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글라세로의 저주 (4)
코 쓰려.
“끄으응.”
인상을 잔뜩 찌푸린 승지가 신음했다.
골이 무지하게 울렸다. 술 잔뜩 먹고 뻗은 다음날 같았다. 방안이 빙빙 돈다.
“정신이 드세요?”
“…컥!”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식겁한 승지가 흠칫했다.
눈을 뜨니 최자림과 서명구가 걱정스럽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뭐야 당신들.”
“방에 쓰러져계셨어요.”
“무슨 병이라도 있던 거였어요?”
“아.”
승지가 화급히 얼굴을 만져보았다. 정신을 잃은 동안 씻겼는지 깨끗했다.
옷은 그대로고. 아직 그 방인가.
일단 안심한 승지가 둘러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피를 그렇게 흘렸는데요?”
“피곤하면 원래 가끔 코피 납니다. 체질이에요.”
대충 대답하며 승지가 눈을 굴렸다.
성좌 이놈은 왜 안 나타나? 상황 좀 말해주면 좋겠는데.
말 많은 놈이 꼭 필요할 때는 조용하지.
승지의 눈이 게슴츠레해지자 최자림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각성자님. 미안하지만 기절하신 사이 팔을 좀 봤어요.”
“…예?”
승지의 표정이 금세 싸해졌다.
“남이 잠든 사이에 마음대로 몸을 뒤졌다는 겁니까?”
“다른 뜻은 없었어요. 너무 답답해 보여서 풀어주려다 보니.”
답답? 세상에서 제일 넉넉한 항공 점퍼를 입고 있는데 무슨 헛소리야.
명구 놈도 은근슬쩍 눈을 피하는 걸 보니 백퍼센트 일부러 뒤진 게 분명했다.
이것들이?
최자림은 뻔뻔하게 나왔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팔에 글라세로의 문양이 있는 거, 끝까지 감출 생각이었어요?”
승지가 미간을 좁혔다.
“누구 때문에 생긴 건진 알고 하는 소립니까?”
“하… 일단 죄송해요. 어쩐지 명구한테 던전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본다 했는데.”
역시 아까 전의 대화가 귀에 들어갔군.
승지의 시선에 명구가 더더욱 어쩔 줄 몰라 했다. 자기가 말을 흘렸으니 찍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승지는 처음부터 이 정도는 들킬 걸 예상하고 미스핏 길드로 왔었다.
멀쩡하던 던전이 갑자기 완파되었는데 아무도 알을 건드리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테니까.
계속 쳐다보길래 날 의심하는 줄 알았더니.
오히려 이제야 글라세로의 저주를 추궁하는 최자림의 반응이 더 이상했다. 마치 저주에 걸린 걸 지금 처음 안 사람 같았다.
내가 알을 깬 걸 알고 부른 게 아니었나?
그게 아니면 왜 날 가입까지 시켜준다는 말로 끌어들인 거지?
새로운 의문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 일에 대한 보상은 제대로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말은 해주셔야죠!”
잠깐 생각에 잠겼을 뿐인데 최자림은 바닥까지 쿵쿵 쳐가며 다그쳤다.
거 살살 하세요. 나 방금 기절했다 깨어났다고.
가뜩이나 저릿저릿하던 머리가 윙하고 울렸다.
으, 왜 이렇게 아픈 건지 성좌 놈은 알고 있으려나.
일단 두 사람을 쫓아 보내고 좀 물어봐야겠다.
“대충 저쪽한테서 무슨 저주인지는 들었습니다. 그건 일단 알아서 할 테니 보상이나 확실하게 챙겨주시죠.”
“뭐라구요? 하지만, 아니, 저주라고요! 저주! 무슨 저준지 들었다면서 왜 이렇게 태연해요? 혹시 저주를 푸는 방법이라도 아는 건가요?”
“피곤합니다. 나가세요.”
“각성자님!”
“아파 죽겠으니까 좀 멀쩡해지면 다시 오라고요.”
승지가 일부러 더 아픈 척 인상을 썼다.
다시 코피 안 나나. 피를 닦아서 별로 심각해 보이지가 않는군.
열심히 엄살을 부려보려던 승지는 결국 성질을 못 참고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지금 화를 낼 사람이 누군데 자꾸 큰 소리지? 이거 제대로 따지면 각성자 관리소에 고소하고 싶은 수준인데요?”
“그, 그건 죄송해요.”
명구가 바로 납작 고개를 숙였다.
최자림은 뭐라고 잔뜩 말하고 싶어 하다가 훅하고 천장을 향해 입김을 내뱉었다.
