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우르릉 쾅쾅 (3)
번태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승재?”
“승지입니다. 채승지.”
“호오, 그렇군! 들었는데 발설하면 안 된다고 해서 아예 잊어버렸지!”
번태가 호쾌하게 웃었다.
“자신감이 아주 마음에 들어! 막타 먹겠단 욕심까지 말이야! 각성자라면 자고로 호승심이 있어야지.”
“게다가 난 어차피 마왕이 소환되는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지. 폭탄이라도 들려주고 대기시키는 거 어떻습니까?”
“아! 자네가 저주에 걸린 사람이었지! 나쁘지 않군.”
척하면 척 승지와 대화를 주고받던 번태가 슬쩍 발을 뺐다.
“하지만 지금의 자네는 약해. 류의건보다도 말이야.”
“아니, 랭킹 2위랑 비교하면 당연히….”
“어허! 랭킹은 숫자에 불과해!”
랭킹 1위가 참으로 설득력 없는 소리를 했다. 승지가 미간을 좁히며 멋진 자세를 취하는 번태를 쳐다보았다.
내용도 내용인데 굳이 저러고 말해야 되냐고.
식탁에 발을 올리고 탐험가 자세를 취한 번태가 덴티큐 인사를 날렸다.
“하지만 마왕과 싸우고 싶다면 전장엔 붙어있을 만큼은 키워주도록 하지!”
“뭐? 무슨 수로?”
“나 번태일세!”
콰과광! 다시 번태의 머리 뒤로 번개가 쳤다. 특수효과에 너무 진심인 인간이다.
“자네의 실력을 책임질 만큼의 능력은 있는 사람이야!”
[와아아! (´∇ノ`*)ノ멋져!]
묘하게 설득당하네.
왜 어둑시니 길드원들이 길드장을 따르는지 알 것 같았다.
번태가 덧붙였다.
“혹시 모를 잠재력에 따라서는 정말로 글라세로의 막타를 맡길지도 모르지! 기대되지 않나!”
“그렇다면… 뭐. 알겠습니다.”
훈련인지 뭔지에 가서 내 실력을 보여주면 되겠네. 승지는 납득했다.
유청은 랭킹 1위와 노는 승지를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그럼 어둑시니 길드에서는 몇 명이 지원을 나올 수 있는 겁니까?”
“으음, 한 백 명 정도 이번 일을 도울 수 있을 걸세!”
“어둑시니의 지원에서 저격수까지 제외하면 지상을 맡아줄 사람이 너무 적군요.”
“글라세로의 부하들은 대부분 지하에서 서식하는 족속들인데 곤란하네요.”
“길드 하나만 더 끌어들일까요?”
“지금도 비밀리에 하는 것치고는 숫자가 많은데.”
“어.”
대화를 듣고 있던 승지가 난데없는 소리를 냈다.
“나 아는 각성자들 있는데. 전투계열로.”
“당신이요?”
“내 인맥에 불만 있냐?”
유청이 어쩔 수 없이 다물었다. 최자림이 눈을 반짝거렸다.
“오오 승지 씨! 믿을 만한 분들인가요? 강한가요!”
“제법 강할걸? 그런데 이번 일에 투입하려면 나랑 같이 그 훈련을 한 번 받아야 할 거야.”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인가요?”
“글쎄, 그건 모르겠는데 실전 경험이 부족해서. 화력 하나는 확실하거든.”
승지는 기억을 떠올려가며 장담했다. 유월도 관심을 보였다.
“어디 계시는 분들인데요?”
* * *
코스모스 센터.
승지에게 설명을 들은 글라세로 대책 본부는 모두 함께 센터로 이동했다. 또 누가 자신을 부른다며 사라진 번태만 빼고 말이다.
덕분에 번태에게 1회용 소환부를 잔뜩 받은 최자림만 신나서 팔에 주렁주렁 시계를 달았다.
“정말 그러고 가실 거예요?”
“멋있잖니!”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 잘 보이려면 제정신으로 보여야 할 거 아니에요.”
“멍청아. 그런 소리 하지 마.”
승지가 주의를 주었다.
흠. 센터 간판이 깨끗해졌네. 납치당했던 이후로 돈이 좀 생겼나?
보안 업체도 바꿨는지 기껏해야 쇠창살만 걸려있던 대문이 제법 튼튼해졌다. 잠깐 낯설게 둘러보던 승지가 벨을 눌렀다.
딩~동.
