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폭탄 투하 (1)
승지는 쓰러진 범윤오에게서 벗어났다. 승리의 대가로 허공에서 떨어진 윷을 받아낸 승지가 가볍게 윷가락을 던졌다.
데구루르.
[!났다!]
성좌의 외침과 함께 새로운 통로가 열렸다. 처음으로 말판을 벗어나는 통로는 지금까지와 달리 노란빛으로 반짝거렸다.
번태의 말대로라면 저기 들어가는 순간 마왕의 무기가 나타날 것이다.
승지가 통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파아앗!
한창 윷놀이가 진행되고 있는 말판에서 벗어난 승지를 향해 새로운 칸이 솟아올랐다.
[저길 봐! 중앙에!]
승지가 넓은 원형 가운데 서서히 솟아오른 무기를 확인했다. 공중에 나타났던 형상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불길하게 일렁이는 검은 불씨를 보고 있던 승지가 통로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제대로 무기를 확인하기도 전에 갑자기 하늘에서 거대한 문이 열렸다.
“나왔다!”
승지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 하늘이던 곳에서 던전이 열리고 있었다.
알러트가 접근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하늘에서 올 줄은 몰랐던 승지가 급하게 소리쳤다.
“성좌야! 먹어!”
[응!]
성좌가 잽싸게 인벤토리를 열었다. 동시에 열린 던전 문에서 사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바구니를 뒤집어엎자 바퀴벌레가 끝도 없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가면을 쓴 인간들이 무기가 있던 자리로 쇄도했다.
“아앗! 저게 누구죠? 이것도 번태 길드장의 연출일까요!”
“저건 던전 아닙니까?”
괴물 대신 튀어나온 사람들에 중계진이 당황했다.
승지도 뛰기 시작했다. 던전에서 떨어진 알러트의 손이 닿기 직전에 인벤토리가 번쩍거리며 열렸다 닫혔다.
무사히 그들이 탈취하기 전에 마왕의 무기를 손에 넣은 것이다.
“됐다!”
승지는 바로 튈 준비를 했다. 작전대로 알러트가 유인되었으니 나머지는 본진으로 들어간 번태가 알아서 뒤집어놓을 것이다.
바로 칸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리려던 승지는 퉁, 하고 부딪치는 결계에 당황했다.
막혔다고?
[승지야! 인벤토리로 들어와! 거기로는 나갈 수 없어!]
무기를 삼킨 성좌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쪽에 결계 스킬을 쓰는 각성자가 있나봐!]
승지는 바로 발 밑에 인벤토리를 열라고 말하려다 급히 몸을 피해야 했다.
눈앞에서 무기를 빼앗겼는데도 알러트 놈들은 코털만큼도 동요하지 않은 채 승지를 공격했던 것이다.
승지는 바로 프레임 컨트롤을 걸고 그들을 상대했다.
퍽!
민첩하게 움직이는 그들에게 주먹이 날아가 꽂혔다. 그러나 윽 소리를 내며 날아간 놈들은 금세 고무 인형처럼 몸을 뒤집더니 다시 달려들었다.
이것들 인간 맞아?
승지가 아주 잠깐 그들 사이에서 지체했는데도 콤보가 미친 듯한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 33콤보! ]
[ 34콤보! ]
한 놈씩만 쳐내려고 해도 숫자가 너무 많았다. 이제는 승지 쪽에서 이 놈들이 도망가지 않고 계속 맞아주도록 조절할 정도였다.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달려드는 놈들을 본 승지는 저절로 쌍소리가 튀어나왔다.
“새끼들아! 이미 무기는 내가 먹었다고! 어딜 넘봐!”
그래도 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들은 묵묵히 승지에게 달려들기를 반복했다.
물컹!
허리를 쥐어박자마자 힘없이 늘어지며 몸이 꺾이는 걸 본 승지는 이제 이것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조종당하는 거라면 본체가 있어야 할 텐데.
지금도 계속 쏟아지고 던전 안에 이것들을 조종하는 인간들이 있을 것이다.
[승지야 조심해! 백정민처럼 닿기만 해도 직접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내갈 지도 몰라!]
백정민도 보스한테 받은 스킬이라고 했으니 이 녀석들 가운데 확실히 없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닿기 전에 그들을 쳐내던 승지가 슬슬 몰려들기 시작하는 카메라를 향해 소리 질렀다.
