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즐거운 나의 집 (4)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너무 나가십니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걸세. 나도 말이야. 자네가 갑자기 과거로 뿅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 이걸 해결하면 된다고 말하길 믿지는 않아.”
번태가 느긋하게 말했다.
“다만 희망이 있다면 걸어봐야지. 그래서 자네를 부른 거야.”
랭킹 1위는 전략을 짠다, 이건가.
어차피 사냥으로는 일가견을 이뤘으니 슬슬 큰 그림에 대해서 생각해볼 만도 했다.
승지는 성좌의 상태창이 있는 쪽을 슬쩍 곁눈질했다.
[능력이 시간이라니 나도 전혀 모르겠어! 이건 내가 마왕 얘기를 못하는 거랑 별개! (oXo)!]
승지의 얼굴이 제법 심각해 보였는지 번태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자네한테 갑자기 인류의 운명을 맡긴다거나 하는 소리는 아니니 부담가지기 말게!”
“충분히 그렇게 들렸습니다.”
“하하! 사람 하나로 해결될 거였으면 다들 왜 이 고생을 하고 있겠나!”
“어라, 그런 면에선 나랑 말이 좀 통하십니다?”
승지와 번태가 동시에 껄껄 웃었다. 류의건은 의외로 죽이 맞는 두 사람을 보며 난감해졌다.
“하지만 승지 씨가 시간을 다루는 능력을 가졌다고는 해도 왜 스탯과 상관없이 스킬을 쓸 수 있는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아아. 그거야 말로 연구 대상이지.”
번태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난 그게 마왕의 힘이 아닐까 추측한다네.”
“예?”
[뜨에엥?]
“마왕이라뇨!”
성좌마저 경악한 소리를 내질렀다. 번태가 멀뚱히 눈을 깜박였다.
“왜들 그러나? 성좌신이 준 힘 아니면 마왕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게 제일 자연스럽지 않나? 혹시 승지 자네에게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그럴 리가 있겠냐고요. 게다가 내가 그 말 때문에 시달린 게 좀 많습니다?”
“대충 들어서 아네! 그래서 더욱 우리 길드에 와줬으면 좋겠다는 거야!”
“?”
제멋대로 튀는 화법에 승지는 어이가 없었다.
“거 마왕이랑 친목회라도 따로 하는 사이라도 됩니까? 마왕의 힘 좀 가졌다고 길드까지 끌어들이는 인간이 어딨습니까?”
“하핫! 마왕한테 원한은 많이 사서 술래잡기까진 할 수 있겠네만! 난 마왕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영입한다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함께 할 자격이 있지.”
번태가 해맑게 이를 드러냈다.
“무엇보다 본인이 마왕까지 잡을 정도로 싫어하는데 까짓 거 마왕한테 힘 좀 뺏어다 쓰면 어떤가! 오히려 좋지!”
[우와… 엄청 긍정적인 사람이네. 마왕이라면 당연히 꺼리는 게 정상이잖아!]
번태는 길드 연합처럼 마왕이랑 연관된 건 죽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함께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다른 인간이 말했으면 마왕의 힘을 이용하려는 더러운 꿍꿍이라도 있을까 의심했을 텐데, 저 인간이 말하니 왜 설득력이 있냐.
하긴 그 때처럼 승지가 살아있으면 마왕이 무조건 소환된다는 얘기도 없고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니 저번 일과 경우가 다르긴 했다.
[근데 진짜 승지한테 준 힘은 마왕이랑 아무 관련도 없어! 이건 약속해! 나도, 각성도 성좌신이 준 힘이야!]
“알았다, 알았어.”
승지는 팔짱을 꼈다.
어쨌든 그도 마왕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대열에 합류하게 된 뒤였다. 그렇다고 유청처럼 이성까지 놓아버릴 정도로 미치진 않았지만.
마왕의 힘이라도 뭐 어떠냐면서 무작정 써버릴 정도로 떨어지진 않았다.
그건 알바로 생활을 때워오면서 어차피 사장이 개새끼니까 돈은 좀 훔쳐도 된다는 다른 놈들이랑 선을 긋는 문제였다. 양아치냐, 아니냐. 하는 자신만의 기준이 있으니까.
승지는 대신 망치를 들고 본인한테 직접 찾아가 어떤 잡놈들이 가게 물건을 훔쳐가든 말든 유리창을 다 깨버리겠다고 했다.
사장은 뚝딱 밀린 월급을 내주었다.
