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세상이 망해갈 땐 일단 먹어 (1)
바스락. 와작와작.
소파에 앉은 승지가 씨리얼을 주먹으로 퍼먹으며 채널을 돌렸다.
”과연 알러트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90분 특별 편성 토론으로 진행됩니다.“
”솔직히 미션을 핑계로 각성자들이 지나치게 활개를 치고 있는 거 아닙니까? 국가적으로 강하게 나서줘야지요!“
”각성자들의 화폐로 알려진 코인은 환금 시 세금을 떼지 않습니다. 최근 2차 각성자들의 증가로 공공연한 탈세수단으로 이용되어 많은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솔직히 무서워요. 이렇게 싸우다가 각성자들이 다른 나라로 떠나 버릴까봐. 게다가 각성자는 아예 던전 속에서 살 수도 있다면서요? 그럼 우리는 누가 지켜주죠?“
삑.
새까만 화면이 된 TV에 험악한 표정의 승지가 고스란히 비쳤다.
”조졌네.“
승지가 빈 상자를 휙 내던졌다. 케로베로스야가 놀자는 줄 알고 헥헥거리며 다가와 상자에 코를 문질렀다.
범윤오는 자신 혼자서는 완벽하게 다른 랭커들을 상대하지 못할 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완벽하게 계획을 세우느니 쉴 새 없는 논란을 계속 만드는 쪽을 선택했다.
일명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냐? 전법이다.
있는 말 없는 말 다 끌어다가 계속 퍼트리는 데다가 심심하면 마왕의 부하들을 끌어와 현실에 풀어놓는 바람에 각성자들이 죽어라 고생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렇게 고생한 대가를 받지도 못했다.
범윤오가 무슨 짓을 했는지 괴물이 나타나도 메인 미션이 뜨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미션 보상도 없었고, 즉시 반응할 수도 없었던 까닭에 여론까지 계속 악화되었다.
물론 승지는 거기에 놀아나는 대신 원흉인 범윤오 추적만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성좌신은 아직도 아무 반응이 없냐?“
[으응. 내가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나타난 괴물들이 무언갈 부수거나 해치는 게 아니라서 미션이 안 나오는 거 같아!]
”말이 되냐, 시발. 인간들을 계속 납치해가는데.“
[각성자가 던전에 들어갈 때마다 미션이 뜨는 건 아니잖아.]
성좌가 조심스레 대화창을 띄웠다.
[예전에 성좌신은 우리가 먼저 접촉하기 전까진 구분을 못한다는 거 기억해?]
”기억 안 나.“
승지가 성큼성큼 거실을 가로질렀다.
그를 쫓아온 개들에게 사료 봉지를 뜯어서 건네준 승지가 냉장고를 열었다.
”어쨌든 성좌신의 눈에는 납치되는 건지 자발적으로 가는 건지 구분이 안 된다는 소리냐?“
[응. 바로 그 뜻이었어! 천재 승지!]
”무슨 신이 그러냐.“
우유를 꺼낸 승지가 뚜껑을 뜯어내더니 그대로 한 곽을 다 비웠다.
[…그런데 승지야.]
”왜.“
[요새 너무 많이 먹는 거 같지 않아?]
꾸득.
승지의 손에서 빈 우유 곽이 구겨졌다.
”내가 많이 먹는다고?“
[맛있게 먹는 거 같아서 얘기는 안 하려고 했는데…! 오늘 아침만 해도 밥 한 솥에, 반찬들이랑 닭 두 마리, 컵라면 세 컵에 사과 일곱 알, 젤리 큰 봉지, 그리고 방금 씨리얼이랑 우유까지 먹었잖아!]
쭉 나열하고 보니 확실히 많긴 많았다. 일 끝나고 회식했을 때도 저 정도로 먹어본 기억이 없었다.
승지가 여전히 납작한 배를 눌러보았다.
“원래 각성자들은 많이 먹어도 괜찮지 않냐?”
[그, 그렇긴 하지만 승지가 갑자기 이렇게까지 먹은 적은 없었는걸!]
[아무래도 이상해! 무슨 병에 걸린 게 아닐까! 헉! 안 돼!]
“그거 아니다.”
일단 부정했지만 확실히 이상하게 계속 허기진 느낌이긴 했다.
그렇다고 엄청 배고픈 것도 아닌데 뱃속에 집어 넣은 음식이 어디로 사라지는 기분이랄까.
[혹시…….]
[유월한테 차인 것 때문에 속이 허전해진 거야?]
“죽을래?”
[^^그건 아니구나! 취소!]
