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보스를 부탁해 (5)
알이 깨어날 때까지 승지는 매일 스킬을 쓰며 수련했다.
스킬을 파악할수록 강해졌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정작 써먹을 곳이 없으니 몸이 근질거렸다.
지금이라면 웬만한 각성자들은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수련할 수록 유청도 상대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까지 커져갔다.
젠장, 빨리 현실로 돌아가고 싶다.
승지가 손꼽아가며 수련하던 어느 날, 드디어 알에 금이 갔다.
[빨리 와 승지야! 알이 깨지기 직전이야!]
“어디 봐.”
승지가 몸을 기울여 알을 들여다보았다. 잠잠하던 수면이 흔들렸다.
[깨진다, 깨진다!]
쩌적.
승지의 표정도 간만에 밝아졌다. 이제야 깨어나는 구나!
빠직, 빠직.
알껍데기가 밀리며 드러난 얇은 막이 살짝 찢어지더니, 드디어 기다리던 용의 새끼가 모습을 드러냈다.
[꺄악! (◍˃̶ᗜ˂̶◍) 귀여워!!!]
쫑긋거리는 속눈썹 안으로 동그랗고 큰 눈이 보였다. 조그마한 푸른 몸통엔 은백색 비늘이 등을 따라 무늬 지어 있었다.
특히 콧잔등이 세모꼴에 촉촉해서 콕 누르면 금세라도 킁킁거릴 것 같았다.
용이면서 무슨 길쭉한 햄스터같이 생겼냐?
…제법 귀엽네.
새끼용은 크고 맑은 눈을 깜박이더니 순식간에 알을 잡고 있던 승지의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윽, 차가!”
생각보다 훨씬 낮은 체온에 당황한 승지가 꿈틀거리는데도 새끼용은 뽀르르 몸을 타고 올라갔다. 그러더니 꼬리로는 살짝 목을 휘감고는 귓바퀴에 머리를 걸치고 울었다.
“히루룽.”
[허엉!! 울음소리도 완전 귀여워!]
성좌는 너무 좋아서 아예 공중제비를 돌았다.
승지가 살짝 손가락으로 새끼용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새끼용은 칭얼거리듯 꼬물거리더니 반대쪽 귀로 넘어갔다.
“크하학! 야, 간지러!”
간지럼 타는 걸 싫어하는 승지가 반사적으로 웃다가 벌컥 화를 냈다.
그러자 시무룩해진 새끼용이 꼬리로 승지의 뺨을 탁탁 쳤다.
[아하! 아하하! 너어무 귀여워! 승지도 너무 귀엽다!]
“대체 어디가?”
승지는 어쩔 수 없이 이어커프처럼 빼꼼 매달린 새끼용을 내버려 두었다.
“이제 얘가 깨어났으니 우리 미션도 끝난 거지?”
[아니지! 이제 막 태어난 용에게 이름을 지어줘야 하잖아!]
“무슨 이름까지 지어줘. 그러다 정들면….”
[아! 로이에르의 알이었으니까 얘는 로잉으로 하자! 로잉 어때?]
“로잉이 뭐냐? 멋없어 보이게.”
[뭐 어때! 지금 너무 귀엽잖아! 게다가 잘 어울리는걸! 로잉아! 로잉로잉!]
“네가 말한다고 들리냐. 게다가 얘도 크면 여기 던전 주인처럼 될 거 아냐.”
그렇게 엄숙하고 위엄에 넘치던 용을 방정맞게 로잉로잉 하고 부르는 생각을 하니 분위기가 너무 깨졌다.
[왜 난 로잉이라는 이름이 좋아! 승지가 한 번 직접 불러봐! 반응할걸?]
“설마. …로잉?”
깜박. 새끼용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 승지가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아니, 취소. 로잉 아니야. 로잉 취소.”
“로잉.”
[헉! 따라했어!]
“아냐! 얘 왜 이렇게 영리해!”
[빨리빨리! 승지 이름도 알려줘!]
“싫어! 다른 이름 뭐 없냐!”
“로이잉.”
다급하게 고민하는 승지를 보고 좋아하는 줄 알았는지 새끼용이 기분 좋게 울며 머리를 문댔다.
[신기하다! 어떻게 자기 이름만 그렇게 쏙 골라서 듣지? 역시 우리 애야!]
“이게 왜 우리 애야. 남의 애를 갈취하지 마라.”
[하지만 처음부터 우리한테 맡겨진 애잖아!]
“그러다 누구 호적을 파려고?”
“로잉.”
[엄마아빠 싸우지 말래!]