결론은 내가 당당한데 왜 도둑놈처럼 눈치를 봐야 되냐고?
자신이 각성한 것도 성좌신이 제대로 고른 거지, 여기에 어떤 마왕 새끼가 끼어들었다면 엿이나 처먹으라고 해라.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번태의 제안은 좋은 이야기긴 했다. 아까 금괴를 바꿀 때 냉큼 현금을 내줄 만큼 자금도 넉넉하고 랭킹 1위까지 있는 지원까지 짱짱한, 회사로 따지면 대기업에서 스카웃이 온 거니까.
승지가 각성하기 전이라면 혹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길드로 들어가서 안락하게 남들이랑 같이 사냥 다니고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지금이 훨씬 좋았다.
게다가 혼자 일한다고 돈을 못 버는 세계도 아니잖아. 내 75억아.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본인 사업을 하는 게 회사 밑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낫지!
번태가 얼마나 좋은 조건을 제시할진 모르겠지만 승지는 더 크게 해먹고 싶었다.
귀찮게 길드까진 만들 생각이야 없고, 아직은 나 혼자 뛰고 싶다.
“제안은 고맙지만 안 되겠습니다.”
“거절하는 건가? 이거 아쉽구만!”
여태까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굴던 류의건이 안절부절하며 조언했다.
“…승지 씨. 제가 이런 말씀 드리긴 그렇지만 다시 각성자로 돌아오시게 되면 필연적으로 길드 연합과 다시 만나게 되십니다.”
“껄끄러운 놈들이긴 하지. 근데 안 보면 그만이잖아?”
태연한 승지의 대답에 번태가 끼어들었다.
“이런, 자네 몰랐는가? 50위 이내의 랭커쯤 되면 단순히 미션만 하는 게 아니라 정부에서 부탁한 일도 처리해야 한다네.”
“뭐요?”
순식간에 승지의 머릿속에 더러운 암흑가 광경이 마구 펼쳐졌다. 정부의 일을 은폐하기 위해서 각성자들이 몰래 사람을 죽인다거나!
역시! 그래서 길드 연합 놈들이 미쳐있었나!
류의건이 땀을 삐질 흘렸다.
“저어 무슨 생각 하시는 진 알겠지만 상상하시는 그런 일은 아닙니다. 각성자 시대에 공무원이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하는 거죠.”
“사람 죽이고 그딴 거 시키는 거 아니야?”
“네에?! 여기가 무슨 독재 국가도 아니고… 아닙니다! 전혀!”
“자네 영화를 많이 봤구만!”
번태가 껄껄 웃었다.
“각성자가 범죄를 일으킬 때는 보통 인력으로 해결이 안 되니까 같은 국민으로서 돕는 겁니다. 그래서 각성자들한테 혜택을 많이 주기도 하고요.”
“완전히 히어로가 따로 없지!”
“아, 그러네. 납득했다.”
어쩐지 각성자들이 공익광고를 많이 찍더라니.
소문으로는 각성자들이 주인공인 영화도 제작된다는 얘기가 돌았지만, 실제로 미션을 수행하는 각성자들 영상이 고화질로 돌아다니니 굳이 영화로 볼 필요도 없었다.
진정한 영웅, 인류를 지키는 각성자들. 뭐 2차 각성자가 나오기 전까진 대충 그런 문구로 열심히 언론 팔이를 했었다.
“난 지금도 인기가 너무 많아서 찍힐 때마다 번뜩이는 빛으로 얼굴을 가리곤 있지만 아무래도 1위는 1위라 가려도 알아보더군! 하하하!”
번태가 턱 밑에 브이 자를 그렸다.
연예인 병 말기라고 하기엔 류의건의 인기를 몸소 보았으니 뭐라고도 못하겠군.
“아무튼 미션에는 지장 없을 때마다 랭커들이 모여서 범죄를 소탕합니다. 그들을 방치하면 결과적으로 미션에 방해가 되니까요.”
“음, 음. 그렇다네! 사실 알러트만 조용하면 크게 어려운 일도 없어! 초창기엔 범죄가 좀 있었지만 랭커들이 금방 다 제압을 했거든!”
각성자가 생긴 이후로 대부분의 정부 대책은 각성자들의 일은 각성자들에게 맡긴다, 는 조금 안이한 방향이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적어도 선악이 확실해 보이는 성좌신의 페널티 시스템 덕분이었다.
