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모든 일의 예고편 (1)
승지가 단순한 인생 목표를 세우고 있을 때 길드 연합과 연락을 마치고 온 유월이 돌아왔다.
“승지 씨. 아무래도 저는 먼저 가봐야 할 거 같네요. 글라세로 문제로 미스핏 길드장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미스핏 길드장이?”
“쓰레기 매립지에서 뭐했냐는 얘기에 그럴싸한 증인이 필요해진 모양입니다. 가서 함께 말을 맞춰야죠.”
“아, 그런 거라면 뭐. 오늘 필요한 얘기는 다 들었으니까 괜찮습니다.”
승지가 잠든 유량을 들어주자 유월이 허리를 숙여 안아갔다. 따끈따끈하던 게 빠지니 나름대로 서늘한걸.
잠시 핸드폰을 보고 있던 류의건도 덩달아 말했다.
“저도 어둑시니 길드장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결계처리는 끝났으니 묻기 전에 신성 마법으로 1차 정화를 부탁한다고 하네요.”
“그럼 여기서 찢어져야겠네.”
승지가 일어났다.
“난 나온 김에 마저 볼 일 좀 봐야겠다. 각성자 전용 가게는 아직 한 번도 안 가봤거든.”
“그대로 다니셔도 괜찮을까요?”
류의건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직 마왕을 잡은 것도 승지 씨가 살아난 것도 비공식인데요.”
“난 아직 광고판에 얼굴 달릴 만큼 유명하지 않아서 말이야. 설마 한 번 본 얼굴도 기가 막히게 외워버리는 인간이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저번에도 못 알아봤잖아.”
“다시 머리를 염색하셔서 걱정이 됐습니다.”
“예. 그리고 대련했던 길드장들은 기억할 겁니다. 미스핏 길드원도 마찬가지고요.”
유청이 지적했다. 승지는 별 타격 없이 받아넘겼다.
“그게 걱정이면 누군가가 가게를 먼저 점검해보면 되겠지?”
“아, 당연히 제가 따라가는 거군요.”
유청이 썩은 동태 눈깔이 되어 중얼거렸다. 머슴 팔자가 새삼 사무쳐오는 모양이다.
승지가 유청을 데리고 간 뒤 나머지 일행은 각각 목적지로 흩어졌다.
그동안 저주다 던전이다 고생만 작살나게 했지, 정작 각성자다운 일상은 별로 보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게다가 그동안 각성자 전용 가게에선 뭘 파나 늘 궁금했었다고.
유청에게 안내를 받아 도착한 각성자 전용 가게는 간판을 극도로 제한하는 요즘에도 전광판을 사용하고 있었다.
승지가 전광판을 가리키며 물었다.
“새삼스레 번쩍번쩍 하구만. 왜 여기만 간판을 달 수 있는 거였지?”
“스킬로 보호할 수 있어서입니다.”
유청이 머슴답게 성실하게 답했다.
돌발적으로 나타나는 미션 때문에 건물이 부서지는 일이 많다보니 낙하 위험이 있는 건축물은 제한을 받아 모두 철거되었다.
그런데 결국 각성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건물은 스킬로 보호한다는 핑계를 대고 여전히 간판이 사용되고 있었다.
어차피 각성자가 아니면 광고 효과도 없을 텐데 굳이 왜 만든 거야?
정작 각성자가 된 뒤에는 헬바티아의 던전이 생각나 오히려 찝찝한 인테리어로 느껴지는데 말이다.
인상이 한 순간에 달라지는구나.
승지와 유청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지이잉.
“어서 오세요~! 마나마니 각성샵입니다! 오늘도 행복한 쇼핑! 완전한 보장 되세요!”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들린 인사말이 경쾌하게 고막에 꽂혔다.
승지는 각성자 전용 가게라기에 좀 더 진지하고 전문적인 인상을 기대했지만. 생각과 달리 지나치게 화려한 백화점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히야~~! 반짝반짝하다!]
