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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거짓말쟁이들의 춤 (1)

승지가 최자림의 차에 올라타던 때.

류의건은 H호텔 파티장 근처까지 도착해있었다.

그는 나름대로 각오를 했다. 정확히는 각성자들을 만나고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최악의 상황일지언정 자신이 내린 선택엔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런데 파티장에서 류 의건을 맞이한 건 각성자가 아니었다.

“이제 온 게냐.”

“아버지…?”

류의건이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류현탁 회장은 짧게 지시했다.

“데려가게.”

“어딜….”

“그 꼴로 나올 셈이냐?”

류의건은 완벽한 차림인 류현탁을 바라보았다. 언론에 흠 잡힐 구석이 없는 모습이었다.

류의건도 나름대로 옷을 정돈했으나 스킬을 쓰며 날아온 그가 실내에 있던 류현탁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작은 먼지마저도 용납할 수 없던 류현탁 회장이 불쾌한 듯 손을 털었다.

“네가 나설 거 없다. 보도 자료는 이번에도 우리 쪽에서 처리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번 일은 저번과 다릅니다. 제가 해명할 수 있습니다…!”

“필요 없다.”

류현탁이 반박할 틈도 없이 말을 잘랐다.

“그때 그 일이 있는 한 넌 무조건 나서서는 안 돼.”

폐부를 찌르고 들어오는 말이었다. 항의하려던 류의건이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었다.

류의건이 가진 페널티와 죄책감의 근원.

범윤오의 폭로 때문에 과거가 다시 한 번 물 위로 떠오르려고 했다.

* * *

“그래서 그 때 그 일이 뭔데요?”

최자림이 집요하게 캐물었다.

뒷좌석에 있던 승지는 양복 셔츠에다 팔을 쑤셔 넣다 말고 부정했다.

“그냥 밥만 먹은 거라니까.”

“에이! 남녀 사이에 그럴 리가? 저 촉 되게 좋습니다!”

개똥촉인데?

네 옆에 있는 놈도 못 알아보면서.

승지의 입이 근질거렸으나 서명구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드는 통에 그냥 참아주었다.

[꺄아! 나까지 입이 간질거려~! 짝사랑 너무 좋아!]

뭐 인마?

승지가 계속 그를 무시하자 최자림이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열애설이 아니라 그냥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리시죠?”

뚜둑.

순간 힘이 들어간 승지의 손에서 단추 하나가 뜯겨 나왔다.

“에구, 그거 한 벌밖에 안 가져왔는데. 힘 조절 좀 하시지.”

“뭐라고 했냐, 방금?”

승지가 시퍼렇게 두 눈을 떴다.

설마.

최자림이 태연하게 설마를 깨부쉈다.

“승지 씨가 유월 씨 좋아하는 거요? 완전 티 났습니다. 랭커들 중에선 모르는 사람 드물 걸요.”

“……시발.”

승지가 질끈 눈을 감았다.

“나 그냥 내린다. 이 대화는 없던 걸로. 영원히.”

“에잉! 승지 씨~! 그런다고 기억이 없어지나요!”

최자림이 말꼬리를 올리며 액셀을 밟았다.

저거저거, 일부러 속도 올리는 것 좀 봐라.

비명처럼 높아지는 엔진소리를 들으며 승지는 한참동안 머리를 싸매고 앉아있었다.

[걱정 마, 승지야! 예쁜 사랑은 원래 들킬 수밖에 없는 법이잖아?]

“그 입 다물어, 제발.”

성좌 대신 최자림이 나불거렸다.

“유월 씨야 워낙 포커페이스잖아요? 하지만 승지 씨랑 지내는 거 보면 아주 가능성이 없어 보이진 않던데요!”

“희망고문 하지 마세요! 유월 씨한테 직접 들은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지금이 기회라는 거 아니냐, 명구야. 열애설을 계기로 마음을 자각하는 거지!”

[캬아! 맞아! 그럴 거야!]

“말은 그럴싸하지.”

지금은 열애설을 인정할 만한 상황도 아니다.

하지만.

승지가 요 망할 단어를 노려보듯 생각했다.

하지만, 유월이 약간이라도 열애설을 부정하는 걸 망설인다면.

정말로 호감이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

일단 한 번 그 생각을 떠올리니 반드시 보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았다.

시험해봐서 나쁠 건 없잖아?

망해봤자 정정보도다.