비각성자를 해칠 때마다 받는 페널티 때문에 각성자들은 폭주하지 않을 수 있었고, 각성자들끼리도 견제가 이뤄졌다.
용케 그 와중에 세력을 불린 놈들이 알러트다 이거였지.
“길드 연합에 당연히 랭커 들이 있을 테니 결국 부딪치게 된단 얘기구만.”
“네. 승지 씨는 마왕을 잡은 업적이 있으니 스탯이 조금 낮아도 바로 랭커에 등극할 거라 생각합니다.”
네 생각만큼 스탯이 낮지 않을 걸? 젠장할. 이래나 저러나 랭커 확정이군.
끙 소리를 낸 승지가 말했다.
“각성자 등록 안하고 그냥 미션만 하면 안 되냐? 지금처럼.”
“…승지 씨. 아까 세금 보셨죠.”
[헙!]
류의건이 자본주의의 핵심을 꽃피우듯 세금 문제를 날렸다.
“각성자가 된 다음에 벌어들이는 돈을 일반인 신분으로 처리 하시기엔 힘드실 걸요. 정말… 많이 버는 분은 어마어마합니다.”
“……무시하기 매우 힘든 말이군.”
“게다가 각성자 신분이 아니면 다쳤을 때도 일반 병원으로 가거나 포션을 구입할 때도 상당한 제한을 받네. 수급은 적은데 효과가 좋으니 미션처럼 위험한 상황에 빠지지 않는 일반인이 자꾸만 구입하려고 들거든.”
번태도 꽤나 설득력 있게 덧붙였다.
결국 각성자 생활 계속 하려면 등록이 필수란 소리다.
“그분들도 한 일이 있으니 승지 씨를 껄끄러워할 텐데, 차라리 어둑시니 길드에 들어가 귀찮은 일을 차단하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나 개수작 잘 막네!”
번태가 당당하게 수긍했다. 승지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째 랭킹 1, 2위 둘 다 연합이 거지 같다는 건 부정을 안 합니까?”
“사람이 모이다 보니 항상 순기능만 하진 않잖나. 슬프지만 받아들여야지.”
번태가 나름대로 연륜이 깃든 미소를 지었다.
꺼림칙하게 그를 본 승지가 코웃음을 쳤다.
“아, 됐다. 날 죽이려고 한 놈들이면 오히려 앞에 나타나서 신경 거슬리게 해줘야지.”
“예? 하지만 마왕을 잡은 것도 아직 비밀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상황 아는 윗대가리들만 입 다물면 되는 거 아니냐? 마왕을 잡기 전까지는 숨어사는 거 동의했지만 이젠 아니야.”
내가 뭐하러?
“벌벌 떠는 건 죄지은 놈이 해야 할 일이라는 걸 알려주지! 싹 입 닥치게 해주마!”
승지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류의건은 왠지 모를 섬뜩함에 부르르 떨었다.
“…또 팔 자르시게요? 이젠 저도 대신 걸 팔 다리가 안 남았습니다.”
“으응? 그건 또 무슨 얘기인가?”
호기심의 냄새를 밭은 번태가 눈을 반짝거렸다. 승지는 걱정을 잘랐다.
“글쎄, 네가 보증을 선다고 해도 그 새끼들이 랭킹 2위가 잘못될까 무서워서 착하게 살 것 같진 않다만. 그럼 걸어봤자 소용없잖아. 역시 직접 잘라야….”
“승지 씨!”
“농담이다. 농담. 나 죽인 놈 하고 죽이려던 놈들하고는 경우가 다르지.”
크게 다르진 않지만.
“각성자들 한테 팔다리를 끊어놓는 것만큼이나 괴로운 게 있다면 좀 알려주십쇼. 참고하게.”
“아하, 복수전인가!”
류의건에게 열심히 속닥속닥 얘기를 캐물은 번태가 열성적으로 나왔다.
“그 친구들도 한 번쯤 당해볼 때가 되었지! 우리 길드랑은 별개로 지원해주겠네!”
“좋아! 화통하시네!”
“아무리 그래도 악의에 똑같이 악의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류의건이 열심히 설득을 시도했지만 이미 아무도 듣지 않았다.
“류의건 선생. 내가 언제나 선생의 바른 의지엔 감탄하고 있지만 처벌은 필요한 거 아니겠나!”
“그래, 이건 정당방위지!”
맞고만 살 수 없는 승지와 재밌는 일엔 빠지지 않는 번태가 쑥덕거리며 일을 꾸미기 시작하자 류의건은 울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