“누구세요?”
“나….”
“어? 승지 씨? 승지 씨죠!”
말하기도 전에 아네.
벨을 누르자마자 화면 너머가 시끄러워지더니 곧장 덜컹 문이 열렸다.
그러더니 오조희가 치맛바람으로 달려 나왔다. 일단 환자복은 아니라 다행이네.
“승지 씨!! 무사하셨군요! 걱정했어요!”
“난 네가 더 걱정이다.”
핀잔을 준 승지가 달려드는 오조희의 팔뚝을 붙잡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쓰러지던 기억이 워낙 강렬하다 보니 촐랑촐랑 다니는 게 불안했다.
“페널티는? 다 사라졌나?”
“네! 다 해결했어요! 머리 염색하셨네요! 까만색도 근사하세요!”
“다시 원래대로 바꿀 거야.”
“저희도 소개해주세요!”
승지가 오조희랑 대화하는 걸 신기하게 보고 있던 최자림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 이쪽은 아는 길드 사람들인데 이번에 내 일을 도와주려고 왔거든.”
“세상에. 다들 랭커시잖아요. 류의건 각성자님! 청월량 길드장님, 미스핏 길드 간판까지….”
“간판? 누가?”
“당연히 저죠!”
최자림이 윙크했다. 승지는 그냥 못 들은 걸로 치기로 했다. 승지가 뒷목을 긁적였다.
“아무튼 이번에 큰일이 생길 건데 여기 센터 사람 좀 쓸 수 있을까 해서.”
“승지 씨. 어려워하지 마세요.”
오조희가 싱긋 웃었다.
“저흰 언제든지 승지 씨 편이 되어드린다고 했잖아요.”
오조희가 보내오는 신뢰는 너무도 굳건해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뒤에 있던 사람들은 몹시 뜻밖이라는 속내를 감추지도 못했다.
내가 이렇게 신용이 있는 사람이야.
오조희가 말했다.
“마침 할 얘기도 너무 많아요. 들어오세요. 저번에 알러트에서 탈출한 이후로 많은 게 바뀌었거든요.”
“알러트요?”
“알러트!”
갑자기 유월과 유청이 동시에 앞으로 튀어나왔다.
“자세히 말씀해보시겠습니까?”
“알러트에 납치되었던 게 당신들이군요!”
“자자, 여러분 진정하세요. 일 얘기가 먼저죠.”
최자림이 자연스럽게 유월과 유청의 가운데로 파고들어 팔짱을 꼈다. 그런데도 쌍둥이의 시선은 오조희에게만 집요하게 꽂혀있었다. 좀 무섭군.
오조희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조금 물러났다.
“아…무튼 그 때 이후로 센터 사람들이랑 미션을 함께 나가면서 실습 중이에요.”
“알러트에 잡혀있었을 때 보스 얼굴을 봤다면서?”
“네?!”
“예!?”
기껏 붙잡아둔 유 쌍둥이가 요동을 쳤다.
“어떻게 생겼습니까? 키는? 체격은?”
유청이 시끄럽게 떠들었다.
“어떻게 생겼습니까? 키는? 체격은?”
유월은 정확한 질문만 쏙쏙 날렸고.
[……승지야, 얼굴 힘 풀린다.]
보다 못한 성좌가 한 소리 했다.
“얼굴은 가려져 있었어요. 무슨 스킬이나 아이템 같던데… 그것도 꽤 중요하겠죠? 키는 승지 씨랑 비슷했어요.”
쌍둥이답게 둘의 머리가 칼군무처럼 승지를 향했다.
유월이야 그냥 키를 확인하려고 그런 거겠지만 유청은 무슨 음모론자 같은 낯짝이다.
저 자식 눈깔을 그냥, 콱.
유청이 재빠르게 말했다.
“이번 미션이 끝나고 꼭 자세히 얘기해주시길 바랍니다.”
“청월량 길드에서 사례하겠습니다.”
“증언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무슨 미션인지 알 수 있을까요? 승지 씨 서브 미션인가요?”
“훨씬 나쁜 거야.”
승지가 마왕의 저주와 지금까지 자신이 겪었던 일을 얘기해주는 동안 오조희는 멍하니 듣기만 했다.
“저 사람이 승지 씨를 죽였다고요?”
커피를 타오던 유청이 시선을 내렸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유청이 뜨거운 물을 쓰게 하겠냐고 말리던 오조희는 완전히 그와 거리를 두고 말았다.