성좌는 광택이 반질반질한 인테리어를 보며 마냥 좋아했다. 가게 안은 포션 코너, 장비 코너, 무기 코너로 나눠져 있었다.
“뭐가 이렇게 다 똑같이 생겼냐. 공장이라도 있는 것처럼.”
“2차 각성자들이 공급하는 물건들이죠. 경매장과 달리 길드 소유 던전과 직계약한 제작자들입니다.”
“안녕하세요~! 마나마니입니다! 안녕하… 어머, 유청 씨!”
“안녕하세요.”
유청은 슬쩍 몸을 틀어 주머니에 찔러 넣은 오른쪽 소매를 숨겼다. 가게 안으로 들어오니 대부분 그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괜히 팔을 잘린 걸 보였다간 질문이나 잔뜩 받을 게 뻔했다.
물론 유청도 유명하긴 하지만 번태나 류의건 정도는 아니었기에 다른 각성자들도 적당히 시선만 주고 말았다.
덕분에 승지는 계속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돌아볼 동안 주변 감시하고, 일 있으면 알려.”
“…예.”
유청이 불퉁하게 대답하고는 주변을 경계했다.
[ 부르그골의 해독 포션 : 드래곤 특제 해독 포션. 모든 종류의 독에 완벽한 면역 보장. 1회용. 3000 코인 ]
[ 고대의 잊힌 금화 :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며 만든 성물. 소유자가 바다에 빠지더라도 해안에 밀려갈 때까지 익사하지 않는다. 2400 코인 ]
[ 재우의 도끼 창 : 쇳물의 달인 성좌가 계약자를 통해 만들어낸 도끼 창. 30일 동안 창에 모래의 정령이 깃들어있다. 4330 코인 ]
승지는 천천히 진열된 물건을 보며 움직였다. 확실히 경매장에 올라온 물건들과 비교하면 가격이 높았다.
“이번에도 알러트가 한 건 올렸다는 얘기 들었냐?”
매대 너머로 들려온 말소리에 승지가 걸음을 멈췄다. 반대편에 있던 각성자들이 낮게 떠들고 있었다.
“이젠 완전히 국제적으로 놀고 있더라. 미국에서도 공식적으로 알러트를 적으로 규정한 거 알아?”
“여기서 만든 조직인데 정작 한국 사람들은 잘 모른다는 게 참.”
“비각성자들만 모르는 거지. 이젠 길드 연합이 아무리 규제해도 각성자들이 너무 많아져서 숨길 수가 없을 거야.”
“젠장, 불법이어도 앉아서 떼돈을 벌어들인다는데 나 같아도 들어가겠다.”
물건을 집어 드는 척 엿듣고 있던 승지의 미간이 점점 굳어졌다.
뭐지, 이 한심한 놈들은?
그중에서 그나마 제일 덜 정신이 빠진 놈이 핀잔을 주었다.
“기껏 각성해놓고 범죄나 저지르겠다고?”
“생각보다 돈이 안 되잖아! 미션은 뒤지게 어렵고 던전은 구경도 못하고. 이게 다 1차 각성자 놈들이 먼저 던전을 선점한 탓이야.”
“나도 갑갑하기야 하지. 그래도 괜히 알러트 같은데 들어갔다가 성좌신한테 페널티 먹고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깟 페널티, 이젠 알 놈들은 다 알아. 즉사만 면하면 페널티도 얼마든지 스킬로 해결할 수 있다고.”
즉사만 면하면.
승지는 잠깐 그들의 페널티 수치를 확인했다. 각각 5와 32의 페널티가 이미 존재하는 놈들이었다.
자신이 코피를 흘리며 기절했을 때가 64였고, 마지막으로 본 류의건의 페널티 수치가 3만7천 정도였다.
류의건이야 자잘한 페널티가 계속 누적된 거라고 쳐도, 즉사하는 페널티의 수치는 대체 얼마인 거지?
이거 미션하다 돌연사하기 전에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다른 각성자들의 푸념이 이어졌다.
