을 다 들어줄 겁니까?”
“……내 성좌가 이 이야기에서 대체 왜 나오는 건지 모르겠군요.”
류의건도 살짝 열 받았는지 목소리를 깔았다.
그래, 차라리 니들끼리 싸워라.
둘을 내버려 두고 승지는 성좌나 불렀다.
“야야, 성좌야. 어쨌든 내기는 내가 이긴 거나 마찬가지다. 보상 내놔.”
[응, 알았어!]
띠링!
[ 서브 미션 완료! ]
딱 거기까지만 보고 지축이 흔들렸다.
쿠구구구…!
“어?”
“뭐야!”
“이연주 또 스킬 썼어?”
“저 아니에요!”
그럼 이 진동이 어디서 왔어?
이연주가 책을 소환할 때 들리는 소리를 몇 배로 불려놓은 듯한 소음이 바닥을 쪼개놓았다.
…소리만 그런 게 아니라 진짜로.
쩌억!
“와아악!”
“던전 변형이…!”
“떨어진다!”
식물과 얽혀있던 돌바닥이 그들을 중심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후우우웅!
“다들 절 붙잡으세요!”
류의건이 무슨 빛을 내보냈지만 그게 뭔지 볼 정신이 없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승지 발밑에 있던 바닥부터 아래로 꺼져버렸던 것이다.
야이 씨, 빌어먹을 운 스탯 1!
“승지 씨!”
승지가 쑤욱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파스스스. 공기가 빠르게 솟구치며 잎사귀와 비벼졌다.
“젠장할!”
[조심해! 부딪치면 최소 중상이야!]
“나도 알아!”
승지가 허우적거리며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돌바닥과 낙엽들을 피했다.
아까 미션 완료 창 어디 갔어.
미션에 성공했으면 허공답보 스킬이 들어와 있을 거다.
허공답보면 공중을 밟는 거잖아!
머리부터 떨어지던 승지가 바위에 걸린 넝쿨을 잡아챘다.
빙글.
마찰력에 손바닥을 갈아가며 반 바퀴를 돈 승지가 허공에 발을 디뎠다.
[승지야! 어때?]
“어때고 자시고…!”
승지가 허공에 발을 내리자 분명히 아래쪽에 밟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딱 한 번뿐이었다.
안심하고 걸으려던 승지가 휘청거린 다음에야 이 스킬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격투 게임에선 점프가 두 번까지만 됐다.
즉 이름만 허공답보지 뛰어오른 다음 허공을 한 번만 밟을 수 있는 것이다.
“이단 점프 미친아!!!”
[꺄아아악 승지야!!!]
지면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격투게임 말고 아예 하늘을 날아다니는 무협 소설 같은 걸 읽을 걸 그랬다!
“젠장!! 개 쓸모없잖아!”
승지가 밟히면 바로 사라지는 허공답보 스킬에 울화통을 터트렸다.
“꺄아아아아!”
그때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자신보다 조금 위쪽에서 사라설이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놈들은 뭐하고 있는 거야?
급박한 와중에도 류의건이 정준호를 어깨에 멘 채 바위를 밟아가며 내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이연주도 허공에 책을 펼치며 사라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지만, 속도가 너무 느렸다.
승지는 그나마 허공 답보와 스탯 빨로 떨어지는 속도를 늦추고 있었는데, 사라설은 아무것도 없이 빠르게 떨어졌다.
[어떡해! 저러다 추락하겠어!]
젠장, 안전을 확보하면서 가니까 느리지!
이를 바득바득 간 승지가 그대로 뛰어들었다. 그에게 내놓을 건 목숨과 깡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떨어지는 속도를 느리게 해도 모자랄 판에 내 손으로 프레임을 빠르게 하다니.
사라설에게 뛰어들며 승지가 소리쳤다.
“아파도 참아!”
“네, 네?”
퍼억!
승지가 그대로 사라설에게 몸통 박치기를 선사했다.
“허억!”
“크억!”
부딪친 충격이 눈알 빠지게 튀어나왔지만, 덕분에 옆쪽으로 한 뼘 밀려났다.
여기서 조금만 더!
사라설을 껴안은 승지가 그대로 다리를 확 벌려 허공답보를 썼다.
허공을 한 번 찍고 건너가자 아슬아슬한 거리에 있던 나무 꼭대기가 간신히 발끝에 걸쳤다.
[떨어진다아아!]
뚜두두둑!
몸에 닿는 나뭇가지를 죄다 부러트리며 내려가던 두 사람이 커다란 나뭇가지에 드디어 걸렸다.
“끄응!”
사라설을 보호하려고 애써보던 승지가 제대로 등을 부딪치고 신음했다.
조온나 아파.
떨어지는 동안 바들바들 떨고 있던 사라설이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스, 승지 씨…. 괜찮아요?”
“당연히… 안 괜찮지, 시발.”
간당간당하게 나무에 걸친 다리 위에 사라설까지 있어서 솔직히 버거웠다.
이러다 힘 풀리면 낙사다.
“힘….”
“네?”
[뭐?]
“힘 좀 줘봐…!”
사라설이 영문도 모르고 나무를 꼭 끌어안고 버텼다.
아니, 너 말고.
승지가 간신히 허리에 힘을 주자 뒤늦게 알아차린 성좌가 스탯을 올렸다.
[아아 힘!!! 알았어!]
고지식하게 미션 보상으로 받았던 스탯 분배치를 몽땅 힘에 투자했는지 단숨에 사라설이 가벼워졌다.
