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색돌 (4)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지?
현란한 색상을 뽐내는 빨간 쫄쫄이와 벨트를 보며 머리 한 쪽이 아찔해졌다.
승지가 신랄하게 비평했다.
“드디어 미치셨어?”
“어허 말이 섭섭하군!”
번태는 홈쇼핑 판매원처럼 촤락 쫄쫄이를 펼쳤다.
“이 광택! 착용감! 기능성!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다네! 통풍도 잘 되지!”
[너무 좋다! 승지야! 우리 저거 빨강 찜꽁해놓자! 우리 색이잖아!]
꺼져!
성좌가 쫄쫄이에 넘어갈 것 같아진 승지가 다급하게 사절했다.
“약 팔지 마십쇼. 그런다고 입을 거 같습니까!”
“임무가 있는데도?”
“임무요?”
그냥 튀려던 랭커들이 멈칫했다. 어쨌든 오색 형용 찬란한 쫄쫄이를 든 인간은 랭킹 1위였다.
“지금부터 자네들은 각자 컬러에 맞는 소대원들을 소집해야 한다네!”
“소대원이라니 무슨 소리야, 아저씨?”
고등학생 놈이 껄렁하게 되물었다. 번태가 태연히 답했다.
“자아. 다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게. 이번 마약 사건에 랭커들이 얼마나 열심히 할 거 같은가?”
“그래도 마왕 일인데 열심히 하지 않겠습니까?”
류의건이 낙관적으로 답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해나 안하면 다행이지.”
승지의 말에 번태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본 능력이 약한 랭커들은 마왕이 나타나는 걸 결사적으로 막겠지만 다른 랭커들은 사정이 다르지. 오히려 정체된 성장을 단숨에 끌어올릴 기회로 볼 수도 있거든.”
마왕의 저주 때문에 승지를 죽이려고 했던 길드 연합의 세 길드장은 모두 징계를 받았다.
그런데 징계 내용이 묘한데, 살해 혐의가 아니라 연합에 공유 없이 독단으로 처리했다는 이유로 벌을 받았다.
만약 길드 연합에 승지의 존재가 제대로 드러났다면 마왕 토벌전은 좀 다른 양상이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승지는 미끼 역할만 하고 다른 랭커들의 단체 토벌이 되지 않았을까.
고등학생 랭커가 승지를 대놓고 쳐다보았다.
“확실히. 마왕 하나 잡은 거로 여기 랭킹에 낀 사람도 있긴 하지.”
승지는 이런 비아냥에는 익숙했다. 이럴 때 곧이곧대로 화를 내는 건 하수지. 오히려 그는 여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부럽냐?”
“내가 왜?”
빠직. 그들이 사납게 서로를 노려보았다. 다른 랭커가 물었다.
“그럼 알러트 놈들도 마왕 소환을 목적으로 마약을 푼 거란 말입니까?”
“어쩌면!”
번태는 그때까지 들고 있던 쫄쫄이를 다시 내밀었다.
“그러니 내 목표는 마약의 제거가 아니라 원산지를 때려잡는 걸세!”
“무슨 수로요?”
“게다가 이 쫄쫄이는 대체 뭔 상관이고.”
“원래 마약이란 게 큰 행사가 있을 때 더 몰리는 거 아니겠나.”
번태가 씩 웃었다.
“길드 재산을 좀 헐어서 아주 거창한 미끼를 만들 생각일세. 자네들은 내가 여는 행사에서 미끼이자 범인을 찾아내는 역할을 맡게 될 거야.”
“행사요?”
“곧 새해잖나?”
번태가 설명한 행사는 과연 거창한 규모였다. 안내를 들을수록 찌푸려져 있던 랭커들의 얼굴이 점점 펴졌다.
[확실히 재밌을 거 같아!]
같이 듣던 성좌도 감탄했다. 승지는 행사의 내용보다 실효성이 의문스러웠다.
“정말 그런 걸 연다고 알러트가 관심을 가질까?”
“물론이지! 무엇보다 상품이 어마어마하니까!”
“그거 우승 상품, 우리가 이기면 진짜 주는 거죠?”
벌써 잿밥에 눈이 넘어간 고등학생이 재차 물었다.
“물론! 승리하기만 하면 진짜로 자네들이 가질 수 있네!”
번태가 장담했다.
“이미 사라진 마왕이 사용했던 무기라면 모든 각성자가 관심을 갖겠지!”
그들의 눈이 저마다의 이유로 불타올랐다.
번태가 장난스레 우승 상품으로 내놓겠다고 한 물건은 지금까지 시중에 단 한 번도 풀린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번태 본인이 던전을 돌다가 직접 획득한 물건이 분명했다.
