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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물 싸대기 (2)

[끼에에엑!]

마왕 대신 성좌가 비명을 내질렀다.

[미쳤어! 미쳤어어!! 승지 너 대체 왜 그래!!]

“와 씨, 바위 때린 거 같아.”

승지가 얼얼한 손을 마구 흔들었다. 크기는 커도 사람처럼 생겼기에 가죽 느낌이 날 줄 알았더니.

광포하게 벌어져 있던 마왕의 진하고 두꺼운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반응 오나?

그러나 마왕의 눈은 여전히 뒤집어진 채였다. 젠장, 이 괴물을 어떻게든 돌려야 물의 흐름이 바뀐다.

승지의 계획은 단순하고 무모했다.

역방향으로 노저어갈 힘이 부족하면 마왕의 대가리를 돌려 U턴을 시키면 될 거 아닌가!

그 순간 흐름을 탔다는 말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뭐빠지게 튀는 거지만.

승지가 짝 짝 제 뺨을 때렸다.

“안 되겠다, 야. 뺨다구 때리는 거로는 부족하네.”

[제발 말 좀 하고 행동해줘! 나 정말 승지를 알다가도 모르겠어!]

“평소에는 네가 더 심하거든?”

갑자기 나타나서 각성자로 계약해버리고, 튜토리얼부터 이세계로 보내버리질 않나, 변신을 시키지 않나.

따지고 보면 사람 심장 떨어트리는 짓은 제 성좌가 더 많이 했다.

승지는 구불거리는 머리털을 쫙쫙 잡고 내려왔다. 과연 마왕이라 어깨도 울룩불룩 근육이 튼실했다.

넓구만.

혹시라도 우주로 굴러떨어질까 봐 머리카락 한 줄기를 주먹에 감아놓은 승지가 다시 마왕을 후려쳤다.

빠악!

[ 2콤보! ]

제대로 턱주가리를 갈겼지만 마왕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훌쩍거리던 성좌가 슬쩍 대화창을 띄웠다.

[이래도 안 일어나네. 잠든 사자의 코털을 뽑으면 깬다던데 혹시….]

“싫어!”

이딴 마왕 코털 뽑아주려고 내가 저 놈들 뒤치다꺼리 시작한 줄 알아!

마왕 피우는 여전히 그의 몸에 올라온 인간 따위는 개의치 않는 듯 소리 없이 울부짖으며 날아갔다.

다른 나라 파란 요정은 소원을 세 개씩이나 들어준다는데 이세계 파란 마왕은 머리 하나도 못 돌려 주냐, 망할.

“애초에 이 새낀 왜 물을 끌고 날아다니는 거야? 비가 싫으면 어디 땅굴에나 처박혀있지.”

[그건 나두 몰라.]

성좌가 조금 망설이더니 덧붙였다.

[마왕이 되려면 간절한 소원이 있어야해. 본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 소원. 그걸 이루어주는 순간 마왕으로 변모할 수 있어.]

한 번 승지에게 과거를 들켜서 그런가. 이제는 성좌에게 따로 묻지 않아도 본인이 알아서 잘 얘기했다.

마왕의 수염을 올려다본 승지가 되물었다.

“그럼 네가 소원 비는 역할이었던 거냐?”

[응. 다나우는 거의 내 소원을 이뤄주기 직전까지 갔었어. 하지만 내가 죽고 말았지.]

와드득!

팔에 힘을 준 승지가 마왕의 수염을 뜯어냈다.

[히이익! 그리고 제발 무모한 짓 좀 그만해애애! 수염도 없는 내 턱이 다 아파아아!]

“이래도 안 돌아봐?”

승지가 털을 휙 버렸다. 이번에는 제대로 먹혔다.

“…인간…….”

“뭐야, 말할 줄 알잖아?”

굳이 말을 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피우의 입안은 바싹 말라 쪼그라들어 회색빛이었던 것이다.

바짝바짝 떨어지는 마른 피부를 본 승지가 기겁했다.

우왓, 징그러워.

[히에엑! 히엥에에! 어떡해!]

드디어 마왕이 승지를 인지하자 성좌는 거의 기절 직전까지 몰아갔다.

승지는 지금이다 싶어 마왕을 유인했다.

“어이! 마왕! 이쪽이다!”

여전히 마왕은 흰자위를 뜨고 있었지만 보일 거라 믿고 승지가 머리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마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우풉!”