흐억, 이제 좀 살겠다.
사람 하나는 배에 올려놔도 까딱없는 건 물론, 한 팔로 들어 올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사라설만 영문을 몰랐다.
“스, 승지 씨?”
“아. 후우. 이제 괜찮아.”
사라설을 안은 채 편하게 나무에 걸쳐있던 승지의 머리 위로 파사삭 하고 나뭇잎 밟는 소리가 들렸다.
“밑에 괜찮습니까?”
“유청 씨!”
한 발 늦게 유청이 나무의 꼭대기를 밟고 도착했다.
저놈 저거 어떻게 저기 서 있지. 나뭇가지 안 부러지나?
사라설은 그제야 살아난 기쁨에 감격했다.
“저흰 괜찮아요! 승지 씨가 구해주셨어요!”
“…….”
유청은 썩 기뻐 보이진 않았다.
짜식이, 대단하면 대단하다고 인정 할 것이지.
“다들 무사하십니까!”
곧이어 류의건과 이연주도 도착해 나무에 걸려있던 승지와 사라설을 내려주었다.
위험한 상황이었는데도 사라설은 너무도 멀쩡하게 폴짝 뛰어내렸다.
“승지 씨 덕분에 살았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 그래.”
따라 내려온 승지가 어색하게 뒷목을 긁었다. 사라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 생명의 은인이세요!”
“고마우면 밥 사.”
“네. 비싼 걸로 사드릴게요!”
사라설이 해실 웃었다.
약간 귀엽네.
승지가 훈훈함에 잠겨있는 동안 유청이 제비처럼 가볍게 아래로 착지했다.
“…….”
왜 또 쳐다봐.
“할 말 있냐?”
“……조금은 다시 봤습니다.”
“허.”
그렇게 가오를 잡더니 한다는 소리가. 사라설을 구할 줄 몰랐다는 태도가 줄줄 샜다.
내가 진짜 악당인 줄 아냐.
“오냐 고맙다?”
승지가 웃으며 중지를 치켜들었다. 바로 표정이 구겨진 유청은 누가 봐도 괜히 말했다는 표정으로 후회했다.
류의건이 숨 가쁘게 다가왔다.
“두 분 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제가 바로 쫓아가려고 했는데 실패하다니….”
“됐다. 넌 다리 다친 애 구했잖아.”
류의건이 또 자책을 할까 봐 승지가 얼른 말했다. 정말이지 귀찮은 성격이 아닐 수 없다.
이연주도 보기 뭣했는지 류의건을 위로했다.
“유청 씨도 바로 여러분 위쪽이었잖아요. 정말 사고가 나진 않았을 거예요.”
“네.”
“그런데 아래쪽에 똑같은 던전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사라설의 말대로 떨어지기 전에 있던 곳과 비슷한 광경이 아래쪽에도 펼쳐져 있었다. 훨씬 더 크고 숲이 우거지긴 했지만.
위에서 떨어질 때 본 던전은 원형으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바닥이 무너졌는데도 밑층에 똑같이 생긴 장소가 존재하다니. 마치 방문자가 이곳으로 떨어질 줄 예상한 것 같았다.
“일종의 탑 같은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유청이 돌바닥에 손을 짚었다.
“여기도 바닥이 얇습니다. 아마 강한 충격을 주면 부서지겠죠.”
“네에?”
대번에 다른 사람들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또 바닥이 깨질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얼음장처럼 얇은 건 아니니 긴장하지 마십시오.”
“내, 내려갈 때마다 몬스터가 나오는 걸까요?”
“당연히 그러겠죠.”
어쩐지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강해질 거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승지만 느낀 예감이 아니었는지 유청이 말했다.
“이 던전은 미리 포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현실로 돌아가자는 거야?”
“하루만 기다렸다가 다음 던전으로 넘어가자는 뜻입니다. 1층에서도 사고가 날 뻔 했습니다. 2층에선 당연히 1층보다 더 약한 적이 나올 리도 없고요.”
유청이 흘긋 곁눈질했다.
“류의건 씨가 생각보다 전력을 내지 못하는 점도 문제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유명한 랭킹 2위 치고는 영 힘을 못 쓰긴 했다. 기억을 더듬어본 승지가 갸웃했다.
“저번에 보니까 보스 몹도 혼자 잡던데, 차라리 류의건만 혼자 싸우는 게 어때?”
“승지 씨!”
“맞는 말입니다.”
류의건이 힘없이 웃었다.
“주변에 지킬 사람이 있으면 훨씬 강해진다고 하는데 저는 오히려 약해지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건 그랬다.
눈앞에 보스 몹 같은 커다란 문제가 있으면 그것부터 해결해야 하는데 류의건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죽으면 안 될 것처럼 자잘한 사고에 신경 쓰다가 오히려 시간을 질질 끌어버렸다.
아까도 일행이 너무 가까이 붙어있는 탓에 검을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했다. 기껏해야 콕콕 찍기나 했지.
물론 사람을 구하는 인간은 필요하다. 하지만 힘이 있다면 보다 제대로 쓸 곳이 있잖아.
승지가 정색했다.
“아니, 진짜로. 싸워보라고.”
“예?”
“이쪽은 유청이랑 내가 지킬 테니까, 걱정 할 거 없잖아. 방금도 봤지? 내가 사라설 구한 거.”
“하지만…!”
“자리 깔아주면 할 수 있겠어?”
승지가 진지하게 권했다. 그저 당혹스러워하던 류의건의 표정도 차츰 그를 따라 물들어갔다.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