귀신같이 심경의 변화를 알아차린 최자림이 짓궂게 덧붙였다.

“그래서 승지 씨, 차 돌려요. 말아요?”

“…뭘 돌려.”

승지는 벌어진 목 부분을 잠그려다 어차피 단추가 날아가고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을 놓았다.

“부딪쳐본다, 썅.”

“어예! 역시 승지 씨! 바로 그 정신이죠!”

최자림이 신나서 운전대를 꺾었다.

물론 상황이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펑! 번쩍! 퍼펑!

차가 멈추기도 전에 연달아 터지는 섬광이 100미터 앞에서부터 보였다.

“미션이라도 든 거 아냐?”

“아뇨! 촬영진이네요!”

최자림이 빵빵거리며 경적을 눌러댔지만 최고급 외제차가 즐비한 도로는 쉽사리 비워지지 않았다.

H호텔의 입구 앞은 범윤오가 터트린 폭로 때문에 예상 인원보다 두 배 가까이 미어터졌다.

2차 각성자인 경호원들도 압사당하지 않는 게 고작이었다.

“호오! 연예인까지 불렀나보네요! 이때다 홍보 오졌다!”

“진짜 저것들은 놀러왔나.”

“생각보다는 다들 침착하네요. 역시 모두가 범윤오 각성자의 말을 믿는 건 아닌가 봐요!”

승지 일행이 저마다 감상을 떠들었다.

특히 서명구의 추측처럼 의심부터 토해내는 인간이 없다는 건 좋은 신호였다.

분위기 괜찮은데?

굳이 바로 앞에서 내릴 이유가 없는 승지가 달칵 뒷좌석을 열었다.

최자림이 가져온 양복이 하필 양아치 같은 빨간 셔츠에 새까만 정장이었던 터라 승지의 등장은 금세 눈에 띄었다.

“어, 저기!”

“랭커다! 18위 맞지?”

“그 사람이야!”

카메라에 익숙하지 않은 승지가 인상을 쓰자 표정이 더욱 딱딱해졌다.

그러자 정말로 조직폭력배처럼 험악해보였다. 심지어 앞섶은 단추까지 뜯어져서 한층 불량해보였고 말이다.

승지는 다짜고짜 렌즈를 들이대는 사람들에게 딱 한 문장만 던졌다.

“찍어서 올리면 얼굴 기억해둔다.”

촬영하던 기자들의 손가락이 굳었다.

각성자들이 하는 협박이야 간간히 받아왔지만 저 인간은 진짜로 사고 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던 것이다.

만족한 승지는 그들을 지나쳐 호텔 안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파티 장소인 H호텔은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다. 단 랭킹에 오른 각성자들은 얼굴만 보여줘도 프리패스였다.

밝은 샹들리에 조명이 내리쬐는 파티장은 의외로 분위기가 잔잔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혼란에 빠져있진 않은 걸!]

“그러게.”

타고난 아웃사이더로서 피해야할 인간 밀집 구역을 알아보는 승지가 바로 파티장의 중심을 집어냈다.

“회장님 덕분에 저희가 또 한 번 안심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연륜과 돈이 합쳐져 누가 봐도 타고난 금수저의 냄새를 풍기는 인간이 주최자처럼 인사를 받고 있었다.

그는 바로 옆에 누굴 데리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류의건이었다.

[헐! 류의건 아빠다!]

류의건은 방금 전까지 드래곤과 싸우던 사람이라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멀끔한 모습이었다.

싹 다 명품이구만.

시계부터 구두까지 반지르르한 빛이 흘렀다.

역시 재벌들이란.

능숙하게 상황을 다루는 솜씨를 보니 범윤오가 던진 폭로는 오히려 저쪽이 더 잘 다룰 거 같았다.

“그나저나 제일 먼저 이동했던 주제에 번태 놈은 어디 있는 거야?”

승지가 회장 안을 둘러보았다.

[저기! 번태 아저씨잖아!]

“없는데?”

[아이 참. 승지도. 수염 좀 밀었다고 못 알아보는 거야?]

승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무슨 예술 종자처럼 구불거리는 단발을 뒤로 묶은 사내가 진지하게 사람들과 대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하와이안 셔츠도 아니라 알아보기가 더 힘들었다.

긴가민가힌 승지가 쳐다보고 있자 분명히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가 번쩍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아! 승지군 왔는가!”

