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즐거운 나의 집 (3)
가는 길에 겸사겸사 이세계에서 벌어온 귀금속도 현금화 했다. 역시 이럴 때 류의건은 쓸 만한 조언을 해주었다.
“던전 부산물은 보통 길드에서 환전하는 게 제 값을 받기 좋습니다. 경매장으로 시세가 바로 공유되어서 속이기도 어렵죠.”
“귀금속도 그래?”
“이세계에서 금을 좀 받으셨다고 하셨죠?”
“엉. 그거랑 보석 약간.”
“원래 금처럼 바로 현금화가 가능한 물건은 평범한 곳에서도 많이 환전합니다. 하지만 보유량이 상당하시니 바로 지급 가능한 현금을 가진 거래소는 길드밖에 없죠.”
당장 쓸 현금을 받고 싶은 승지는 길드로 갔다. 어둑시니 길드 접수원은 친절하게 맞았다. 승지가 꺼내놓은 금더미를 보고도 침착하게 가격을 알려줄 정도였으니까.
“75억??”
[히에에엑!!]
“네, 정확히 75억 팔천 칠백만원입니다. 현금, 수표, 코인 다 되시구요. 바로 이체해 드릴까요?”
승지는 어마어마한 금액에 잠깐 멍해졌다. 물론 금괴를 본 순간 돈이 되겠다는 생각은 했다. 비싸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압도적인 숫자를 가진 현금을 보자 비로소 실감이 났다.
이세계 여행 한 번에 75억.
75억!
아무리 불운과 행운이 겹쳐서 일어난 일이라지만 평생 벌어도 다 쥐기 힘든 액수에 승지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같이 가져오신 보석은 감정 결과를 기다려야 해서 일주일 뒤에 다시 알려드릴게요.”
“그럼 그때 같이 연락주세요. 일단 이건 이체해주시구요.”
“네. 잠시만요.”
접수원이 자판을 타닥타닥 쳤다. 류의건이 승지를 축하했다.
“축하드립니다. 많이 버셨네요.”
“와…… 미쳤네.”
진짜 각성자는 벌이가 장난 아니구나.
류의건은 한 방에 75억을 벌었는데도 별로 질투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75억을 이체해준다는 길드원도 마찬가지였다.
복권 1등에 네 번 정도 당첨된 금액인데도 안 놀란다고?
대체 각성자들 사이에선 현금이 얼마나 어떻게 돌고 있는 거야?
[꺄아! 우리 승지 이제 부자다!]
빠르게 입력하던 접수원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채승지 님. 각성자가 아니셨어요?”
“맞는데?”
“각성자 관리소에서 조회가 안 되는데요.”
갸우뚱거리던 승지가 곧 이유를 알아챘다.
“아아~ 그거. 나 죽었을 때 각성자 관리소 기록도 같이 지워졌나봐. 부활 신고는 해서 계좌는 다 복구 됐는데 각성자 관리는 안 그래?”
“전례가 없던 일이니까요. 각성자가 실종되어서 사망 처리 되는 경우도 아직 없으니….”
통상 실종 신고 후 5년이 지나야 실종 선고를 받고 사망 처리가 된다.
각성자가 나타난 게 딱 5년이니 이제 막 각성자 신분으로 실종된 사람들이 실종 선고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각성자 신분이 아닌 게 문제가 됩니까?”
“지금 말씀드린 금액은 각성자 거래 기준으로 안내해드린 거라서요. 각성자 신분이 아니시면 일반인 기준으로 거래해야 합니다.”
“뭐가 달라지는데요?”
“일단 세금이죠. 던전 습득물이 아니라 기타 소득세 20%를 내셔야 하고 일반인 상대로는 저희 쪽 거래 수수료도 상당히 올라가요.”
20퍼센트면 얼마지?
[헉! 16억을 내야한다는 거야!]
승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식간에 16억을 날치기 당한 심장이 쿵 떨어졌다.
“미, 미친… 진짜로요?”
“면세는 각성자 혜택에 속하는 거라서요. 정 그러시면 대부분의 금액을 코인으로 받으시는 건 어떠신가요? 아직까지 코인 관련 세법은 없어서요.”
뭔가 자연스럽게 탈세를 권유하고 있는데…?
승지가 머리를 휘저었다.
난 현금이 필요하다고. 집 살 돈!
