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광대의 대모험 (3)
광대는 웅크린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이샤는 손으로 물을 뜨듯 그를 퍼 올렸다.
“발릭. 언젠가 인간은 감당하지 못할 실체가 올 겁니다. 그들에겐 이미 마왕도 충분히 파괴적입니다.”
“…….”
“하지만 굳이 그 때를 기다리며 고통을 견딜 필요는 없어요.”
아이샤가 속삭였다. 꽉 움켜쥔 팔 밑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날 발릭이라고 부르지 마.”
아이샤가 멈칫했다.
광대의 목소리는 어딘가 그와 계약했던 인간의 말투를 닮아있었다.
아이샤는 원래 앞을 볼 수 없었으나, 현실에서 고개를 파묻은 광대의 눈이 드러나지 않자 어딘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이름은 알려준 적 없어. 부르라고 한 적도.”
“…알겠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이 날 발릭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우리가 이미 만났기 때문이겠지?”
광대가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렸다.
“미래에서 날 본 거야?”
“…예.”
아이샤는 달라진 광대의 반응에 조금씩 교조적인 반응이 차올랐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지만, 역시 이 성좌가 발릭이 맞다. 자신의 눈이 틀릴 리 없었다.
“당신이 세계 밖에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반드시 될 미래입니다.”
“…….”
광대는 여전히 무기를 끌어안은 채 말이 없었다.
“다른 예언을 해줘.”
“무슨…?”
“우리는 어떻게 돼?”
아이샤는 그가 말한 우리가 채승지와 성좌라는 사실을 금세 이해했다.
“당신과 계약한 그 사람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적이 될 운명입니다.”
가슴에 통증이 치밀었다.
승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건, 유월이 아닌가.
단순히 두 사람이 이뤄지지 않은 것도 슬픈데 그런 운명은 너무하잖아.
광대는 다시 제 목소리로 외쳤다.
“혹시 예언이 틀릴 가능성은 없는 거야?”
“없습니다.”
아이샤는 단호했다.
“다만 당신의 선택에 따라 달리 실현될 수 있을 뿐이죠.”
광대의 어깨가 아래로 처졌다.
승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힘을 얻으려고 했다.
그런데 아이샤의 설명대로라면 그들이 힘을 얻으면 얻을수록 서로가 존재할 수 있는 페널티가 커져 위험 수위에 이르게 된다.
당장 류의건의 사례만 봐도 그렇다.
아직도 그의 페널티 때문에 나타났던 부르그골의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아이샤처럼 서로를 하나로 융화시켜 페널티만 감당하지 않는 꼼수를 부리기엔 너무 끔찍했다.
그럼 남은 방법은 마왕이 되는….
“마왕은 되지 않을 거야.”
누가 들어도 힘없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이샤는 가만히 기다리다가 말했다.
“마왕이 된다고 반드시 계약한 사람을 잡아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광대가 움찔했다.
“아마 당신도 마왕이 된 다음 주변 인물이 변할까봐 두려운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 문제는 한 가지 해결책이 있습니다.”
“뭔데?”
“그 사람도 마왕으로 만들면 됩니다. 둘 다 갓 마왕이 된다면 힘이 비슷할 테니 자아를 갖출 때까지 버틸 수 있지요.”
멍해진 그가 입을 벌렸다. 아이샤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한 가지 방책일 뿐입니다. 당신은 현재 그의 성좌이니 마왕이 되는 시기를 조절하기도 쉬울 테고요.”
“그건….”
“게다가 당신의 경우에는 한 사람 몫의 제물만 준비하면 되니까요.”
광대가 벌떡 일어났다. 아이샤는 침착하게 당황해서 그의 안색이 푸르게 질려가는 걸 보았다.
“알… 알아? 당신도 그걸 알아? 알았어?”
“아시다시피, 저는 보입니다.”
아이샤는 광대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차분히 말했다.
“당신은 마왕이 되는 모든 절차를 끝내서 대답만 하면 된다는 건 알지요. 다나우보다도 빠른 속도 아닙니까?”
아이샤는 다음 마왕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다나우를 잠깐 떠올렸다.
아마 이번 알러트 일을 성공적으로 해낸다면 다른 마왕들에게 다시 제물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사실도.