요동치는 물줄기가 역류했다. 드디어 승지의 존재를 알아차린 피우가 직접 움직이는 대신 물줄기만 쏘아 보낸 것이다.

그대로 쭉 밀려난 승지가 풍덩 물에 빠졌다.

젠-부글부글-장!

얌전히 있는 물에 빠진 게 아니라 미친 듯한 속도로 쓸려가는 물줄기에 빠진 거라 순식간에 뒤로 밀려갔다.

[아아앗 안 돼! 승지 수영 못하는데!]

내 말이 그 말이다!

정신없이 떠내려가던 승지의 몸이 어느 순간 구출되었다.

촤아앗!

“괜찮으세요?”

“푸하!”

승지를 붙잡은 선원이 급하게 배를 눌렀다. 한 바가지는 되는 물을 토한 승지가 기침을 쏟아냈다.

“어떻게… 콜록, 안 거냐?”

“갑자기 물이 잠잠해져서 떠내려 오는 게 보였습니다!”

물이 잠잠해져?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스쳤다.

보통 그건 더 큰 게 올 때 나타나는 현상 아니냐?

승지의 바람대로 마왕이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 바람에 그를 따라가던 물줄기의 방향이 급선회를 해 지금 그들이 떠있는 부분이 잠잠해진 것이다.

꾸릉, 구르르릉.

해일처럼 위를 향해 솟구치는 물을 본 승지는 지쳐있을 여력도 없이 일어났다.

“돛, 돛을 펴야 해.”

“예?”

“딱 봐도 공격하려는 건데 지금 여길 빠져나가려면 기회는 저것밖에 없어. 차라리 저걸 맞고 그대로 날아간다!”

“하, 하지만 그러다 배가 부서지면요!”

“안 맞아도 어차피 죽어!”

승지는 급하게 밧줄을 당기는 선원을 향해 뛰었다. 저렇게 비리비리한 놈들에게 맡겨놓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산처럼 솟아오른 물줄기가 그들을 향해 쇄도했다.

쿠아아아앙!

찢어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그들의 배가 앞으로 비산했다.

“으아아아!”

“아아아악!”

엄청난 충격에 선원들이 밀려 나갔다.

이를 악문 승지가 배를 상대로 프레임 컨트롤을 펼쳤다.

[ 대상이 너무 강력한 영향력을 받고 있어 프레임 컨트롤 스킬을 오래 지속할 수 없습니다! ]

경고창이 매섭게 날아왔다.

물줄기에 휩쓸린 배는 억지로 멈춰버린 충격으로 벌써부터 덜덜 떨리고 있었다.

물속을 억지로 걸어간 승지는 뇌가 눌리고 기절할 것 같은 감각을 참아냈다.

[승지야 숨 쉬어!]

성좌가 급하게 승지의 코와 입을 감싸듯 인벤토리를 펼쳤다.

“허억…!”

승지가 간신히 인벤토리를 통해 숨을 토해냈다. 호흡은 통하게 됐으나 미친 듯한 부담감이 몸으로 밀려왔다.

[그러다 정말 죽을 거야!]

“말 시키지 마.”

말할 힘도 아깝다!

승지는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 속에서 다 펼쳐지지 못한 주 돛을 펼치고 난간에 매달린 선원들을 붙잡아왔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듯 했으나 기어이 제 몸 하나 간수할 수 없었던 선원들을 갑판 안에 처넣었다.

그 중에서 시킨 대로 계속 해골 눈알을 쥐고 있던 선원에게서 눈알을 빼냈다.

급류에 휘말렸어도 해골 눈알은 여전히 단 하나의 방향을 가리켰다.

물속에서 부러질 듯이 당겨진 돛대를 본 승지가 거의 기어가듯이 뱃머리로 걸어가 틀어진 방향을 힘으로 바꿨다.

젖 먹던 힘, 아니 태어날 힘마저 모두 짜낸 것 같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승지가 고꾸라졌다.

이제 남은 건 운에 달렸다.

승지가 스킬을 해제하자마자 진행을 방해받아 더욱 분노한 듯한 물줄기가 그들의 배를 떠밀었다.

간발의 차로 성좌가 급히 승지를 인벤토리 안에 삼키고, 남은 자리를 밀어닥치는 물이 모두 차지했다.

콰과과광!