쾅!
승지가 접수대를 양 손으로 콱 쥐었다. 난리치는 각성자가 많은지 부서지는 일 없이 튼튼했다.
고뇌에 빠진 승지가 대답했다.
“일단…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네. 요새 금값이 계속 오르고 있으니까 나중에 파셔도 오히려 이득이실 거예요. 편히 오세요.”
접수원이 친절하게 덧붙였지만 이미 승지의 정신은 살짝 물렁해졌다. 충격을 받은 승지가 류의건에게 물었다.
“너도 벌어들인 돈 세금으로 다 나가냐?”
“전 법인 쪽으로 처리해서….”
아, 그래. 회사 있는 금수저였지.
처음으로 거금을 만져본 승지는 막상 돈을 갖게 되자 난감해졌다.
“하… 머리 아프네. 귀찮은 거 다 떨쳐내야 돈을 써도 쓰지.”
“우선 각성자 신분부터 회복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야겠다. 이거 끝나고 바로 가야겠네.”
길드 교환소를 나온 승지는 길드장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때맞춰 미션이 끝났다는 것이다.
“다들 오랜만이구만! 이쪽일세!”
번태가 손을 흔들었다.
어둑시니 길드의 연무장은 미스핏 길드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넓고 안락했다.
선수촌 뺨칠 정도의 기구와 가상 던전도 한 쪽에 마련되어 있었고, 온갖 무기나 마법 도구도 사용해볼 수 있었다.
원래는 약간의 입장료를 받고 다른 각성자들에게 개방해두지만, 오늘은 세 사람을 제외하면 텅 비어있었다.
번태는 미션을 하고 온 사람 같지 않게 여유로운 모습으로 승지를 기다렸다.
“무슨 일 이길래 사람까지 다 물리고 만나자고 한 겁니까?”
“자네가 글라세로 마왕전에서 했던 일을 잊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번태가 시원스레 소리쳤다.
“나와 싸워보자고!”
급하다고 불러놓고 또 이거냐.
승지는 김이 샜다.
“뭐, 사양하진 않겠습니다.”
승지가 가볍게 손목을 돌렸다. 물론 랭킹 2위와도 스탯 차이가 두 배가 나는데 랭킹 1위랑도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나겠지.
지금 승지의 스탯은 스탯 분배치 100을 더해 힘 75, 민첩 60, 지능 58, 체력 69, 행운 40 (2~99)에 육박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을 때도 길드장이랑 싸웠던 몸이다.
저만큼이나 스탯이 올라갔는데 랭킹 1위와의 싸움을 거절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해 볼만 해.
승지가 당당하게 양 주먹을 치켜들자 번태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네. 나와 싸울 때 반드시 마왕을 물리칠 때 썼던 스킬을 써야 하네.”
“…?”
[헤엑, 무슨 소리야?! 지금 저거 필살기, 완벽한 콤보를 써달라는 거지?]
기껏 타올랐던 승지의 투지가 훅 꺼졌다.
“그건 안 됩니다.”
“왜 안 되지?”
“…….”
이걸 말하면 정말 무슨 컨셉 종자 같아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승지가 찌푸린 미간으로 대답했다.
“스킬을 쓰면 무조건 목표가 죽습니다. 내가 미쳤다고 대한민국 랭킹 1위를 죽이고 싶진 않은데요.”
“바로 그거야!”
번태가 번뜩 소리를 질렀다.
[(;☉_☉)?! 뭐, 뭐야?]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랭킹 1위를 상대로 서슴없이 무조건 죽인다고 하는 승지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봤을 것이다.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하냐고.
물론 승지는 그런 놈들의 콧대를 다 부러트려 증명할 자신이 있었지만, 어째 번태의 반응은 그들과는 결이 달랐다.
번태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원래 스킬은 자신보다 스탯이 높은 상대한테는 잘 통하지 않아! 그래서 다들 스탯과 상관없이 타격을 줄 수 있는 무술이나 더 좋은 무기를 목표로 삼지!”
“예에, 뭐. 압니다.”
“하지만 그 논리대로라면 자네가 마왕을 죽인 건 말도 안 되게 된다네!”
번태가 부리부리한 눈을 떴다. 어찌나 열정적인 어투였는지 사방으로 뻗은 머리카락이 도깨비 뿔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 때 자네 스탯이 마왕과 얼마나 차이 났다고 생각하나?”