그럼 바로 마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예언에 나왔던 마지막 마왕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아이샤는 기꺼이 기다리겠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광대는 호흡이 심하게 가빠져 있었다. 마치 발작이라도 일으킬 것 같았다.
“이런, 그 상태로도 아플 수가 있나요? 성좌가 아니라 확실하진 않지만.”
“…갈래. 나 갈 거야.”
광대가 급하게 아이샤의 손에서 뛰어내렸다.
엎드려있던 개들이 귀를 쫑긋 세우며 일어났다.
아이샤는 광대가 다급하게 개에 올라타는 걸 초점 없는 눈으로 응시했다.
“바래다드리죠.”
“싫어.”
개들을 일으켜 세운 광대가 곧장 문을 열려다가 머뭇거렸다. 그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승지한테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아이샤가 안심하라는 뜻에서 웃어보였다. 광대는 입술을 깨물더니 급하게 방을 빠져나갔다.
아이샤는 가만히 보고 있다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의 눈이 천장을 향했다.
“일부러 방해할 생각은 없었지만, 다나우. 이번 일은 그를 봐서라도 길드 연합 편을 들어주어야겠군요.”
그러는 편이 광대의 결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아이샤는 천천히 팔걸이를 움켜쥐더니 눈을 뒤집었다.
지워진 자신의 존재를 서서히 세상 바깥으로 띄워낸 그가 범윤오의 위치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 * *
“헉… 허억….”
광대는 빠르게 달리는 등 위에서 호흡을 내리눌렀다.
알고 있었는데도.
광대는 마왕이 너무나 징그러웠다. 다나우가 마왕이 되려는 것도 싫었고, 변해가는 주변 인물들도 끔찍했다.
그걸 막으려고 했을 뿐인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걸까.
다나우의 제물을 대신 삼키고 생겨난 ‘그게’ 자신에게서 떨어질 수 없다는 걸 안 순간부터.
성좌신에게 그걸 보여줬던 순간은 또 얼마나 수치스러웠던지.
승지에게 또 같은 짓을 반복할 순 없었다.
짝!
광대가 급하게 제 뺨을 쳤다. 그가 일부러 기운차게 소리쳤다.
“난 승지의 성좌고! 승지는 날 좋아해!”
본인에게 물어보면 무슨 낯간지러운 질문이냐고 질색을 하겠지만. 성좌는 알았다. 믿었다.
우린 선택할 수 있어.
“잠깐만. 얘들아.”
광대는 말개진 얼굴로 개의 뺨을 만졌다. 매끄러운 감촉이 닿으니 좀 진정이 됐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 군데만 더 들리자.”
“컹컹!”
개들이 만족스럽게 짖었다.
돌아가기 전에 딱 하나만 더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광대는 청월량 길드가 있는 건물로 개들을 몰아갔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적이 될 운명입니다.
아이샤의 말이 머리를 뱅글뱅글 돌았다.
유월이 정말 승지를 적대할까?
위엄찬란한 도장 간판으로 뒤덮인 건물에 도달한 광대가 침을 꿀꺽 삼켰다.
미리 물어보고 올 걸 그랬나.
아냐. 번태 아저씨가 유월한테도 성좌 얘기는 하지 말랬는 걸.
고민하던 성좌가 은밀하게 인벤토리 속으로 몸을 감췄다.
“쉬이잇. 이제부턴 조용히 해야 해!”
헥헥거리는 개들을 주의시킨 광대가 살금살금 앞으로 나아갔다.
잰 처음 승지랑 왔을 때는 수상한 사람이라고 해서 들여보내주질 않았었지.
그 때도 보안이 엄격했는데 개들이라고 들여보내줄 것 같진 않았다.
인벤토리로 죄다 넣은 다음 들어갈까 생각해봤던 광대는 아무도 없는데 열리는 문을 생각하곤 부르르 몸을 떨었다.
와, 너무 무섭겠다!
괜히 소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광대는 대신 바깥쪽을 바라보았다.
이정도 거리라면 나도 내 인벤토리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광대는 눈을 감고 번태가 이동하던 방식을 떠올렸다.
인벤토리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좌가 존재하는 순간 관념은 실재가 된다.
존재하지 않을 때는 철판과 유리로 막아놓은 벽도 얼마든지 쉽게 넘나들 수 있다.
