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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오늘 들킬 것이다 (3)

“어우. 힘들다.”

털썩 뒷좌석에 주저앉은 최자림이 생수병을 비틀었다.

여기저기 몬스터의 피가 튄 모습이었다. 트럭 짐칸은 천막 천장이 푹 꺼져있었는데, 거의 머리가 닿을 지경이었다.

위에 실린 짐 때문이었다.

“좀 쉬엄쉬엄 하시죠!”

최자림이 아직까지 위에 올라가있는 승지에게 소리쳤다.

사이드미러로 승지가 한 짓을 본 사라설도 핸들을 꼭 잡았다.

“던전은 자주 갔었지만 이건 정말….”

“진짜 살벌하네요.”

서명구도 긴장한 채 중얼거렸다.

계속 튀어나오는 잡놈만 상대하는 게 지겨워진 승지가 차에서 멀리 떨어지더니 큼직한 놈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냥 대장을 몰아내는 줄 알았던 그들은 승지가 쓰러트린 적의 몸통을 그대로 들고 돌아오자 기겁하고 말았다.

“그걸 왜 가져오십니까?”

“응? 저것들도 지능이 있잖아.”

알아서 보고 피하라는 뜻이었다.

큼직한 트럭에 몬스터를 실어놓은 승지는 가다가 마음에 드는 몬스터가 있으면 가서 싸우고 이겨서 돌아왔다.

전리품은 따끈한 본체였고 말이다.

삐걱삐걱.

덕분에 트럭 짐칸에는 몬스터가 겹겹이 쌓였다.

“크아아악!”

“키리리릭!”

“쯔읏. 쯔으읏.”

다채롭게 울려 퍼지는 몬스터들의 신음 덕분에 지능이 있는 잔챙이들은 알아서 도망쳤다.

만족한 승지는 짐칸에 걸터앉아서 가끔 트럭을 부수려는 놈들만 주먹으로 진정시켜놓았다.

덕분에 최자림까지 상당한 체력을 아낄 수 있었다.

“운전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긴 하네요.”

“힉! 그래도 창문 옆에 촉수가 날아다니는 건 적응 안 됩니다!”

트럭 위에서 떨어진 몬스터 다리를 본 서명구가 애써 창밖을 외면했다.

그동안 승지는 마지막으로 잡았던 몬스터 위에 걸터앉아 쭉 뻗은 길을 바라보았다.

더 나올 놈 없나?

몬스터의 종류가 마구잡이로 섞여서 완벽한 콤보로 싹 쓸어버리기도 애매하고. 괜히 콤보가 끊기기만 쉬웠다.

적이 나보다 약해서 콤보를 이어나갈 수가 없다니!

마치 한 대만 쳐도 풀 피가 깎이는 상대 같았다. 무지하게 재미없다.

“하긴 이렇게 약하니까 박편호 같은 놈들도 뚫고 지나갈 수 있겠지.”

“네? 몬스터 소리 때문에 잘 안 들려요!”

“됐다. 앞으로 얼마나 남았냐!”

“곧 따라잡습니다!”

승지는 훨씬 더 망가진 도로로 진입하는 걸 지켜보았다.

아무리 봐도 굳이 자청해서 올 장소는 아니다.

사람들 눈을 피해서 할 일이 있다면 모를까.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이 다니지 않아 망가진 간판이 그대로 매달린 건물들이 서서히 나타났다.

승지는 그것들이 망가지고 부서진 상태에서도 여전히 네온사인에 불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누군가 안에서 전기를 쓰고 있었다.

“먼저 내린다.”

승지가 훌쩍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차가 멈추는 것보다 빨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삐걱.

그가 자연스럽게 무기의 형태를 전환하며 손가락 사이로 끼웠다.

가볍게 치기 좋은 톤파를 쥔 승지가 발끝으로 망가진 문을 열었다.

“박편호?”

두려울 게 없는 승지가 먼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무언가 희멀건 것이 움직였다.

“누, 누구?”

“!”

승지가 멈춰 섰다. 건물 지하로 내려가자 어딘가 익숙한 형체가 드러났다.

“자네는?!”

“너… 너 거기서 뭐하냐.”

투명한 알 속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박편호가 흔들리는 동공을 들어올렸다.

알 안에는 새까만 오물이 넘실거렸는데, 그 안에 든 박편호는 완전히 알몸이었다.

승지가 이마를 치듯 눈을 가렸다.

“아 ㅆ발 내 눈.”

“도, 도와주게!”

박편호가 다급히 첨벙거리며 걸어왔다.

“승지 씨? 무슨 일입니까?”

뒤늦게 쫓아온 최자림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렸다. 승지가 급하게 소리쳤다.