“이봐! 이것들 다 알러트라고! 빨리 지원 요청해!”
흥분한 드론들이 붕붕거리며 날아다녔지만 딱히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관객석이랑 중계진이 소란스러워지고 있어! 긴급 대피 중인가 봐!]
니들이라도 튀어라, 그래.
승지가 혀를 찬 그 순간 공기 중에 큰 파동이 터져나왔다.
투웅!
구경하던 누군가 달려왔는지 갑자기 칸을 가두고 있던 경계가 흔들렸다. 자신이 있던 곳에서 벗어나 날아온 류의건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결계 좀 깨 봐!”
승지가 고함을 질렀다. 그가 대검을 꺼내들고 신중하게 경계를 향해 날렸다.
그러나 랭킹 2위에 일격에도 결계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저놈보다 더 힘이 강한 녀석이라고?
승지는 차고 때리고 뛰어오르며 던전 쪽으로 다가갔다. 던전 속에는 계속 승지를 공격하는 녀석들과 다른 가면을 쓴 놈이 보였다.
혹시 저 녀석이 알러트의 보스인가?
네모낳게 각이 진 하얀 가면이 밑에서 뛰어오르는 승지를 보고 갸웃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쥐고 있던 지팡이를 아래쪽으로 쭉 내렸다.
꿀렁!
승지에게 달려들던 분신들이 갑자기 크게 부풀더니 서로 달라붙기 시작했다.
“크윽, 냄새!”
고무가 녹는 듯한 지독한 냄새에 부풀어 들러붙는 인형들의 모습은 끔찍했다.
살색과 검은 머리카락이 쓰고 있던 흰 가면과 뒤섞여 질척한 진흙 색으로 변모했다.
방금 전까지 공격 대상이었던 것들이 늪처럼 변해 승지를 삼키려고 다가왔다.
그러나 승지는 그 때쯤 80콤보를 채운 뒤였다.
“하아아!”
[ 필살기 발동! ]
승지가 하찮은 먼지라도 털어버리듯 필살기를 사용했다. 바다를 내려치듯 괴물이 출렁였다.
그러나 필살기를 쓰면 필연적으로 시간이 느려졌다.
기묘하게도 승지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지독하게 느려진 와중에도, 분신들을 조종하던 네모 가면이 천천히 일어서는 걸 볼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지금은 승지의 필살기가 시전 된 상태인데 어째서 움직일 수 있는 거지?]
네모 가면은 천천히 턱 밑으로 가면을 잡고 들어올렸다. 그때까지 승지의 몸은 발동된 필살기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
그가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승지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입술 모양만 갖고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성좌는 달랐다. 성좌가 재빨리 승지에게 해석한 대화창을 띄웠다.
[너는 우리의 초대를 받았다.]
[그러나 기다리는 동안 우리의 인내심은 바닥나고 말았다.]
[아아으?!]
갑자기 가면 밑으로 입이 쩍 벌어졌다. 보통의 인간보다 네 배는 커진 입이 뾰족해진 이빨을 드러냈다.
승지의 눈이 커졌다.
저것들, 그냥 알러트가 아니었나?
툭.
가면이 통로에서 떨어졌다. 딱 승지의 필살기가 끝날 타이밍이었다.
[두 눈을 뜨고 경계하라. 우리는 어디에나 있을 지니.]
콰아앙!
승지가 막 필살기에서 풀려나 몸이 자유로워지는 그 순간, 검은 침이 떨어지는 네모 가면이 승지의 머리를 삼켰다.
[꺄아아아아악!]
성좌는 비명을 질렀으나 승지의 귀에는 닿을 수 없었다. 대신 승지의 고막에는 좀 다른 목소리가 울렸다.
“잡았다!”
이 목소리는.
순간 목 부분에 엄청난 압력이 가해지느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무언가 머리 양쪽을 문 느낌에 승지가 다리를 버둥거렸다. 발이 허공에 떠있었다.
헬멧…!
승지가 이를 악물며 헬멧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그러자 헬멧과 몸이 분리되며 자신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새빨간 헬멧을 물고 있는 네모 가면이 적갈색 가죽 끈에 묶여있는 게 보였다.