“아서라, 아서. 어차피 넌 이미 경계 스킬도 받아서 알러트에 들어가지도 못할 주제에. 무슨 말이야.”
“젠장, 각성하기 전에 정보만 빨리 알았어도 절대 경계 스킬 안 받는 건데. 왜 다들 이런 꿀 정보를 안 알려준 거야?”
“그럼 자네가 알려주던가?”
“미쳤어? 내가 다른 놈들 좋은 일을 왜 해줘? 그 놈들도 후회 좀 해보라지.”
투덜거리던 그들이 드디어 승지를 발견했다. 너무 오래 쳐다봤나.
승지를 발견한 그들의 눈이 순식간에 둥그레졌다. 승지가 엿들었다는 사실보다 그가 경계 스킬이 없다는 사실이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각성자의 눈이 번득였다.
“저기 혹시 당신 알러….”
“유청! 그만 가지!”
승지가 큰소리로 외쳤다. 혹시나 하고 의심했던 그들은 알만한 랭커의 이름을 듣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랭커가 알러트랑 협조할 리가 없으니까.
…괜히 기분만 잡쳤네.
딱히 살 것도 찾지 못한 승지가 몸을 돌렸다. 다만 언제나 예상치 못한 장면은 등 뒤에서 발생했다.
“스… 우웁!”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여자가 급하게 유청의 손에 붙들렸다. 얼마나 잽싸고 억셌는지 한 손이었는데도 순간 몸이 들려 올라갈 정도였다.
놀란 승지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아 너…!”
“우웁! 우우웁!”
“어떡합니까?”
유청이 다급히 물었다. 그도 자신이 붙잡은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고 꽤나 당황하고 말았다.
미스핏 길드의 사라설이 되살아난 승지를 보고 울먹거리고 있었다.
“웁이이! 어엄어! 움이이!”
[승지 씨! 어떻게, 승지 씨! 라고 하는 거 같지?]
친절한 번역 고맙다.
승지랑 유청이 시선을 교환했다. 붙잡힌 사라설은 너무 벅찬 나머지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물론 그 눈물은 감격이 아니라 붙잡힌 인질을 더욱 가련하게 만드는 효과를 만들어주었다.
“뭐야? 납치하는 거야?”
“울고 있잖아!”
“신고할까? 그런데 저 사람 유청 아냐?”
단번에 그들에게 쏠린 시선을 느낀 승지가 바로 정리했다.
“튀자.”
“인질은….”
“데려가!”
2인조 악당처럼 두 사람이 사라설을 끌고 후다닥 가게를 빠져나왔다.
* * *
가게에서 멀리멀리 도망쳐 나온 유청이 손을 풀어주자마자 사라설이 외쳤다.
“승지 씨! 세상에! 대체 어떻게 살아나신 거예요? 지금 꿈 아니죠?”
“차라리 꿈이면 좋겠군요.”
유청이 급 핼쑥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도 모르게 인질이라고 말해버린 상황이 뒤늦게 충격이었던 것이다.
승지는 마냥 행복하게 기뻐하는 사라설을 보며 난감하게 인사했다.
“음, 반갑다.”
“죽은 줄 알았어요! 다들 죽었다고 그랬는데!”
“그거 일단은 공식적인 얘기니까 목소리 좀 낮추지 않을래?”
사라설이 얼른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도 방울방울 솟아오르는 눈물은 막지 못했지만.
“살아있으셔서 다행이에요.”
이렇게까지 자신의 부활을 기뻐해 주는데 찬물을 끼얹을 수도 없고, 머쓱하다.
[최자림이 비밀을 잘 지키긴 잘 지켰나봐! 같은 길드원이라도 정말 하나도 모르네!]
곧 진정한 사라설이 훌쩍 눈물을 닦았다.
“정말 너무 반가워요. 살아서 다시 보다니 꼭 거짓말 같은 걸요. 맞아, 이렇게 있을 게 아니라 저희 어디 들어가요! 천천히 얘기해요!”
“글쎄….”
“제가 꼭 밥 사드린다고 그랬잖아요. 비싼 밥! 지금 사드릴게요!”