“야, 넌 들어오지 말아봐!”

“뭔데요? 혹시 위험하십니까!”

하지 말라는 일은 꼭 하는 최자림이 말을 안 듣고 쏙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 박편호를 목격했다.

“아닛? 커넥트 길드장님?!”

박편호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대체 몇이나 데려온 건가?”

“오지 말라니까, 썅.”

“오호호 세상에나. 그런 취미가 있으실 줄 몰랐는데요?”

최자림이 마구잡이로 킥킥거렸다.

저 인간한테 수치심을 기대한 게 잘못이지.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갇혔어?”

“보면 모르겠나!”

“그 꼴로 목소리가 크십니다요, 길드장님.”

“밑에 괜찮습니까? 으헉?!”

아무것도 모르고 내려오던 서명구가 기겁하며 사라설의 눈을 가렸다.

“뭔데요? 뭐가 있는데요?”

“끝날 때까지 우린 이러고 있죠.”

서명구가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이동했다. 사라설이 영문도 모르고 따라했다.

승지가 헛웃음을 지었다.

“평생 쪽팔릴 일은 여기서 다 겪는군.”

“제에길…….”

“꺼내드릴게요, 좀 기다리십쇼.”

최자림이 실실 웃으며 칼을 꺼냈다.

몬스터를 때려잡던 실력으로 최자림이 알에 돌진했다. 그런데 퉁, 하고 맑은 소리가 날 뿐 박편호를 가둔 알은 끄떡없었다.

“어라?”

“그 정도에 깨질 거였으면 진작 내가 깨고 나왔지!”

“그러게 설명을 하시라니까?”

승지가 알을 퉁 걷어찼다.

“댁도 범윤오 수색하러 간 거 아니었냐고.”

“하러 온 거지! 하러 온 건데…!”

박편호가 차마 말을 못하고 눈알을 데룩데룩 굴렸다.

“시… 실은 나도 그쪽한테 이용당한 거야.”

“변명 붙이지 마라.”

승지가 성질 급하게 알을 걷어찼다. 꿍 소리에 움츠러든 박편호가 무릎을 꿇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망할 줄이야. 젠장, 나도 그 놈이 이런 계획을 세운 줄 알았으면 협조 안 했을 걸세!”

일단 자백 하난 적립되었군.

승지의 경멸 속에서 박편호는 자신이 알러트에 붙은 첩자라는 사실을 나불나불 불었다.

“역시나. 뭣도 없는 놈이 길드장이랍시고 어떻게 그리 잘 먹고 잘사나 했다.”

“무슨 소린가! 난 원래부터도 돈이 좀 있었어! 범윤오가 접근한 것도 그것 때문이란 말일세!”

알러트가 비각성자를 각성자로 만든다고 홍보하기 전에, 먼저 접촉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조직 자금에 쓸 만한 호구들을 상대로 말이다.

어쩐지 그 새끼들이 기부단체도 아닌데 순순히 각성시켜주는 게 이상하다 했다.

이미 떼어먹을 놈들은 다 해쳐먹은 뒤 였구만?

“그렇게 바라던 각성자가 되었는데도 정작 다른 랭커들은 강하지, 몬스터들도 만만찮지. 심지어 곧 이 세계까지 끝난다지 않나!”

“잠깐. 마지막 말은 뭐냐?”

승지가 짜증스럽게 그의 말을 끊었다.

“각성자가 됐으면 마왕 새끼들이랑 싸워서 이길 생각을 해야지 벌써부터 성좌신이 뒈질 것부터 생각해?”

“하지만 알러트에선 절대 성좌신이 이길 일은 없다고 했단 말이다!”

“웃기시네. 그럼 인간이 다 죽는다는 소린데 그걸 듣고도 가만히 있을 인간이냐?”

승지가 쾅쾅 알을 걷어찼다.

“분명히 뭔가 더 얘기를 했으니까 모른 척 길드장으로 살았겠지.”

“……실은 각성자들이 알러트로 간 이유가 있었어. 설령 성좌신이 죽더라도 대장이 마왕이 될 테니까 조직원들을 보호해줄 수 있다고 말이야.”

“역시나.”

광대가 아이샤에게서 듣고 왔던 얘기에서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멍청한 놈. 그걸 믿냐?”

“하지만 정말로 마왕이 될 것처럼 보였단 말이지!”

“마왕을 믿은 거면 더 골 빈 거지.”

승지의 말은 가차없었다. 박편호가 욱해놓고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납치해간 인간들은 다 어딨어. 범윤오나 그 새끼들이랑 여기서 뭔 짓거릴 한 거야?”