심호흡을 한 광대가 인벤토리를 열고 경로를 미리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성좌가 되고나서 인벤토리를 얼마나 많이 열었는데, 이정도도 못할 리가 없어!
“가자!”
“크엉!”
갑자기 위아래가 휙 뒤바뀌자 놀란 개들이 휘청거렸다.
광대는 꼭 털을 끌어안은 채 빠르게 인벤토리를 이동시켰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것처럼 그들의 존재가 이동했다.
궤도의 끝에는 물론 청월량 길드가 쓰는 방이 있었다.
쿠당탕!
“흐와악!”
바로 인벤토리에서 튀어나온 개들과 광대가 잔디밭을 굴렀다.
“끼잉!”
“멍!”
“성공이다!
놀란 개 세 마리가 우다다 일어나는 속에서 광대가 만세를 불렀다.
예전에 봤던 청월량 길드의 실내 정원이 고스란히 보였다.
대박이다! 나중에 승지한테도 써줘야지!
엄청 좋아하겠지?
머리에 풀을 묻힌 채로 광대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딸랑. 딸랑.
“에구. 모자가 삐뚤어졌네.”
광대가 얼른 모자를 고쳐썼다. 이제 여기서 유월에 관한 정보를 찾기만 하면 되었다.
집이니까 일기장이라도 있지 않을까?
그치만 유월이 일기를 쓴다니 정말 상상이 안 가네.
한가롭게 생각하던 광대의 모자가 또 다시 흔들리며 딸랑거렸다.
“으응?”
바람이라도 부나?
천진하게 생각했던 광대의 바람과는 달리 방울을 건드린 손은 제법 묵직하니 실체가 있었다.
“…허억!”
뒤를 돌아본 광대가 기겁했다.
지금까지 모자를 건드린 건 빨간 털을 가진 괴물이었던 것이다.
성좌를 잃고 괴물로 변한 유량이 툭 튀어나온 눈으로 광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들켰어!
“아으으.”
유량의 입에서 영문 모를 소리가 새어나왔다.
광대도 놀라서 얼어버렸다.
다른 사람한테 성좌 모습을 들키지 말랬는데!
인형인 척 할까?
으앙, 그러기엔 이미 움직이고 말해버렸어!
대략 3초 동안 빠르게 혼란스러워하던 광대가 울상인 얼굴로 한쪽 손을 들어올렸다.
“아, 안녕…?”
“…….”
“저기 나 나쁜 사람 아닌데….”
그러자 귀신같이 유량의 눈동자가 일그러지며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마치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으아아! 울지 마! 울지 않아줄래?”
광대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었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오히려 유량의 털이 뻣뻣하게 곤두서며 경계심만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어떡하지?
“맞, 맞다. 소환!”
광대가 급하게 스킬을 내질렀다.
아까 싸울 때 콤보가 뜬 걸 보면 자신도 승지의 스킬을 쓸 수 있는 게 확실했다.
과연 예상이 들어 맞아서 광대의 소환 스킬이 발동 되었다.
후두둑.
허공에서 떨어지는 사탕을 본 유량이 움찔했다. 광대는 제 몸 만한 크기의 사탕을 들고 어색하게 웃었다.
“사, 사탕 좋아해?”
“…….”
유량은 오히려 미간을 찌푸렸다.
승지가 할 때는 좋아했던 거 같은데!
광대가 쩔쩔맸다.
“아니면 공연 보여줄까? 나 덤블링도 잘하고 저글링도 잘하는데!”
“그으.”
유량이 힘겹게 말했다. 처음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광대는 유량의 시선을 따라가 보고서야 알았다.
“개? 개들을 치우라는 거야?”
유량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광대가 얼른 케로베로스야를 인벤토리로 집어넣었다. 아직 그럴 여유가 남아있는 게 다행이었다.
그보다 놀라운 건 유량이었다.
“너 대화할 줄 아는구나.”
광대가 양 손으로 입을 가렸다.
“오해해서 미안해. 그 때 보고, 말을 못하는 줄 알았어.”
“아으… 프.”
“응?”
광대가 까치발을 들며 집중했다.
놀랍게도 성좌가 던전에서 마왕들이 썼던 고어를 이해했던 것처럼 유량의 말도 갑자기 이해가 되었다.
유량이 말한 걸 다시 문장으로 바꿔놓으면 다음과 같았다.
그 때는 사람들 앞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