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모든 일의 예고편 (2)
잊고 있던 버프가 갑자기 활성화 되었다. 숲의 가호가 뭐였지? 성좌가 정신 사납게 떠들어 답했다.
[로이에르의 힘이야!]
[식물에서 추출한 독 면역!]
[승지야! 입을 가려!]
“어차피 난 면역이라며!”
승지가 드르륵 의자를 끌며 일어났다. 독의 진원지부터 빨리 찾아내야 했다.
사라설과 유청은 아직 뭔가 입에 댄 적도 없으니 분명히 공기 중으로 살포된 독일 것이다.
그럼 바깥으로 퍼지기 전에 막아야…!
“그럴 필요 없다.”
우뚝, 승지가 멈춰 섰다.
고기가 타며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유일하게 서 있는 형체가 보였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한 등장이었으나 이후에는 결코 침묵할 수 없는 존재였다.
머리가 큰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바닥으로 드리웠다. 양 옆으로 튀어나온 둥근 뿔이 도드라지며 만들어낸 착각이었다.
사람의 형상을 절반만 훔쳐다 놓은 염소의 눈이 머리가죽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순간 차가운 물 한 방울이 목덜미에 떨어지듯, 척추가 긴장하며 오그라들었다.
“너 뭐야.”
“아무도 죽지 않는다.”
염소 머리를 한 인간이 말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자세히 보니 실제로 염소 머리를 가진 게 아니라 가죽을 뒤집어쓴 채 연결부를 목에다 꿰매놓은 형상이었다. 두껍고 붉은 매듭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 불룩했다.
“너에게 제안을 하러 왔다.”
“…클랩의 부하냐?”
승지는 간신히 상황을 이해할 만한 질문을 떠올렸다.
그러자 염소 머리가 잇몸까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클랩은 나의 주인이 아니다.”
“생긴 꼬라지를 보니 마왕 죽창 맞은 새끼들 중 하나인 건 확실한 거 같은데?”
“우리의 왕은 다른 곳을 바라보지.”
염소 머리가 고개를 돌렸다. 길게 뻗은 흰 주둥이 가죽에서 파리가 끓었다.
한 쪽으로 돌아간 납작한 동공이 승지를 비췄다.
“지금은 너를 보고 있다.”
“무슨 뜻이냐. 썅, 알아먹을 수 있는 표현으로 말해.”
“네가 마왕을 죽이는 것을 보았다. 네가 드래곤을 키운 것을 보았다. 네가 저주를 받는 것을 보았다.”
승지의 미간이 구겨졌다.
우연히 나한테 소용이 없는 독을 쓴 게 아니라 일부러 그런 독을 살포한 건가?
나한테 숲의 가호 버프가 걸려있다는 걸 알아서?
하지만 염소 대가리가 언급한 일들은 모두 한참이나 과거에 일어난 일이다. 그땐 자신의 존재조차 모르던 놈들이 뭘 어떻게 보았다고 하는 건지.
승지는 성좌가 마지막으로 대화창을 띄웠던 곳을 흘긋 곁눈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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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어있는 대화창이 떨리기만 할뿐, 성좌는 아무 말도 띄우지 못했다.
“헬바티아가 너의 소식을 모든 왕에게 전했다. 이제 그들은 별을 넘어 이곳으로 올 것이다. 느리든 빠르든 비참과 비장함을 가지고.”
망할 인형 새끼.
벌써 다 말했지롱 이라고 말한 게 글라세로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었냐고. 어쩐지 그날 유난히 기분이 더럽더라니.
승지는 자꾸만 뒤로 물러나려는 몸을 억지로 채찍질하듯 거칠게 말했다.
“시간이 안 맞잖아, 이 멍청한 새꺄. 헬바티아가 날 본 건 내가 마왕을 죽이기 전의 일인데?”
“신에게 시간은 중요치 않지.”
염소 머리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성좌신을 섬기는 자들이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감읍하라. 너는 드문 두 번째 기회를 얻었으니.”
“아니 씨발 알아듣게 얘기하라니까.”
“모든 왕이 제안을 가지고 있다.”
염소 머리는 알아들을만한 소리는 바로 그 제안이 해줄 거라는 듯 이빨 사이로 숨을 쉬었다.
“하지만 어떤 제안도 우리의 왕이 제안하는 것보다 좋지 않을 것이다.”