그걸 직접 쓰는 것도 아니고 내놓겠다니 확실히 통이 엄청나시구만.
지금까지 마왕이랑 관련된 일엔 안 빠지고 머리를 들이밀었던 알러트 놈들이니 이번 행사에 분명히 참가할 것이다.
번태가 다시 일러주었다.
“자, 자네들은 각자 자신의 팀이 될 사람을 모집하면서 마왕의 힘이 있는지 계속 감지해보게! 의심스러운 각성자 명단은 이쪽, 김엄택 경정에게 보내면 된다네!”
번태가 의욕적으로 말했다.
마왕이 쓰던 무기라는 말에도 유일하게 별다른 반응이 없던 류의건이 끈질기게 물었다.
“그래서 쫄쫄이는 왜….”
“팀장이니 당연히 모범을 보여야지! 내가 특별히 우리 길드원한테 디자인까지 부탁해서 만든 옷이거든.”
왜 그렇게 진심이냐고.
아무리 상품이 훌륭해도 부정하고 싶은 복장이다. 그들이 망설이는 사이 고등학생 놈이 냉큼 쫄쫄이 중 하나를 낚아채 갔다.
“난 블랙.”
그나마 검정색이 제일 덜 쪽팔린 색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나머지가 심란한 표정이 되었다. 남은 색은 빨강, 파랑, 노랑, 초록으로 아주 정석적인 색이었다.
류의건이 참담한 심정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승지 씨는… 머리랑 맞춰서 빨간 색을 하시면 되겠네요, 하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난 노랑일세! 번개맨이니까!”
번태가 아무렇지도 않게 쫄쫄이를 몸에 갖다 댔다.
하 ㅆ바…. 미치겠다, 진짜.
결국 승지는 빨강을 골랐다. 어차피 쪽팔려야 한다면 성좌라도 만족시키는 게 나으니까.
[크으! 완전 승지한테 딱이야! 대장! 리더의 색!]
물론 성좌는 뒤집어져라 좋아했다. 너무 좋아해서 좀 열 받을 정도로.
류의건이 파랑을 고르고 아직도 이름을 모르는 인간이 초록을 가져갔다.
“댁은 이제부터 그린이라고 부르면 됩니까.”
“…허허허허. 진짜 그러실 겁니까.”
그린이 넋이 나간 웃음을 지었다. 막상 초록색 쫄쫄이를 받아드니 더는 현실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고등학생, 그러니까 블랙이 잽싸게 말했다.
“아저씨들, 원래 레드가 아니라 블랙이 진 주인공인 거 알지?”
“주인공 하고 싶지도 않다.”
승지가 쯧하고 중얼거렸다. 빨간색 흉물을 냉큼 인벤토리에 처넣은 승지는 행사 날까지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자 그럼 각자 훌륭한 팀원을 모아보게! 그리고 변신 복장은 어디다가 흘리지 말고 최소한 인벤토리에는 갖고 다니게! 아주 중요한 물건이니까!”
콰르릉!
번태는 말과 물건을 전부 전달하고는 만족해서 사라졌다.
갑자기 내려친 번개에 눈을 감았다가 뜬 승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빌어먹을, 진짜로 입어야 하냐고. 이거.”
[왜! 그 멋쟁이 빨간 옷도 스킬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어차피 승지는 익숙해졌으니까!]
시끄러. 겪어봐서 더 입기 싫은 거라고.
순간 스킬을 쓰며 변신했던 기억을 떠올리니 몸서리가 쳐졌다. 차라리 이건 수동으로 내가 입을 수 있으니 덜 쪽팔린 거 같기도 하고.
“그럼 이제부터 팀원 모집하러 가면 되는 거지?”
블랙 꼬마가 한 손으로 쫄쫄이를 흔들더니 바로 갈 준비를 했다.
“진짜 열심히 할 생각이냐?”
“상품 못 들었어? 어차피 할 거면 여기서 시간 낭비할 시간이 없거든. 팀원은 먼저 뽑는 사람이 임자니까!”
블랙 꼬마가 스킬을 썼는지 펑하고 사라졌다. 아직까지 현실을 부정하며 눈을 굴리던 그린도 먼저 팀원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에 허둥지둥 나갔다.
“아 씁. 그러고 보니 팀이라고 그랬지. 그냥 혼자 하면 안 되나.”
“진짜 행사가 아니라 알러트를 색출해내는 게 목적이니까요. 누구든 구하셔야지요.”
류의건이 파란 쫄쫄이를 착착 곱게 접었다.