“…적당히?”
“하핫! 정말 보기와는 다르게 자신감이 넘치는 친구군!”
번태가 호탕하게 웃었다. 농담 아니었는데 진짜로 웃어대니 뭐라 반박하기도 뭐하군.
“자넨 그 때 코끼리 앞에 개미만도 못한 스탯이었네.”
“듣는 개미 기분 나쁩니다.”
“코끼리를 죽였으니 괜찮잖나! 여하튼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를 구하게 되었으니 잘된 일이지만 내 길드원 중 한 명이 마왕전을 복기하다가 자네 스킬에 관심을 갖게 된 거야.”
어둑시니 길드에는 원래 각성자 능력 향상을 위한 전문 분석팀이 있다고 했다.
길드장인 번태가 각성자의 스킬을 개화시켜주는 능력을 갖고 있었으니 당연히 그런 팀이 있을 법도 했다.
“자네가 가진 힘의 근본이 뭐라고 생각하나.”
[광대지!!]
“격겜이지요.”
이건 즉답할 수 있었다. 나이대가 있다 보니 번태는 바로 알아들었다.
“호오! 자네 개인 스킬이 격투 게임에서 온 거였구만.”
“그쪽은 뭡니까?”
“내 개인 스킬은 많이 보지 않았나? 바로 번개라네!”
“엥, 성좌 스킬이 번개 아니었습니까?”
“하하! 어렸을 때부터 번개맨을 좋아해서 말이야.”
젠장, 번개맨이라는 말에 왜 저 꼴로 다니는지 바로 납득 해버렸다. 저 머리털, 선글라스, 복장까지! 완전 애들용 히어로가 아닌가.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무튼 격투 게임이라니 아주 의외구만. 우리는 다른 걸로 추측했는데.”
“뭐죠?”
“시간.”
번태가 눈을 빛냈다. 진짜로 동공 안에서 번개가 번쩍거렸다.
“아무리 개미라도 멈춰있는 코끼리를 상대로는 뼈만 남기고 다 먹어치울 수 있지 않은가.”
“……!”
승지는 잠시 아연해졌다. 시간이라는 말에 처음에는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런데 확실히… 짚이는 곳이 있었다.
프레임 컨트롤.
단순히 한 장면, 한 공간을 지배한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남의 시간을 바꿔놓을 수 있는 스킬이다.
[정말 그러네? 승지야 필살기를 쓸 때를 생각해봐. 그럴듯해!]
그의 필살기는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한 상황 속에서 혼자만 움직여 완벽한 콤보로 적을 없애버리는 방식이다.
게다가 성좌는 태평하게 필살기를 얘기했지만 승지는 한 가지가 더 기억났다.
성좌가 자신을 살릴 때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듯한 작업을 거쳤던 게 마음에 걸렸다.
단순히 피가 거꾸로 돌아간 거라면 좋겠지만.
혈관을 파고들던 피의 느낌이 생각하자 기분이 삽시간에 거북해졌다.
빌어먹을. 랭킹 1, 2위를 앞에 두고 성좌한테 물어볼 수도 없잖아.
성좌의 고향별로 가면 확실하게 다 털어놓는다고 했으니 역시 그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승지가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생각에 빠진 걸 번태는 흐뭇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역시 종잡을 수 없는 양반이다.
“능력이 시간이면 뭐가 달라집니까?”
“우리의 목적은 이세계 복구라는 건 모든 각성자가 알고 있지.”
번태가 말했다.
“하지만 단순히 미션을 깨고 던전을 클리어한다고 해서 성좌신이 생각하는 이세계 복구가 이뤄지는 건 아니야.”
“마왕 다 잡으면 끝나는 거 아닙니까?”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만 마왕은 이세계와 우리 세계가 만난 다음에 일어난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네.”
번태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자고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원인을 파악해야 하지 않겠나? 난 지금까지 수많은 각성자들을 만나보았고 역시 이세계 복구의 열쇠는 각성자들한테 있다고 확신했네.”
확실하고도 강하게 사람을 믿는 어투였다.
“언젠가 시간을 다루는 각성자가 나타나면 갑자기 이세계가 생겨난 원인을 파악할 수 있어. 그리고 난 그게 자네라고 생각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