따그락!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가 바닥에 부딪쳐 갈라졌다. 염소 머리의 손바닥에서 열쇠 하나가 떨어졌다.
승지는 눈동자만 움직여 열쇠를 보았다. 간신히 뼈대만 남아있는 듯 마르고 새까만 열쇠였다.
“무한한 영광을 영접하라. 그리고 받아들이라.”
“…….”
“성좌신이 갈가리 찢길 그날까지.”
염소 머리가 쭈욱 상체를 뒤로 당겼다. 사람의 상체치고 지나치게 긴 허리를 따라 거대한 염소 머리가 순식간에 작아지더니, 가게 안을 떠돌던 연기가 빨려들었다.
치이이익.
잠시 후, 비로소 들리지 않던 소리가 사방에서 다시 터져 나왔다. 염소 머리가 독을 회수하며 사라진 것이다.
그제야 극도의 긴장에서 풀려난 몸이 불판 위에서 새카맣게 타버린 고기의 냄새나 지글거리는 소리를 잡아냈다.
“…헉? 고기가?”
“뭐야! 언제 이게 다 탔지?”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염소 대가리가 말한 대로 그들은 자신이 중독된 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라설도 어리둥절하게 엎어져있던 탁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라 이상하네. 제가 언제 미끄러졌었죠?”
“갑자기 탄내가 진동을 하는군요.”
유청까지 상황파악을 못하고 한 마디 했다. 갸웃거리던 사라설이 승지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세상에! 승지 씨? 왜 그렇게 식은땀을 많이 흘리셨어요?”
“…사이비를 봐서.”
승지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미 모든 식욕이 날아간 지 오래였다. 승지는 턱을 움켜쥐고 계속 튀어나오려는 쌍욕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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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는 아직까지도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띄우지 못했다. 나조차도 손이 떨릴 정도니, 젠장!
잘근잘근 입술을 씹던 승지가 울컥 내뱉었다.
“마왕 말이야.”
“네?”
“몇 놈이나 있댔지?”
“살아있는 마왕에 대해서 물어보시는 거죠?”
사라설이 금세 학회에서 발표를 하듯 능숙하게 설명했다.
“살아있다고 알려진 스물일곱 명의 마왕 중에 저희 세계에서 던전 열쇠가 발견된 마왕은 딱 아홉 명이에요. 일단 승지 씨가 없애신 글라세로, 마무자, 헬바티아, 나르키스, 피우, 부르그골, 정쯔안, 쟈링고, 클랩이 있죠!”
“이름들이 왜 이렇게 중구난방이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 짓거나, 고어 연구 끝에 가장 원문에 정확한 발음을 추정해낸 결과예요!”
“류의건 각성자의 성좌를 추적하는 마왕이 바로 부르그골입니다. 쟈링고는… 당신이 아는 그 사건에서 나온 마왕이고요.”
유청이 달갑지 않은 얼굴로 설명했다. 유량을 괴물로 변하게 만든 마왕이 쟈링고였군.
머슴과 류의건이 마왕 한 놈씩 달았다고 성격이 괴랄해진 걸 생각해보면, 내가 글라세로를 잡은 건 사실 일이 엄청 쉽게 풀린 건가?
승지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던전 열쇠 중에서 가늘고 새까만 열쇠는 어떤 마왕 던전인지도 알아?”
“가늘고 까만색이요? 으음, 글쎄요. 붉은 색이 섞여있나요? 아니면 끝이 뾰족한가요?”
“둘 다 아니야.”
승지는 직접 바닥에 있는 열쇠를 보며 대답했다. 고민하던 사라설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으음, 그럼 저도 모르겠어요. 그런 열쇠도 새로 발견됐대요?”
“…아니.”
승지는 부정했다.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었다.
염소 대가리가 말한 왕이 지금 이름이 나온 마왕에 해당이 안 되면 젠장. 완전 새로운 놈이라는 거잖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젠장, 마왕이 대체 왜 그렇게 많아! 그걸 언제 다 잡냐고!”
“왜 갑자기 화를 냅니까?”
“이세계를 복구하는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겠죠?”
유청의 말에 변호하듯 사라설이 대답했다. 하지만 승지가 대답을 하지 않아서 잠깐 지글거리는 소리만 날 뿐 조용해졌다.
마지못해 유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쨌든 하나는 잡았으니 나머지도 곧 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먼저 먹어라.”
계속 열쇠로 돌아가는 시선을 버티지 못한 승지가 다시 일어섰다.