눈을 굴린 승지가 쓰레기통으로 우유곽을 던졌다.
던진 우유곽은 농구공처럼 쏙 들어갔다.
“모르겠다. 키라도 크려나 보지. 나이 먹고도 키 큰댔으니까.”
[으응? 하긴 승지 정도면 아직 성장기지! 아직 더 크고 싶은 거구나!]
“엉. 그렇다니까.”
승지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냉장고 문을 닫은 순간.
[ 성좌 연결도 상승! ]
간만에 성좌 연결도 상태창이 떴다.
[앗! 이번에도 우리 둘의 마음이 통했나 봐!]
“연결도 올라갔으면 저번처럼 역류 스킬이나 좀 써보….”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승지의 뒷말이 흐려졌다.
상태창이 처음 보는 색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 !경고! ]
[ 성좌와의 연결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
“뭐야? 왜 이래?”
이게 무슨 와이파이도 아니고 연결 상태 같은 개소리가 왜 나와?
성좌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어어?! 뭐지? 이런 얘긴 들은 적 없는데…!]
[ 성좌신의 기록을 재탐색합니다. ]
[ 현재 피아 식별이 불가능합니다. ]
[ 보호 불가능한 개체를 독립 상태로 전환합니다. ]
푸른색 상태창이 급박하게 연달아 떴다.
“뭐야! 뭔데?”
갑자기 오류 난 컴퓨터를 마주하는 것처럼 당황한 승지의 눈앞에 최후 통첩을 보내듯 커다란 상태창이 나타났다.
[ 성좌 연결도 : 0% ]
뭐?
당황한 승지가 붙잡을 틈도 없이 푸른 창이 공처럼 둥글게 뭉치더니, 작은 개체를 풋 하고 뱉어냈다.
마치 요정처럼 작고, 모자를 쓴 인형 같이 생겼다.
딸랑~!
엉겁결에 한 손으로 그걸 잡아내자 모자에 달린 방울이 맑은 소리를 냈다.
그보다 승지는 손에 잡힌 미묘하게 따듯한 온기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새끼손가락만한 살아있는 광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으아악?!”
“어어어어??”
“으아아아아악!!”
“컹! 컹컹!”
승지와 성좌가 함께 비명을 질렀다. 영문도 모르고 개들이 함께 신나서 짖어댔다.
경악한 승지가 말까지 더듬거렸다.
“너 뭐야! 너! 너 설마!”
“으아악?! 으악?! 나 왜 소리 지르고 있어?! 나 왜 소리 지르는 게 되는 거야?!!”
광대가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그 움직임이 정말 살아있는 거 같아서 기겁한 승지가 엉겁결에 손을 놓아버렸다.
“꺄아아악!”
“컹!”
주인의 손에서 떨어진 작은 장난감을 본 개들이 침을 흘리며 달려왔다.
놀자는 줄 안 것이다.
바닥으로 콩 떨어진 성좌가 비명을 질렀다.
“꺄악! 케로베로스야! 나야! 잡아먹으면 안 돼!”
“미친?”
“승지야! 승지야 살려줘!”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고 있던 승지가 아슬아슬하게 다시 광대를 집어 올렸다.
커다란 눈에 울망울망하게 눈물이 맺혀있었다.
“너무해! 정말로 잡아먹힐 뻔 했잖아!”
“너, 너 정말로 대역이냐?”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승지가 되물었다. 그러자 광대는 그 조그마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눈물을 방울방울
“응, 나야. 나야 승지야!”
감격한 광대가 승지의 손가락을 끌어안고 상체를 열심히 내밀었다. 승지의 코에다 뽀뽀라도 할 기세였다.
와, 돌겠다.
승지는 일단 광대를 붙잡은 손을 멀찍이 떨어트렸다.
“잠깐… 잠깐 생각 좀 하자.”
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광대는 혼자 감격으로 폭발할 지경이었다.
“승지야아… 나 지금 승지의 체온이 느껴져. 지금 살아있는 거 꿈 아니지?”
”제발 꿈이라고 해줘라.“
승지가 미친 듯이 혼란스러워했다.
멀쩡하던 성좌 연결도가 끊기더니 갑자기 튀어나온 이게 정말로 내 성좌라고?
하찮게 매달려 있는 조그마한 인간이 믿기질 않아 승지가 위 아래로 흔들었다.
”승지야아! 어지러워!“
”너, 능력 써봐. 성좌 맞아? 도대체 뭐야?!“
”아아알았어! 보여줄게! 인벤토리 나와라!“
성좌가 엄지에 꼭 매달린 채로 딸랑거리자 정말로 성좌가 열었던 것처럼 인벤토리가 열렸다.