“난 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문지기로 살았을 뿐이야!”

옛날에 백정민이 하던 짓이다. 현실에서 기다리며 다른 놈들이 던전을 오갈 수 있도록 중간 다리 역할을 한 것이다.

“망할 새끼들. 범윤오가 현실에 있을 거라면서 다 틀렸잖아.”

“현실에 있는 거 맞아!”

박편호가 다급하게 앞으로 상체를 들이밀었다.

“나도 길드 연합 소속이니 아이샤가 말한 얘기는 다 전달받았네! 그 수십 개의 위치가 모두 범윤오가 맞아!”

“헛소리 할래?”

“정말이야! 단지 범윤오라고 뜬 장소에 있는 것들이 모두 인벤토리라서 랭커들이 급습해도 보이지 않았던 것뿐이라고!”

내내 개소리만 하던 박편호가 처음으로 쓸 만한 소리를 내뱉었다.

“인벤토리라니?”

“내 말 좀 잘 들어보게! 범윤오가 그 사람 각성시키는 스킬로 납치한 인간들을 각성자로 만든 다음 각자의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거야!”

“그럼 본인이 다시 열고나올 수 있잖아요?”

듣고 있던 최자림이 팔짱을 끼며 되물었다.

“원래라면 그랬겠지…! 제길, 하지만 그렇게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다음 다시 성좌를 빼앗아간단 말이야!”

박편호가 식은땀을 흘리며 고함을 질렀다.

“그럼 성좌를 되찾기 전까진 인벤토리를 열 수 없어서 갇혀버리고 말아!”

승지는 광대가 자기 몰래 밤 외출을 했던 날을 상기했다.

선잠에서 깨었던 그는 광대가 사라진 걸 인벤토리를 열 수 없다는 사실로 알아차렸다.

그와 같은 일을 수 십, 수 백의 사람이 겪고 있는 것이다. 지금 동시에.

최자림이 홀린 듯이 감탄했다.

“그거 대단한데요?! 그럼 범윤오는 그 때마다 자기 성좌를 심어놨다가 다시 빼앗는 식으로 모두가 혼란에 빠지게 했군요! 왜 한꺼번에 몇 백 명이나 범윤오가 뜨는지 이제야 알겠네!”

“잠깐만. 그럼 왜 전세계야?”

승지가 미간을 좁혔다.

“단순히 성좌를 빼앗고 가둬둘 거면 굳이 그렇게 퍼트려놓을 필요 없잖아.”

“……인벤토리에는 사람만 들어있는 게 아니야.”

박편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폭탄이 들어있어. 마왕의 손이 닿은 폭탄이….”

충격과 동요가 순식간에 사람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뭐?”

“성좌가 죽어도 사람은 죽지 않지만… 사람이 죽으면 거기에 연결되어있는 성좌는 죽어. 성좌가 죽는다는 건 인벤토리도 함께 사라진다는 뜻이지.”

인벤토리 안에서도 사람은 움직일 수 있다.

강제로 갇힌 사람들이 천천히 움직이다가 허기와 피로로 쓰러져 죽는 순간 인벤토리가 사라지고 범윤오가 집어넣은 폭탄이 전 세계에 나타나게 된다!

승지가 쌍 소리를 내뱉었다.

“미친! 이 미친 새끼가…!”

“그걸 알면서도 안 알렸습니까!?”

최자림마저 경악해서 목소리가 커졌다.

박편호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나도 방금 전에야 알게 된 거야.”

“그래도 알렸어야죠! 당신이 양심이 있으면…!”

“나도 하고 싶었네!”

박편호가 완전히 패닉에 빠져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내 성좌는 죽었어! 그것 때문에 경매장이든 대화창이든 켜서 연락할 수가 없었다고!”

“당신 성좌가 죽었다고?”

박편호가 알 속에서 창백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제 곧 범윤오도 이 알, 그러니까 이 인벤토리 속에서 자신의 성좌를 죽이는 데 성공하면 마왕이 되어서 깨어날 거야!”

“……네?”

내내 듣고 있던 사라설이 힘이 풀린 서명구를 밀치고 다가왔다.

박편호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이 깔고 앉은 질척거리는 액체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이게 내 성좌의 시체란 말이야. 나도 여기서 나가면 마왕이 될 테고, 그럼 범윤오가 달려와서 잡아먹겠지!”

박편호가 손을 덜덜 떨었다.

“비각성자는 폭탄으로 쓴 그 미친놈이 각성자는 마왕이 되고나서 잡아먹을 양식으로 삼을 작정이네! 지금까지 성좌에게 모아둔 힘을 단숨에 마왕으로 바꿔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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