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뒤통수 (3)
끊임없이 변화하던 불꽃이 멈췄다.
프레임에 갇혀버린 마그니는 놀라는 표정조차 짓지 못했다.
역시.
범윤오 따위에게 지배될 지능이면 당연히 프레임 컨트롤이 먹혀줘야지.
승지가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코스모스 센터 때도 너였지?”
이제 보니 오조희가 말했던 인상착의도 범윤오와 일치했다.
다만 알러트가 생겼을 당시에 너무 어려서 모두들 용의선상에서 제외하고 있었을 뿐이다.
승지가 마왕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뿅망치 형상이었던 무기가 빠르게 변화했다.
“염소 대가리 던전도 너였지?”
양손으로 무기를 쥔 승지가 야구공을 치듯 마그니를 강타했다.
후르륵!
마치 불이 무기에 옮겨 붙는 것처럼 마그니의 몸이 휘어졌다.
[먹혔잖아?! 어떻게!]
“먹히면 됐지 이유가 필요해?”
주먹을 비튼 승지가 연달아 무기를 내리쳤다.
퍽! 퍽! 퍽!
승지가 내리칠수록 마그니가 점점 더 작아졌다.
마치 때려서 불을 끄는 듯 했다.
마그니가 정령 형태였을 때는 흡수하지 못하던 마왕의 무기가 공격할 때마다 튀는 불꽃은 쉽게 빨아들였다.
[아아! 무기가 먹기 좋게 승지가 으깨주는 거구나! 어미 새 같아!]
잘 패던 승지가 그 말에 살짝 미끄러졌다.
“그런 표현 좀 자제하자.”
[왱. 우리 승지가 그만큼 멋지다는 건뎅!]
어디가 멋있냐.
승지가 패는 대로 크기가 작아진 마그니가 조금씩 프레임 컨트롤에서 풀려났지만, 그 때쯤엔 이미 승지의 무기가 절반 이상 몸을 먹어치운 뒤였다.
승지는 남은 불꽃 하나까지 남기지 않고 모조리 후드려 패고는 40콤보 스킬인 발경으로 마무리했다.
투웅!
마그니가 재 하나 남기지 않고 흩어지자 알림창이 새로 떴다.
[ 메인 미션 완료! ]
[ 보상 : 스탯 분배치 10, 스킬 ‘불의 형상’ ]
간만에 보는 보상이 썩 마음에 들었다.
역시! 사람은 싸우면서 살아줘야 해.
속이 시원해진 승지가 무기를 내리자 길쭉했던 무기가 뿅망치로 돌아왔다. 그가 허리를 폈다.
“이제 나와라. 범윤오.”
승지가 외쳤지만 범윤오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린 승지가 욕설을 내뱉었다.
“이 새끼, 그새 튀었어?”
울컥한 승지가 성질을 냈다.
지붕 위에는 바람만 불었다.
[승지야! 이것 좀 봐봐!]
“왜?”
성좌가 동시에 여러 메시지 창을 띄웠다.
[ 어둑시니 길드에 메인 미션 발생! ]
[ 청월량 길드 습격자 확인! ]
[ 강남구 메인 미션 경보 확인 요망! 몬스터 정보 : 정령 ]
“뭐야 이거.”
승지가 휘리릭 메시지 창을 넘겼다.
서울 곳곳에 동시다발적으로 정령이 습격한다는 제보가 올라오고 있었다.
“범윤오 이 자식, 나한테만 괴물을 보낸 게 아니었나?”
아니었다.
쿠웅!
모래의 정령을 맞이한 번태가 폭풍 앞에서 길드원들과 함께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것 참! 모래라서 내 스킬도 안 통할 테고! 꼭 날 아는 사람이 보낸 것 같구만!”
“다른 각성자들도 지금 도움 요청을 계속 보내고 있어요!”
“여긴 저희한테 맡기고 이동하세요!”
길드원들이 믿음직스럽게 외쳤다. 번태는 아주 뿌듯해하며 외쳤다.
“아하, 역시 이래야 내 길드원이지! 막아내세! 그래야 우리 모두가 무사히 파티에 참여하지 않겠나!”
쿠르릉!
번개가 내리치며 번태의 모습이 사라졌지만 길드원들은 침착하게 움직였다.
“스킬 완료 전까지 개인 보호 스킬 모두 올려!”
“건물은요? 다 들어가기엔 범위가 모자랍니다!”
“일부는 포기한다!”
그들이 포기한 건물의 일부, 그 아래층에 유월이 있었다.