“진짜냐.”

그제야 확신한 승지가 다가갔다.

털북숭이 수염을 벗겨놓으니 드디어 번태도 한 길드를 책임질만한 수장다워 보였다.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야? 기자 회견부터 하는 거 아니었어?”

“음.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다네.”

번태가 눈동자를 굴렸다.

“하지만 류 회장이 먼저 기자들을 데려가서 말이야. 류의건 선생이 싸웠던 모든 미션 기록을 공개하겠다면서 의혹을 없애려고 한다네.”

실제로 류 회장이 손짓할 때마다 작은 영상이 떠서 대화하는 사람들에게 날아갔다.

알러트 보스가 등장했던 순간 다른 곳에서 싸우고 있는 모습이라면 확실한 알리바이가 되어줄 것이다.

게다가 때 빼고 광낸 류의건이 바로 앞에서 웃으며 악수까지 청하는 걸 보면 도저히 악당으로 의심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럼 뭐해.

“저게 성공해도 댁 혐의까지 벗겨지는 건 아니잖아?”

“일단 영상에서 대문짝만하게 얼굴이 찍힌 건 류의건 선생이라서 말이야.”

번태가 수염이 없어 허전한지 턱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나대로 제대로 설명해야겠지. 그래서 길드원들이 수염까지 다 밀어버렸지 뭔가. 그래야 훨씬 믿음직스럽다고 말이야.”

“아니. 수염 길렀을 때가 더 나은데.”

“자네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나!”

번태가 화색을 띄었지만 승지가 무시했다.

“애초에 처음부터 류의건처럼 얼굴 까고 언론 플레이나 하지 그랬어?”

“글쎄. 류의건 선생의 사례를 보면 얼굴이 알려져서 좋을 게 전혀 없더군.”

“엉? 무슨 소리야?”

승지가 되물었다.

어리둥절한 그의 반응에 오히려 번태가 눈을 크게 떴다.

“모르는가? 류의건 선생이 막 각성했을 때 일 말이야.”

[??? 각성했을 때?]

성좌랑 승지 둘 다 전혀 모르는 기색으로 쳐다보자 번태가 미간을 좁혔다.

“이런, 둘이 친해 보이기에 말해줬을 줄 알았더니.”

잠깐 생각하던 번태가 가볍게 툭 털어놓았다.

“류의건 선생의 성좌인 신의 심판자는 인간도 심판한다네. 그 사실을 몰랐던 류의건 선생이 정화 스킬을 썼을 때 몬스터는 물론이고 사람까지 모두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네.”

“미친.”

[헐.]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류의건은 1차 각성자다.

갓 각성해서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갑자기 몬스터가 나타난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전과 다른 힘을 얻었다는 걸 깨달은 류의건은 조심스럽게 스킬을 시험해본다.

아마도 가장 위험해보이지 않는 스킬로 적을 제압하려고 했을 테지.

그리고 빛이 모든 것을 심판했다.

성좌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한참을 굳어 있다가 간신히 대화창을 띄웠다.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이…!]

“그 때 200명 정도인가 죽었을 거야. 살아남은 사람은커녕 시체까지 완전히 증발해서 류 회장이 몬스터의 소행으로 둔갑시키기가 편리했지.”

“저 자식이 사람들 있는 곳에선 안 싸우려고 했던 게 그럼…!”

갑자기 류의건의 모든 행동들이 이해가 갔다.

지나치게 높았던 페널티 수치와 호구처럼 사람 하나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모습까지.

모두 죄책감이었던 것이다.

“아마 그 때문에 알러트 일도 직접 나서려고 한 거겠지. 백정민도 그렇고 성좌도 그렇고. 그저 몰랐을 뿐인데 당하는 일들을 보면 가끔은 좀 안쓰럽다네.”

번태가 동정하는 눈길을 보냈지만 승지는 되레 어이가 없어졌다.

“안쓰럽다는 사람이 남의 비밀을 막 말하고 다닙니까?”

“어차피 아는 사람은 다 아네. 또 자네는 친하잖나. 물론 그 때 류 회장이 어마어마하게 고생을 해가며 입막음을 시켰긴 했지만.”

번태가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성좌에 관한 문제는 신중하게 접근할수록 좋아. 각성자가 성좌를 의심하는 순간 오히려 성좌의 반항을 불러올 수도 있으니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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