“날조 그만! 얘 진짜 부모는 언제 와?”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용도 제 말하니 찾아왔다.
공기의 흐름이 바뀐다 싶더니 현 던전의 주인이 풀잎을 흩날리며 나타났던 것이다.
용은 승지의 머리에 감긴 새끼용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후계자가 깨어난 걸 보고 뭔가 기뻐하거나 안도할 줄 알았는데 여전히 별다른 감정변화가 없었다.
띠링!
[ 메인 미션 완료! ]
승지가 얼른 새끼용을 건네주려고 용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용은 새끼용을 건네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아한 용의 주둥이가 승지를 향해 움직였다.
후우욱!
[ 용의 숨결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
[ 쉽게 지치지 않습니다. 시야가 넓어집니다. 바람을 타고 더 멀리 도약할 수 있습니다. 다른 용족이 당신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
따듯한 바람이 승지의 몸을 가볍게 감쌌다가 사라졌다.
[보상이 버프였구나! 잘 됐다! 이런 가호들은 스탯 보상보다 훨씬 받기 어려운 거야!]
오호라.
승지가 미션 보상을 받는 동안 로잉은 처음 보는 다른 용의 모습을 열심히 관찰했다.
승지는 일단 정신 사납게 꼬물거리던 애가 얌전하니 덜 간지러워서 좋았다.
용이 두 번째로 버프를 걸었다.
[ 숲의 가호가 당신에게 깃듭니다! ]
[ 로이에르의 숲이 당신을 보호합니다. 식물에서 추출한 독 면역. 일정 면적 이상의 숲에서 은신 가능.
마력을 많이 받은 식물일수록 당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입니다! ]
[ 숲의 가호는 이 던전이 존재하는 동안만 지속됩니다. ]
[세상에! 이번 버프도 엄청 좋은 보상이잖아!]
아직 세 번째 보상이 남았는데 용이 뒤로 물러났다.
“어 아직 안 끝났는데?”
승지가 용을 불렀다. 지금까지 듣는 대로 반응했던 용은 갑자기 승지의 말이 안 들리는 것처럼 잠자코 서 있었다.
대신 로잉이 움직였다.
“아야!”
[헉! 로잉아! 갑자기 왜 그래?]
“이게 날 깨물었어!”
방금 전까지 얌전하던 새끼용이 갑자기 민첩하게 움직였다.
깨문 것도 어찌나 세게 깨물었던지 귀 위쪽에서 피가 흐를 정도였다.
얌전한 척 굴더니 너도 용이라 이거냐!
빠르게 몸을 타고 내려간 새끼용의 입 비늘에 반질반질하게 핏자국이 묻어있었다.
띠링!
[ 로이에르가 당신을 기억합니다! ]
기억한다고?
[승지야! 저길 좀 봐!]
후둑. 후두둑.
그때까지 가만히 서있던 용의 몸이 점점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다 타고 남은 숯이 하얗게 부서지듯 말이다. 용의 잔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계속 승지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로잉의 몸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용이 부서지는 속도와 똑같이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슈르륵.
로잉의 몸에서 뼈대가 돌출되고 몸집이 커졌다.
또한 용의 몸속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졸졸, 개울만 하던 소리는 강처럼 커지더니 금세 계곡만큼, 폭포만큼이나 웅장한 소리가 되었다.
끝에 가서는 아예 터져버릴 만큼 크게 말이다.
콰아앙!
[꺄악! 벽이 폭발했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승지가 다급하게 무기부터 꺼냈다.
엄청난 양의 물을 감당하지 못한 벽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성장을 거듭하던 로잉은 이제 더 이상 승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대신 천장을 향해 기묘한 소리로 울었다.
“이르르르…!”
[ 새로운 던전의 주인이 던전을 복구합니다! ]
터져 나온 물은 기세를 멈추지 않고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무릎까지 물이 차올라 승지가 휘청거렸다.
설마 익사당하냐!
승지가 당황한 순간, 로잉이 용을 빼닮은 주둥이로 승지의 배를 밀어 올렸다.
“엇!”
가뿐하게 승지를 주둥이에 얹은 용이 위로 날아올랐다.
쿠르륵!
벽에서 터져 나온 물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차올랐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소용돌이를 본 승지가 침을 꿀꺽 삼켰다.
휩쓸렸으면 뼈도 못 추렸겠다.
던전의 모든 것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기세 좋게 올라오던 물은 차차 속도가 줄어들더니 제일 위층까지 올라오고서야 멈췄다.
가장 높은 곳까지 날아오른 로잉은 가볍게 물 위에 안착했다.