* * *

거스 대왕은 원래 은혜를 아는 사람이다.

채승지가 거대 스켈레톤에게서 자신을 구해줬을 때만해도 기꺼이 자신의 왕국에 데려가 큰 상을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를 만난 이후로 이렇게 일이 꼬일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가둬두려고 결심하는 편이 나았으리라.

“…오, 오오….”

거스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신의 심판자를 보고 사시나무 떨 듯이 떨었다.

신의 심판자는 마왕, 악수, 사악한 악당을 모두 처치하여 세상을 올바르게 만드는 자였다.

그가 가진 엄청난 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꺼려하지 않았는데, 인류를 위해 헌신하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일단 한 번 만나보기도 어려웠고.

거스도 막연히 이야기 속 영웅처럼 신의 심판자가 행동하리라 생각해왔다.

그러나 실물로 만난 신의 심판자는 그런 영웅담에 나올 법한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사람의 뼈를 썰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은 저 팔! 모든 부정한 것들을 내려다보는 저 키!

그리고 보는 자들로 하여금 가장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두터운 철가면이 모든 변명을 차단하듯 씌워져있었다.

내가 저런 분에게 함부로 말을 걸고 방종한 짓을 벌였다니!

거스는 땅을 치고 후회했다.

응? 그런데 내가 채승지를 따라가서 만난 신의 심판자는 저렇게 생기지 않았는데.

이상한 집에서 만난 신의 심판자는 단순한 이야기 속 영웅처럼, 아니 그것보다 훨씬 잘생긴 인간이라 더 스스럼없이 굴 수가 있었다.

헌데 분명 동일인물이건만 왜 다르게 생겼지? 그리고 다르게 생긴 둘인데 왜 난 그 인간을 신의 심판자라고 생각했지?

자신의 인식에 의아함을 품을 틈도 없이 철가면을 쓴 얼굴 밑으로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누구냐.”

“과, 과인은 아스파라 왕국의 17대 왕, 거스라고 하옵니다.”

“이 여자도 거기서 왔나?”

알아서 넙죽 엎드린 거스가 슬쩍 눈을 굴렸다. 자신과 같이 온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미인이 심판자의 뒤에 서있는 게 보였다.

“저 사람은 다른 별에서 왔사온데, 무슨 별인진 저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사옵나이다.”

상대가 신의 심판자라도 거스의 괴상한 말투는 변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이상한 말을 가르쳤던 유청이라는 인간과 저 미인이 닮았다는 사실도 눈치 챘던 거스가 덧붙였다.

“아마 이름이 유청… 비슷할 겁니다.”

“#@@#.”

거스의 말을 듣던 여자가 유청이라는 말은 알아들었는지 끼어들었다.

“유#@.”

거스는 감히 심판자가 있는 자리에서 대화를 가로막은 그를 보며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애초에 신의 심판자는 인간들과 별로 친하지 않는 불세출의 영웅이 아니었나?

그런데 신의 심판자와 나란히 같이 걸어오는 것도 이상하고, 자신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신의 심판자를 보고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게 희한했다.

빤히 뜬 눈으로 자신을 가리킨 그가 반복했다.

“유#@.”

“유얼?”

거스가 더듬거리며 따라하자 그가 적당히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신의 심판자는 통성명에는 관심이 없는지 지금까지 잡고 있던 것을 앞으로 내보였다.

“꺅!”

“이 인간에 대해선 알고 있나.”

곱슬거리는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온 인간 여자였다.

혹시나 자기 별 사람인가 해서 살펴보던 거스는 생판 다른 인종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보는 인간입니다만?”

“마무자의 신전에서 잡힌 드래곤의 추종자다.”

곱슬머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약간 원망스러운 듯이 신의 심판자를 올려다보는 듯 했다.

“원래 목표였던 영혼은 이미 정화를 마치고 드래곤에게 갔다.”

“그, 그럼 임무 다 끝난 거로군요!”

신의 심판자를 상대하는 일이 슬슬 버거워진 거스가 얼른 그를 보내버릴 심산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떠나지 않으시는 겁니까?”

“…….”

신의 심판자는 대답대신 갑자기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위에 뭐가 있나.

힐끔힐끔 덩달아 머리를 따라 든 거스의 눈에는 이상할 게 하나도 없어보였다.

그저 어디서 또 날아온 피우 마왕이 남긴 물길이 하늘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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