[꺄아 잘됐다! 만난 김에 승지한테 붙은 마왕 얘기도 물어볼 수 있잖아! 미스핏 길드원이니까 분명 클랩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거야!]
아, 그 서큐버스 주인 놈.
명색이 마왕이라는 녀석이 치사하게 감시를 붙인 게 불쾌하긴 했지.
거절하려던 승지가 그냥 수락했다.
“그래, 가자. 사는 건 내가 사지.”
“아니요! 제가 살 거예요! 무조건! 승지 씨 카드 부숴버릴 거야!”
“아니… 카드도 없어. 아직.”
생각 외로 격한 사라설의 표현에 당황한 승지가 중얼거렸다. 그래, 얘도 미스핏 길드였지. 괜히 최자림과 같은 길드가 아니구나.
고깃집으로 이동한 승지는 사라설이 착착 놓아주는 물 컵과 물수건과 수저까지 받아야 했다.
“왜 이렇게 익숙해?”
“제가 막내 생활이 좀 길거든요. 학회에서도, 길드에서도.”
“학회?”
“유학파잖습니까. 사라, 설.”
덩달아 따라온 유청이 대신 설명해주었다. 승지의 눈이 커졌다.
“이름이 라설 아니었어?”
“아니랍니다!”
“여긴 외국도 아닌데 뭐하러 성을 뒤에….”
말하다가 깨달은 승지가 바로 철회했다.
“아, 아니다. 계속 뒤에 붙이는 게 낫겠네.”
“한국어의 비애죠. 언어유희가 너무 자유로운.”
사라설이 빙그레 웃었다.
“사실 별로 신경 안 써요. 미스핏 길드 분들은 이름가지고 장난치실 분도 아니니까요.”
[나! 나는 지금 이해했는데! 장난치면 안 돼?]
“안 돼.”
승지가 성좌한테 혼잣말 하는 걸 본 사라설이 화들짝 놀랐다.
“방금 승지 씨가 데리고 있는 성좌한테 말씀하신 거죠?”
“어, 맞아.”
“좋겠다. 제 성좌랑도 대화를 할 수 있었으면 고어 연구에 엄청 도움이 될 텐데요!”
사라설이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승지 씨는 모르셨겠지만 사실 그 때 던전에 들어간 게 처음이었어요. 늘 자료로만 보던 고어를 던전에서 직접 보게 되는 순간이라 너무 떨려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올 정도였다니까요.”
어쩐지 첫인상과 다르게 애가 너무 활발하다 했다.
“긴장을 많이 했나보지?”
“무지무지요.”
“저렇게 보여도 천재로 유명한 인간입니다. 열일곱 살에 던전 고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따고 미스핏 길드에 들어갔으니까요.”
“굉장하네.”
“헤헷. 그래도 정말 무서웠어요. 일이라고 생각해서 버텼지만 아직도 던전이 꿈에 나오면 악몽이 되는 걸요.”
던전이 그렇게 무서운… 곳이긴 하군.
승지는 첫 던전에서 마왕의 저주를 얻었고 사라설은 첫 던전에서 사람이 죽어서 나오는 걸 봤다.
트라우마가 안 생기는 게 이상하지.
“그래도 전투계열이 아니면 별로 들어갈 일이 없으니까 다행이잖아.”
승지가 말했다. 그런데 기대했던 명량한 대답 대신 툭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툭?
사라설이 고기 집게를 든 채 멈춰있었다.
“사라설?”
당황한 승지가 그를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느리게 사라설이 움직이더니 탁자 위로 쿵 머리를 박았다.
뭐야? 시간이 멈춘 건 아닌데?
놀란 승지가 고개를 쳐들자 여전히 인상을 쓰고 있는 유청이 보였다. 그런데 눈을 깜박이지 않는다.
“뭐야, 머슴 너까지 왜….”
기이한 예감에 승지가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깃집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쓰러지거나 멈춰있었다.
띠링!
[ 숲의 가호 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