“…좋습니다. 그럼 내일 다시 오죠. 채승지 각성자님. 그땐 꼭 제대로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빨리 나가요. 당신들 얼굴 보면 나으려던 것도 다시 아프겠어.”
억지로 두 사람을 내보낸 승지는 저벅저벅하고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래도 안 나타나네.
“야, 야! 성좌!”
기어코 자기 입으로 성좌를 불러대자 그제야 상태창이 띠링 나타났다.
[…….]
“왜 이제 나타나. 대체 무슨 일이야 이게?”
[너 하루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어…!]
“뭐?”
놀란 승지가 창밖을 쳐다보았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과 똑같이 밝아서 몰랐는데 하루나 지났다니.
“…어쩐지 배고프더라.”
[이런 심각한 상황에 그런 바보 같은 소리 할 거야!]
성좌가 빼액 상태창을 띄웠다.
아니, 진짜 배고파서 그런 건데.
약간 머쓱해진 승지가 본론에 집중했다.
“그럼 저 미스핏 길드원들은 언제부터 와있던 거냐?”
[어제부터야. 네가 쓰러진 걸 보고 계속 들락거리면서 확인했어.]
뭐라고.
기절한 사람을 이미 씹고 뜯고 즐기고 다 해놓고 새삼스럽게 캐물어본 최자림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와, 씨. 진짜 고소하고 싶네.”
[다행히 글라세로의 문양을 발견하고 나선 더 건드리진 않았지만, 관리소에 네 신상도 물어보고 던전에서 가져온 보물도 보던걸.]
“저거?”
그제야 승지가 무릎걸음으로 기어갔다. 일어서려고 하면 띵하고 머리가 울렸던 것이다.
[승지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내 상태창은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이니까 말릴 수도 없고 너무 무서웠어!]
“어엉, 그래.”
성좌의 한풀이에도 승지는 일단 아이템부터 확인했다.
[ 마무자의 성스러운 항아리 : 신의 힘으로 항아리에 든 액체를 성수로 바꾼다. 성수는 마무자의 본체보다 약한 상태이상을 모두 해제한다.
상태이상이 없는 상태에서 성수 복용 시 지능 10 상승.
정령의 목소리가 들릴 확률 0.1 퍼센트 ]
마무자보다 약한 저주만 해제한다고?
딱 봐도 글라세로보다 훨씬 약해 보이는 이름이라 자신의 저주를 풀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항아리 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약간 찰랑이고 있었다.
“웬 물이지? 뭐 넣어놓은 적 없는데.”
[아까 네 코피.]
“아.”
마셔보려고 했는데 바로 포기다.
승지는 항아리를 기울여 바닥으로 얼굴을 비춰보았다.
머리 위에 있던 숫자가 사라지고 없었다.
“혹시 내 머리 위에 떠 있던 붉은 글씨 봤냐?”
[응. 그게 네 페널티였어.]
분명히 숫자로 64였지.
페널티를 수치화 해달라고 했더니 정말 깔끔하게도 만들어 놨다.
64가 코피와 두통, 기절이라.
아니, 숫자가 사라진 지금도 어질어질할 정도면 더 깊은 타격일 거다.
이마를 짚은 승지가 물었다.
“그런데 완벽한 콤보 페널티가 그렇게 셌다고? 고작 13콤보에다 스켈레톤도 다 잡았잖아.”
[완벽한 콤보의 페널티가 아니야. 프레임 컨트롤 페널티지! 스킬을 몬스터도 아니고 던전에다 갖다 박았으니 몸이 버텨내겠어?]
이때만을 기다렸는지 성좌가 왁왁 쏟아냈다.
[게다가 봐!]
띠링!
성좌가 다시 상태창을 띄웠다.
“뭘 보라고? 미션이나 스탯은 그대로잖아.”
[그 밑에!]
[ 상태 이상 : 글라세로의 저주 (2/100) ]
“어라.”
[고작 하루 만에 수치가 1 올라갔잖아! 이건 우리한테 남은 시간이 100일밖에 없다는 뜻이야!]
“아니지, 이틀 빼면 98일이잖어.”
[승지야악! 너 자꾸 그럴래!]
“알았어, 알았어.”
승지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던전에 있으면 저주가 느리게 찬다더니 그렇지도 않잖아?”
[우리가 던전에 있던 건 몇 시간밖에 안 됐으니까. 그마저도 현실이랑 던전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서 크게 영향을 주진 못했을 거야.]
“저주를 늦추려면 한 몇 년간 던전에만 짱 박혀있으라는 소리야?”
[그럴 수만 있다면! 그리고 다른 사람들한테 도움을 요청해서 마왕을 무찌를 힘을 기르는 거야!]