알러트 본진에서 붙잡아온 간부들은 끈질긴 압박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유월이 심리 전술에 약한 걸 감안해도 사흘이나 먹고 마시지 못했는데 침묵을 지키는 건 독했다.
축 처진 채 벽에 매달려 있는 인간들을 노려보던 유월이 다시 한 번 같은 질문을
“내 동생의 성좌는 어디 있지?”
번태가 커버 쳐주고 자신이 둘러대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정부 소속 인사와 국제 수사관이 몇 번 들리긴 했지만 곧 정부로 송환해야한다는 요청서가 서면으로 도착했다.
각성자를 제압할 공무원이 없어서 지금까지 버텨왔지만, 더 길어지면 정부의 의뢰를 받은 랭커들이 올 것이다.
그러니 유량의 성좌를 찾을 기회는 지금뿐인데.
초조해진 유월이 다시 한 번 벽에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박혀있던 검을 빼냈다.
“유량의 성좌는 어디 있어!”
콰과광!
그 때 천장에 금이 가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
유월이 급하게 낙석을 피했다.
적습?
유월이 무딘 칼로 천장의 잔해를 쳐냈다.
까강! 칵!
유월 주위로 안전지대가 생기듯 둥근 자리가 남았다.
그러나 한 차례 떨어지는 바위를 막았을 뿐 이미 건물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걸 직감한 유월이 급하게 매달려있던 간부들 쪽을 바라보았다.
혼란을 틈타 도망가면 곤란해졌다.
카라락.
유월이 벽에 박혀있던 사슬을 잡아 뜯듯 움켜쥐었다.
두두득!
움켜쥔 주먹을 따라 벽의 잔해와 사슬이 딸려 나왔다. 그대로 사슬을 뜯어낸 유월이 간부들에게 윽박질렀다.
“이리 나와!”
“…….”
매달려 있던 간부들은 조용했다.
왜 움직이질 않지?
유월이 급하게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내려왔다. 그리고는 직접 힘으로 그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차르릉.
사슬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나와! 죽고 싶어?”
그때 한 인간이 입술을 달싹였다. 하얗게 버짐이 핀 입술에서 나오는 소리는 계속해서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뭐?”
“…우린 이미 자유로워졌다.”
간부들이 동시에 히죽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유월이라도 등골이 섬뜩해지는 표정이었다.
오싹함을 느낀 자신에게 오히려 분노하듯 유월이 사슬을 한 손으로 모아 쥐었다.
그러나 제대로 당기기도 전에 나타난 존재가 사슬을 끊어냈다.
카가강!
“읏!”
이미 오래 전에 전기가 끊긴 어둠 속에서 쇠 불꽃이 튀었다.
[ 메인 미션 발생! ]
유월이 사슬을 놓고 물러났다.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인간 형체의 정령이 보였다.
바깥에서 나타난 모래의 정령과는 다른 정령이었다.
물론 유월은 그런 사정까진 알 수 없었으나. 적을 본 그가 곧바로 임전태세에 들어갔다.
“크어어…!”
제 손 끝을 뾰족하게 만든 정령이 꿀렁이며 유월에게 달려들었다.
잠시 간부들을 잊어버린 유월이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정령의 강함보다도 계속해서 흔들리는 건물이 부서지는 걸 신경 쓰는 게 더 어려웠다.
때문에 유월은 갑자기 나타난 정령을 몰아붙이면서도 다른 생각을 했다.
메인 미션은 보통 시가지에서 무작위로 발생했다.
이렇게 특정한 개인을 노리고 몬스터가 나타나는 경우는 류의건 각성자처럼 한 마왕이 집요하게 추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을 노리는 마왕은 누구란 말인가?
쨍그랑!
유월이 인벤토리를 열며 손으로 포션 병을 부쉈다. 생채기 하나 남지 않는 손아귀에 포션이 주륵 흘렀다.
그대로 정령의 심장을 움켜쥘 듯 파고들며 유월이 칼을 지지대 삼아 거리를 좁혔다.
정령의 주인인 마왕은 마무자. 인격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류의건을 쫓는 드래곤과는 사정이 다르다.
다른 마왕의 힘을 다루던 알러트 보스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서야 이런 습격은 불가능했다.
신성 포션을 바른 손으로 정령을 갈기갈기 뜯어낸 유월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지금 청월량 길드엔 누가 있지?
가족이 위험에 빠질 지도 모른다!
유월의 예감대로 청월량 길드도 습격을 받는 중이었다.
쿠웅!
창문을 막아놓은 철판을 물의 정령이 후려쳤다. 벽면에 매달린 정령은 사방에 비를 뿌리며 포효했다.