“딱히 팀으로 떠오르는 인간이 없는데.”
“아마 승지 씨가 먼저 구하지 않아도 지원자가 빗발친 겁니다. 공식적으로 발표가 되기만 한다면요.”
하긴 상품을 생각해보면 팀에 들어오려고 하는 인간이 해외에서 날아올 지도 모른다.
윽, 사람 만날 생각하니 왜 이렇게 거북하지. 그것도 내가 직접 뽑아야 하잖아.
매일 면접만 보러 다니다가 면접을 보는 입장이 되려니 생경했다.
그냥 나 아는 사람들로만 채우면 안 되나? 유월하고… 유청이랑 미스핏 길드 애들에다가 오조희도 부르면 대충 쪽수 맞지 않을까?
가뜩이나 좁은 인간관계에서 지인부터 모집하려는 승지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류의건은 이상하게 초탈해보였다.
“넌 상품에 관심 없냐?”
“제 성좌의 특성 상 저는 마왕과 관련된 무기는 쓰지 못합니다.”
“아, 하긴.”
승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 팀원 구하기는 쉽겠네? 이겨도 상품은 갖지 못하는 팀장이라니.”
“그렇겠네요.”
어 뭐야. 그럼 류의건을 팀원으로 받으면 개 이득 아니냐?
둘이 다른 팀의 팀장이라는 게 갑자기 엄청나게 아쉬워졌다.
“그런데 승지 씨, 마왕 감지 스킬은 언제 얻으셨던 겁니까?”
“응? 스킬 얻은 적은 없는데?”
“그럼 왜 남으신 겁니까? 설마 번태 길드장님이 이런 행사를 열거란 걸 미리 들으셨어요?”
류의건이 약간 놀라 말이 빨라졌다.
“아니, 그냥 비슷하게 마왕을 감지할 수 있는 물건을 얻어서 그래. 나도 설마 이런 일인줄 알았겠냐.”
상품 때문에 일단 하기로는 결심했지만 쫄쫄이를 입어야 할 줄 알았더라면 좀 더 고민한 다음에 남았을 것이다.
“마왕을 감지 할 수 있는 물건이요?”
“그거 저도 볼 수 있겠습니까!”
갑자기 육성 두 개가 겹쳤다. 있는 줄 까먹었던 김엄택이 류의건과 동시에 물어왔던 것이다.
“어, 놀래라. 아직 안가셨네?”
“아까부터 있었습니다! 혹시 성함을 좀 들을 수 있겠습니까, 레드 씨!”
“레드가 아니라 채승지입니다.”
승지가 순간 표정을 구겼다.
경찰이라는 사람이 레드라고 부르니 진짜로 범죄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팀원 뽑을 때 통성명을 꼭 하고 다녀야겠군.
김엄택은 안색하나 바꾸지 않고 바로 호칭을 바꿨다.
“채승지 씨. 죄송합니다. 랭커 분들의 이름을 다 외우진 못해서. 그나저나 정말 마왕을 감지할 수 있는 물건을 갖고 계십니까? 스킬이 아니라?”
“예, 뭐. 그렇습니다.”
“혹시 대여가 가능할까요?”
김엄택이 사족을 다 차버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쪽에 국제 수사관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관련 스킬 없어요?”
“물론 수사관은 그 스킬을 보유하고 있지만 문제는 저희 비각성자입니다.”
김엄택이 비장하게 말했다.
“기존에 저희가 가지고 있는 마약 탐지 기술로는 마약 키스를 잡아낼 수 없다고 말씀 드렸었죠?”
“아, 예.”
“번태 길드장님은 일단 마약을 만들어내는 각성자부터 잡을 생각이고, 저도 그게 효율적이라는 걸 알지만 이미 풀린 마약이 마왕을 불러내지 않더라도 이미 피해가 꽤나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가 장황하게 설명했다.
“게다가 길드장님 말대로 다른 랭커들이 골목길을 일일이 돌면서 마약 판매를 붙잡지는 않으실 거 아닙니까.”
“맞는 말이죠.”
“그러니 괜찮으시다면 그 물건을 빌려 최소한 인구 밀집 지역에서 마약을 색출하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김엄택이 열성적으로 말했다. 승지는 별 생각 없이 답했다.
“의욕 있는 건 좋은데 그렇게 범위 있는 수색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내가 갖고 있는 물건도 일인용인데.”
돌멩이 하나로 일일이 사람을 검색하고 다니기엔 비효율적이라고 말하려던 승지의 앞을 성좌의 대화창이 가로막았다.
[아니야, 승지야! 나 지금 좋은 생각이 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