“유청 각성자님의 팔이 잘린 건 몬스터나 미션 때문 일줄 알았는데…….”
“그렇게 됐다.”
승지는 담담하게 넘어갔다.
“아무튼 이제 저건 내 머슴이니까 상관없는데, 다른 길드 몰래 마왕을 사냥하는 거라 많이 위험할 거야.”
“아니에요.”
오조희가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흰 그 때 죽을 운명이었어요. 승지 씨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이성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다 하나씩 끔찍하게 다쳤겠죠.”
“과장이 심하네. 뒤에 류의건도 나타났잖아. 어차피 구해졌을 거야.”
“막연히 누군가 구해주길 기도하는 것과 정말로 구하러 올 사람이 있다고 믿는 건 달라요.”
오조희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그 사람이 정말 나타났을 때 느끼는 희망은…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는 걸요. 이젠 저희가 승지 씨를 도와줄 수 있다니 기뻐요.”
오조희의 말에 호감을 느꼈는지 유월이 꽤 순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여기선 몇 명을 지원해줄 수 있습니까?”
“30명은 일단 확실해요.”
“헉, 많은데요?”
작은 센터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을 차출해낼 줄은 몰랐는지 일행이 놀라워했다.
승지만 조금 다른 의미로 놀랐다.
“전에 봤던 일행 전부 다 오겠다고?”
“네. 저흰 준비 됐어요. 들어오세요, 선생님들.”
달칵. 문이 열리며 기다리고 있던 센터 인원이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승지 씨다!”
“우리 구해준 승지 씨다!”
“안녕하세요!”
“우리 언제 출발해요?”
승지가 인사 대신 손을 흔들어주었다. 센터 사람들이 활짝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좋아. 미션 전에 손이나 한 번 맞춰보자. 랭킹 1위가 버스 태워준다고 했거든.”
“버스요?”
“아, 너 게임 안하는구나. 실력 향상을 위한 특별 훈련이라고.”
명색이 랭킹 1위인데 처음 얘기했던 인원보다 30배 정도 많아져도 괜찮겠지.
그리고 실제로도 번태는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번쩍!
최자림이 다시 불러낸 번태는 불어난 머리통에도 태연했다.
“좋아! 이 인원 그대로 던전으로 데려가면 되나!”
“우와 랭킹 1위다!”
“사인해주세요!”
“물론이지! 무슨 색 사인펜으로 해줄까! 난 24색 매직을 항상 들고 다니지!”
그러자 대체 어디서 틀어놨는지 노래 24k magic까지 흘러나왔다
미친. 배경음악까지 준비해뒀다고? 컨셉도 이정도면 예술이다.
번태가 사인을 휘갈기는 동안 문득 승지가 물었다.
“던전하니까 생각났는데 너 나한테서 훔쳐간 열쇠장이의 고리는 어떻게 했냐?”
“…승지 각성자님 가족에게 돌아갔을 겁니다.”
“가족?”
뜬금없는 단어에 승지의 미간이 굳었다.
“비각성자한테 이세계 물건을 막 넘겨도 되는 거야?”
“저도 같은 이유로 반대했습니다만, 류의건 각성자가 고인의 물건이라는 이유로 강력히 반환을 주장했습니다.”
유청은 자기도 아깝다는 표정이었다.
저 놈 손에 계속 있는 것보단 낫지만. 쳇, 귀찮게 됐네.
하긴 그 때 류의건한테 다시 넘어갔으면 돌려달라고 하기도 애매했을 거다. 날치기했던 원래 주인이라.
가족들 얼굴을 다시 봐야 하는 것만 빼면 그나마 가장 잘 된 길이었다.
“승지 씨가 주인이었으니 가족들에게 돌려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물건이긴 하지만, 비각성자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을 팔 수 있으니까요.”
“…그런 물건은 함부로 시장에 나돌아 다녀서도 안 됩니다. 자칫하다 알러트의 손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유청이 뭐라고 궁시렁거렸지만 승지는 한 귀로 흘려 넘겼다.
“팔진 않았을 걸. 아무튼 알았다. 나중에 가지러 가야겠네.”
“그럼 이번 던전은 내가 결정하면 되는 건가?”
사인을 마친 번태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인벤토리 열어주게!”
쩔그렁. 그가 인벤토리에서 묵직한 열쇠뭉치를 한 다발 꺼냈다.
“그럼 원하는 던전을 골라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