“그게 말이 되냐.”
[다른 영웅들의 도움을 받으면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야!]
“차라리 내가 던전에 숨는 게 더 빠르겠다. 프레임 컨트롤로 던전이 위험해지기 전에 붙잡아두면 되잖아.”
[뭐어? 그게 더 말도 안 돼! 지금 네가 받은 페널티는 어쩌고!]
“던전이 나보다 강해서 받은 페널티잖아? 좀 약한 던전을 고르고 내가 충분히 강해지면 괜찮을 거 같은데.”
프레임 컨트롤로 던전의 변화를 무한히 지연시키면 정말 실현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물론 던전도 시간이 지날수록 위험해진다고 했으니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 받쳐줘야겠지만.
승지의 얘기에 성좌도 혹했다.
[으, 으음. 좋은 생각 같긴 한데…. 아냐. 그래도 안전한 던전 열쇠를 찾을 때까진 반대야!]
“하긴. 그게 낫겠지.”
지금 가진 고리는 던전이 랜덤으로 바뀌어서 보상을 얻기엔 좋지만 머물기엔 나빴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조력자야! 언제든 던전에 갈 수 있는 건 좋지만, 승지 너 혼자서는 오래 버티기가 힘들어! 동료를 구하자!]
“동료는 뭐 하늘에서 떨어지냐. 누구를 어떻게 믿어?”
[미스핏 길드원은 어때?]
“켁, 절대 아냐. 여기가 제일 수상한데다 약해 보여.”
[아니면 승지 네 친구들은? 각성한 친구 없어?]
……먼저 친구가 있는지부터 물어봐야하는 거 아니냐, 시발.
쪽팔려서 성좌한테라도 그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승지가 말을 돌렸다.
“중요한 건 던전이 얼마나 세지든 버티는 거 아니냐? 괜히 허접들만 잔뜩 몰려갔다가 누가 죽기라도 하면 더 귀찮다고.”
[그건 그러네. 그럼 어느 정도로 강한 사람이어야 좋을까?]
가장 먼저 머릿속에 유청이 떠올랐으나 성격상 순순히 도와줄 것 같지가 않았다.
다음에 만났을 때 인사나 받아주면 다행이지.
아니, 다시 만날 가능성조차 낮았다.
“각성자 랭킹을 보면 그나마 누가 센지 나올 텐데. 정보를 찾아보려고 해도 누가 핸드폰을 조져놨네?”
[아하핫! 그러니까 생각났는데 좋은 소식도 하나 있어!]
성좌가 황급히 얘기했다.
[네가 잠든 사이에 경매장에 올려뒀던 라드이안의 창이 팔렸거든! 그, 그걸로 승지네 집에 있던 물건들을 다시 사면 돼!]
“맞다. 그게 있었네.”
던전에서 요긴하게 써먹긴 했지만 라드이안의 창은 처음부터 팔 물건이었다.
경매장은 기본적으로 코인을 썼지만 당장 현실 돈이 급한 승지는 무조건 현금거래만 된다고 못 박아 놨다.
경매에 올리면서도 정말 이런 물건을 돈 주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엄청 고민했지.
막상 던전에 가보니 효과가 쏠쏠해서 현질해서도 사겠다 싶었지만.
아쉽긴 하네.
내가 방 보증금만 안 물어줘도 되면 그냥 안 팔고 썼을 텐데. 이게 다 성좌 때문이다.
이래저래 복잡한 생각을 하며 승지가 물었다.
“그거 얼마에 올려놨었지? 한 백만 원 쯤 되나?”
[삼천만원.]
“던전에서 쓸 때 딱 좋아서 팔기 아깝긴 하지만…… 잠깐 뭐라고?”
잠깐 놀러 나갔던 승지의 정신이 빠르게 귀가했다.
“얼마?”
[삼천만원!]
“당장 만난다고 해.”
덥석 미끼를 문 승지의 눈이 빛났다.
삼천만원.
평생 단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거금이다.
“진짜로 삼천만원을 주겠다고 했다고? 경매장에서도 사기 칠 수 있냐?”
[신이 직접 관리하는 경매장에서 거짓말을 했다간 페널티가 어마어마한걸! 거짓말은 아닐 거야!]
“그래, 그래야지. 와… 어떤 놈이 삼천만원이나 주고 무기를 산대?”
승지가 연신 감탄했다.
승지가 즐기던 격투게임에서는 현질요소가 상대적으로 적었기에 이런 거래가 몹시 신기했다.
어떤 알피지 게임에선 일억을 투자해도 돈 썼다는 취급도 못 받는 걸 알면 아마 더 놀라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