“승지 씨?”
“어디 가십니까?”
“따라 오지 마. …담배 피우러 간다.”
승지의 말에 두 사람이 납득했다. 그는 일어서면서도 바닥에 여전히 떨어져있는 검은 열쇠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워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승지가 가게 뒤쪽으로 나가자 드디어 성좌가 띠링 대화창을 띄웠다.
[왜 거짓말했어? 승지는 담배 안 피우잖아.]
“그럼 거기서 왜 나가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 하냐?”
[화장실 간다고 하면 되지!]
……맞는 말이네. 승지의 표정이 구겨졌다.
“에라이, 그것도 길어지면 똥 때리는 줄 알 거 아니야.”
[푸핫! ฅ(˃̵ސ˂̵)ฅ ]
좋아, 일단 웃겼군. 이모티콘까지 쓰는 걸 보니 많이 진정했다.
쓸데없는 말로 성좌를 느슨하게 만든 승지가 기습적으로 물었다.
“너네 세계에서도 마왕들이 저런 꼴로 나타났냐?”
[…방금은 마왕이 아니고 부하였잖아? 모두가 나타날 수 있던 건 아니었어.]
“우리보단 많이 봤을 거 아냐. 대체 어쨌길래 그쪽에서 해결 못하고 여기까지 와서 깽판을 쳐?”
[우리도 정말 해결하고 싶었는걸! 하지만 마왕이 침략을 거듭할수록 밀려나던 세계가 결국 이곳에 도달한 거야. 승지라는 이름의 희망을 발견한 거지!]
성좌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끼워 넣으며 능청을 떨었다. 승지가 헛웃음과 함께 말했다.
“말을 잘한다. 그럼 성좌 없이 바로 각성자한테 힘을 주지 그랬냐.”
[에이, 어렵지~! 갑자기 마왕이랑 싸우라고 하면 잘 할 수 있었겠어?]
“이보쇼, 우리도 나름 군대라는 게 있는 세상이야.”
[그치만 나타나지도 않는 마왕에다가 공격을 퍼부을 순 없잖아! 성좌와 계약한 건 각성자에게 최대한 마왕과 비슷한 성질을 갖춰서 그들을 알아보고 유인하기 위해서야!]
“성좌가 미끼란 소리냐?”
[대신 힘을 주는 미끼지!]
그렇게 말해봤자 미끼는 미끼다.
“그럼 너희들은 굳이 성좌가 될 이유가 없잖아. 손해만 보는 거 아니냐?”
[성좌신이 승지의 세계에 포상을 내건 것처럼, 우리한테도 따로 보상이 있어! 성좌가 될 때 받는 보상과 계약자와 함께 이세계를 복구했을 때 얻는 보상이 있지!]
“그럼 넌 왜 성좌가 된 거야. 뭘 받고 싶었길래?”
승지의 질문에 성좌가 머뭇거리더니 아련하게 대화창을 띄웠다.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을 찾기 위해서 난 성좌가 된 거야.]
* * *
성좌와의 대화를 마치고 가게로 돌아간 승지는 사라설과의 짧은 만남을 끝냈다. 정말 밥만 먹고 일어난 것이다.
사라설은 몹시 서운해 했지만, 이미 다른 데 집중하게 된 승지는 칼같이 잘라냈다.
“인연이 되면 또 보자고.”
“언제요? 미스핏 길드로 오실 수 있으세요?”
“모르겠네. 최자림이랑 서명구도 내가 부활한 거 아니까 같이 얘기해보던가.”
“헉, 승지 씨가 부활한 걸 알면서도 말씀을 안 하셨던 거예요? 그 두 분~~!”
사라설이 눈을 불태우며 열심히 다른 길드원에게 불똥을 날렸다. 어쨌든 만남의 회포는 풀었으니 사라설과는 번호만 교환하고 헤어졌다.
[승지는 다른 사람이랑은 평범하게 잘 대화하면서 유월한테만 이상하게 굴더라.]
“너도 이상형 만나 봐.”
정상적으로 굴어지나.
사라설을 보낸 승지는 유청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대충 식량이랑, 포션이랑 무기 같은 거. 넌 많이 해봤을 테니까 적당히 사올 수 있잖아.”
“가능은 하지만 갑자기 그걸 다 어디다 쓰려고 그럽니까?”
“어디긴 어디야.”
승지가 유청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제부터 넌 나랑 빈집털이를 나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