“위층을 보호해!”
“유량 님을 누가 데리고 나와야…!”
문하생들이 모두 뛰쳐나와 무기를 들었지만 번번이 그대로 정령의 몸을 통과했다.
순수한 원소의 정령은 신성 포션의 힘으로도 제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들 비키십시오!”
유청이 뛰쳐나왔다. 문하생들의 얼굴이 잠깐 밝아졌다가 도로 어두워졌다.
유청의 팔이 여전히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유청은 주변의 반응을 고스란히 느꼈으면서도 억지로 무시했다. 팔이 하나 없어도 그들보다는 자신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유인할 테니 안쪽을 대피시키십시오!”
“네, 네!”
유청이 튕기듯 솟구쳤다. 건물에 매달린 물의 정령에 비하면 그는 이쑤시개보다 못한 크기였으나 한쪽 팔에 모여드는 힘의 기운은 달랐다.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놈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공기를 압축하듯 힘을 실은 유청의 주먹이 물의 정령에 꽂혔다.
파아앙!
대포를 맞은 듯 커졌던 물의 정령이 회전하며 다시 굽어지기 시작했다.
때리느라 거의 앞으로 넘어졌던 유청이 다급히 발을 꺾어 몸을 지탱했다.
승지 밑에서 구르느라 이제 몸을 쓰는 일은 쉬웠다.
자신감을 되찾은 유청이 대각선으로 기울어진 벽면을 마치 평지처럼 타고 달렸다.
그러나 물의 정령을 상대하면서도 그는 정령이 정확하게 유량이 있는 층을 노렸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모두가 습격을 받는 순간 아직까지 무사한 인간이 있었다.
류의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신은?”
“어, 형님까지 있을 줄은 몰랐는데.”
허공에서 나타난 범윤오가 머쓱한 듯 씩 입꼬리를 올렸다.
류의건은 백정민에게 마지막 잔금을 치르려고 만난 상태였다.
스파이로 들어간 백정민은 알러트 본진을 안내한 것 외에도 그들이 유통한 마약의 범위나 납치한 인간들을 알려주었다.
그 정보를 사느라 류의건의 자금이 상당히 많이 소모될 정도였다.
번태는 본진만 털고 손을 바로 뗐지만 류의건은 여러 가지 도덕적 책임감 때문에 남은 잡일을 치렀던 것이다.
그런데 백정민을 만나는 자리에 범윤오가 나타난 것이다. 백정민도 다소 놀란 눈치였다.
범윤오는 과장스럽게 고개를 휙휙 돌리더니 말했다.
“벌써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알러트 보스거든요.”
류의건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뭐하러 나타난 겁니까?”
“뭐긴요. 일하러 온 거죠. 외근 그만하고 복귀해라. 쫄병. 마지막 작전이다.”
“쫄병이라고 부르는 거 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백정민이 태연하게 범윤오와 대화하는 걸 본 류의건은 더욱 말문이 막혔다.
“저 자는…! 당신이… 어떻게? 처음부터 이중 스파이였습니까?”
“아닌데.”
백정민 대신 범윤오가 말했다.
“아~ 날 배신한 거 때문에요? 뭐, 그 정도야. 처음부터 돈 때문에 모였는데.”
백정민도 피식거렸다. 그도 갑자기 배신한 옛 보스를 만나 당황한 기색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연봉 협상 시즌이군요. 옛 보스는 얼마나 쳐주실 겁니까?”
“원하는 만큼. 생각보다 댁이 쓸 만하더라고?”
백정민이 여전히 벙찐 류의건에게 손을 흔들었다.
“미안하게 됐군. 이제 그쪽에서 받을 만큼은 다 받아낸 거 같아서.”
“애초에 쓰레기를 믿는 게 잘못이었죠, 형님. 돈 날렸네요.”
범윤오가 태연하게 키득거렸다.
류의건은 의리라곤 존재하지 않아 오히려 자유로운 모습을 보고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나 당혹은 짧았다.
류의건이 어두워진 표정으로 칼을 뽑았다.
“내가 그대로 놓아줄 거 같습니까?”
“그럴 거 같은뎅?”
범윤오가 얄밉게 깐족거렸다.
“이제라도 내 쪽으로 올 생각 없습니까, 형님? 진짜 잘해드릴게.”
카앙!
대답 대신 류의건의 검이 내리쳐졌다.
그러나 이미 투명한 막은 범윤오와 백정민을 모두 감싸고 있었다.
범윤오의 눈이 검게 일그러졌다.
“안타깝네.”
[ 메인 미션 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