”봤지! 성좌의 힘은 그대로야!“
광대가 뿌듯하게 웃었다. 그러나 보는 승지의 눈은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스킬 창은?“
”으응. 확인해볼게!“
광대가 중얼거리자 그의 앞에 조그마한 상태창이 뜨는 게 보였다.
원래 남의 상태창은 안 보여야 정상 아니었어?
그럼 정말로 자신과 이 조그마한 광대 녀석이 연결된 게 맞다는 건가.
광대가 꺅 소리를 냈다.
”다행이다! 승지 스킬이랑 스탯은 그대로야!“
전혀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승지가 광대를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 그게.”
광대가 머리를 흔들자 방울이 딸랑 거렸다.
“나도 모르겠어.”
“버린다.”
“꺄악! 꺄악! 협박하지 마! 진짜 모른단 말이야!”
승지가 정말로 창문에서 떨어트릴 것처럼 걸어가자 광대가 죽자고 비명을 질렀다.
“난 승지를 사랑해! 내가 승지한테 거짓말을 할 리 없잖아!”
”뭐.“
“꺄하하하하하!”
그 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고성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장 반응한 승지가 홱 고개를 돌리자 바닥을 뒹구는 큐라가 보였다.
“사! 사랑!”
큐라가 배를 붙잡고 깔깔거렸다.
“도저히 못 들어주겠네! 앞으로 감시할 때마다 이 생각나면 어떡해! 깔깔깔!”
승지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또 너냐?”
“아하하, 난 계속 여기 있었는 걸! 게다가 좋은 소식도 가져왔다구?”
”좋은 소식은 얼어죽을.“
승지의 손에 잡혀있던 광대가 얼른 팔을 휘둘러 인벤토리를 열었다.
때맞춰서 무기를 던져주는 걸 보니 모습이 바뀌어도 성좌다운 짓은 여전히 할 수 있는 모양이다.
쿠웅!
끝이 낫처럼 둥글게 변한 마왕의 무기가 뱀을 잡듯 큐라의 목을 찍어 눌렀다.
”네가 한 짓이냐?“
”하아… 한창 웃는 중에 매너 없긴.“
큐라가 웃다 흘린 눈물을 닦는 척 눈을 문질렀다.
”지금쯤이면 나올 거 같아서 데리러 온 거야.“
”뭐가 나와?“
”새끼 마왕.“
큐라가 느긋하게 광대를 가리켰다.
”마왕님 취향엔 아직 한참 모자라긴 하지만 입가심 정도는 되겠는 걸?“
지적당한 광대는 기함해서 발버둥쳤다.
“나, 난 마왕 아니야! 승지야! 오해야!”
“그냥 가만히 있어. 어차피 널 더 믿으니까.”
“허엉…! 승지야……!”
광대가 이모티콘 대신 본인의 표정으로 감동한 얼굴을 만들어냈다.
큐라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머, 너무하네. 간만에 진실만 말하고 있는데.”
큐라가 목이 눌린 상태로 몸을 빙글 돌렸다. 180도 돌아간 목이 징그러웠다.
“요새 범윤오 때문에 골치 아프지 않아?”
“아파도 내 두통이다.”
그러니까 꺼지라는 표현에도 큐라가 쿡쿡 웃어댔다.
“공교롭게도 우리 마왕님도 같은 두통에 시달리고 계시거든. 클랩 마왕님한테도 이번 일은 별로 달갑지 않아서 말이야. 대신 처리해 줄 마왕을 찾고 있어.”
”누구보고 마왕이래?“
“어쩔 수 없잖아. 마왕이 될 자격을 갖춘 사람은 드무니까.”
큐라가 은근슬쩍 미끼를 던졌다.
“왜 갑자기 성좌랑 당신이 그렇게 되었는지, 범윤오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이건 인간들 힘으로는 절대 모를 정보인데~.”
“승지야, 저 말 듣지 마! 나 큐라 싫어! 클랩 마왕도 싫어! 위험해!”
광대가 이제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걸 까먹고 속닥거렸다.
그러다 큐라의 시선을 받고 급하게 제 입을 틀어막았지만.
”흡!“
뱀처럼 성좌를 노려보던 큐라가 슬쩍 웃었다.
”강요는 안 해~. 범윤오를 도와주지 않는 마왕도 아직 많거든?“
”그래? 그럼 꺼져.“
승지는 더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 큐라의 목덜미로 날을 내리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