[맙소사…! 장관이야! 우리가 알던 던전이랑 완전히 다른 곳이 되어버렸어!]
던전은 이제 숲이 아니라 완전히 거대한 호수가 되었다.
밑이 온통 물바다였기에 승지는 무심코 로잉의 주둥이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쳐서 몹시 어색해졌지만.
성장한 로잉은 전에 보았던 용처럼 엄숙하고 낯선 분위기가 흘렀다. 생긴 건 완전히 달랐는데도 비슷해 보였다.
승지가 침을 꿀꺽 삼켰다.
“너… 로잉 맞냐?”
로잉이 머리를 슬쩍 돌렸다.
시선을 따라가니 물살에 휩쓸린 던전 잔해가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게 보였다.
그 중에선 용의 것도 있었다.
승지가 바라보는 동안 로잉이 천천히 수면을 진동시켰다.
거대 라미아가 썼던 기술과 똑같은 물의 용솟음이었다.
공격인가?
다행히 부드럽게 둥실 떠오른 물은 잔잔한 수면을 쓸 듯이 움직였다.
얕은 파도를 타고 용의 잔해 중에서 유독 빛을 발하는 부분이 떠내려 왔다.
납작한 원반처럼 생긴 노란색 보석이었다.
[ 지지않는 낮의 눈동자 : 태어날 때부터 마력을 먹고 자라난 용의 심장.
어디에 있든 소유자의 모든 치명상을 대신 받는다. 심장 상태로도 살아있을 때의 자가 치유력이 유지된다.
섭취 시 힘 20 증가, 지능 30증가, 민첩 10 증가, 종족 마력 제한 해제, 행운 10 하락, 치명타 방어 기능 상실 ]
[마지막 보상이야!]
“원래 보스를 잡았을 때 받을 수 있는 보상이 이건가.”
너무 엄청난 보상에 승지는 오히려 침착해졌다.
던전 주인을 잡는 게 아니라 부탁을 들어준 덕분에 사냥해서 얻을 수 있는 보상보다 훨씬 많은 걸 얻었다.
로잉이 나한테 이걸 줘야 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땐 태어나기도 전이었을 텐데.
문득 승지가 물었다.
“죽었던 용이 네가 된 거냐?”
로잉이 가볍게 꼬리를 쳤다.
생긴 건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 승지를 볼 때면 새끼 때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이제 던전의 주인이 되었으니 승지 따윈 쉽게 죽여 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약속대로 보상을 건네는 걸 보니 오히려 인간보다 믿음직스러웠다.
승지는 용과 눈을 마주쳤다.
“난 여기서 나가야 해. 반드시 할 일이 있어.”
“…….”
“돌아가는 문을 열어줄 수 있겠어?”
그러자 로잉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한 번 길게 울었다. 그러자 승지 바로 옆에서 던전의 틈이 비틀리며 열렸다.
어딘가 익숙한 장소는 분명히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미스핏의 회의실이었다.
“고맙다!”
승지가 로잉의 머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흐으으응~ 역시 승지도 로잉을 사랑하는 거지~!]
“시끄러.”
승지는 미끄러지듯 로잉의 주둥이를 타고 내려왔다. 로잉은 떠나려는 승지의 허리를 가볍게 깨물었다.
분명히 장난이었지만 순간 등골이 섬짓 했다.
“야, 야 지금 네가 그러면 공격인지 구분이 안 간다고.”
“로잉.”
여전히 살벌한 용의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새끼 때처럼 치대는 모습을 보니 정이 갔다.
에라, 그래. 똑같은 놈이라도 다시 태어났으면 다른 놈이지. 어린 녀석이 가끔 깨물어서 피도 먹을 수 있는 거고 말이야.
“의심해서 미안했다 로잉.”
승지가 가볍게 이마를 문지르자 새끼 때처럼 속눈썹이 풍부하게 깔린 눈이 투명하게 승지를 비추었다.
“다시 보러 올게.”
유청 놈에게 복수하고 고리를 가져오면 네가 있는 던전 한 번이 안 열리겠냐.
배웅하듯 뽑아내는 로잉의 긴 울음소리를 들으며 승지는 열린 문 너머로 뛰어들었다.
얼마 만에 맡아보는 현실의 공기냐! 어서 와라 미세먼지야!
덩달아 신난 성좌가 종알거렸다.
[있지. 승지야! 너도 결국 로잉이라고 부른 거 알아? 음헤헤. 이 몸의 작명실력이란!]
“쉿.”
승지가 목소리를 낮췄다.
돌아온 미스핏 길드의 회의실은 텅 비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