“휴! 늦지 않게 도착했구만!”
번태였다.
그는 버둥거리는 가면의 등을 밟고 있었다.
억지로 던전을 찢고 온 것처럼 번태의 주변으로 번개로 된 용의 수염이 지직거리며 공기를 갈랐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시원해지며 흩날렸다.
승지는 자신의 안전보다 여전히 인간답지 않게 움직이는 네모 가면에 시선이 박혀있었다.
“저거 알러트 맞아?”
“그렇다네!”
“하지만 인간이 아니잖아!”
네모 가면은 이제 움직임을 멈추고 빤히 승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면 너머로 느껴지는 시선이 얼마나 집요하던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글쎄! 하지만 아무래도 이게 알러트 보스인 건 확실하거든!”
“내 거점은 어떻게 됐지?”
갑자기 달라진 목소리가 가면 밑에서 흘러나왔다. 번태가 시원스레 답했다.
“전부 박살났다네! 지금 내 인벤토리에서 앓고 있는 부상자가 꽤 많지!”
일은 똑바로 했나 보구만.
이동하자마자 순식간에 제대로 본진을 털어 놨다니 과연 실력이….
“잠깐, 정말 저게 보스 맞아? 상식적으로 보스 혼자 왔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나랑 싸웠던 것들이 모두 보스는 마왕의 무기를 가지러 갔다고 했다네.”
번태가 여전히 자신에게 붙들려있는 네모가면을 발로 흔들었다. 네모가면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정말 본인인지 설명해볼 텐가?”
“…새로운 집으로 갈 땐 헌 집을 버리는 법이지.”
네모 가면의 목소리가 변하더니 높은 여자 목소리가 났다.
표정이 해괴해진 승지가 갑자기 뛰어올랐다. 허공 답보로 한 번 밟아 오른 그가 붙잡힌 가면을 벗기려고 손을 뻗었다.
“너 누구야.”
“마왕.”
깊고 어두운 목소리가 울리더니 갑자기 네모 가면의 몸이 폭발했다.
그를 제어하고 있던 번태가 급히 뇌룡을 움직였다. 네모 가면의 몸이 폭발한 자국 그대로 잔상이 남았다.
그게 잔상이 아니라 실체라는 사실은 한발 늦게 뇌리로 다가왔다.
“류의건 선생! 카메라를 부수게!”
번태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멀리서 푸른빛이 번쩍였지만 지금 승지의 앞을 가린 암흑을 밝힐 수는 없었다.
갑자기 승지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혼자 남겨졌다. 어딜 돌아봐도 끝없는 어둠뿐이었다.
번태도, 윷놀이 경기장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시끄럽던 성좌의 상태창도 없었다.
승지는 자신의 몸을 움직여보았다. 멀쩡한 것 같았다.
그때 자신의 눈앞에 폭발하기 전의 네모 가면이 다시 나타났다.
왜소한 체격을 가진 네모 가면이 천천히 걸어왔다.
“너희는 아무것도 몰라.”
“ㅈ까.”
승지는 가볍게 가운뎃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그리고는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쨌든 잡아서 저 놈을 족치면 게임 끝이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쓸 데 없는 짓이야.”
“떠들지 말고 붙어!”
승지는 가볍게 그의 말을 무시했다.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상관없었다.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개 같을수록 분노만 더 활활 타오르니까.
“내가 지금까지 마왕 한두 명 조져본 줄 아냐!”
네모 가면이 물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하지만 사람은?”
“…뭐.”
갑자기 어둠이 사라졌다. 허공을 밟던 승지의 발이 급하게 바닥을 디뎠다.
다시 밝아진 세상은 여전히 승지가 있던 윷놀이 판 그대로였다.
[승지야!!]
성좌의 대화창까지 날아오는 걸 보니 돌아온 게 확실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승지와 대화하던 네모 가면은 사라지지 않고 남았다.
승지도 오직 그에게 관심이 쏠려 있었다. 가면이 또다시 말했다.
“나는 사람이야.”
“방금 전까지 마왕이라고 씨부리던 새끼?”
승지가 비꼬았지만 가면은 다시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를 냈다.
“사람도 얼마든지 마왕이 될 수 있어.”
그의 가면이 바뀌었다.
“증명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