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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이세계인을 주웠습니다만 (2)

스르륵.

벽에서 가늘고 긴 손가락이 빠져나왔다. 다른 사람의 꿈에 침투하듯 부드러운 움직임이 박제로 만들어진 듯한 미인의 모습을 드러냈다.

주술로 홀리지 않으면 누구나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 것이다. 보통 서큐버스가 사람을 만날 때는 가짜로 만든 혈색을 더하고, 체온을 높인다.

하지만 승지를 만나러 온 큐라는 굳이 그런 수고를 더하지 않는다. 어차피 승지에게는 통하지 않았으니까.

“어머나?”

그래도 이런 광경을 볼 줄은 몰랐던 큐라가 싱긋 웃었다. 침대 위에서 무릎을 세워 앉아있던 승지가 자신이 나타나자마자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 큐라가 입을 가렸다.

“자기야. 설마 나 기다렸어?”

에라이, 젠장.

무표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입안이 떫어서 연기가 잘 안 됐다.

유월은 만나지도 못하는데 이게 뭔 짓거리냐.

[파이팅! 승지야! 이번 일은 모두 너한테 달렸어!]

성좌가 열심히 응원해봤지만 승지는 간신히 일그러지는 얼굴 근육만 버티고 있었다.

그래, ㅆ바. 차라리 잘 됐어. 언제까지 매일 밤 서큐버스한테 시달릴 거야. 차라리 이참에 해결을 보는 게 낫지.

승지는 일부러 서큐버스한테만 시선을 고정했다.

어차피 보이지 않겠지만 지금 방구석에는 각자의 인벤토리에 들어간 류의건과 유청이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두 사람이 뛰쳐나온다는 걸 알면서도 승지는 계속 신경이 거슬렸다.

작전인 거 아니까 참는 거다. 참아.

큐라가 매끄러운 팔로 승지의 뺨을 감쌌다. 뜻밖에도 쳐내지 않고 얌전히 있는 승지를 보곤 큐라도 태도가 나긋해졌다.

“어쩐 일일까. 잠을 자려는 노력도 포기하고.”

“지긋지긋해져서 그렇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말을 곱게 할 자신은 없었던 승지가 투덜거렸다. 큐라가 뾰족한 턱으로

“이제 따라올 마음이 든 거야?”

“뭘 알아야 따라가지. 먼저 설명해야 되는 거 아니냐? 밤마다 찾아온 쪽이 누군데.”

승지가 큐라의 정수리에 손을 올렸다.

웬일로 그의 손을 통과시키지 않은 큐라가 얌전히 긴 속눈썹을 깜박였다. 사람 같지 않게 너무 길어서 징그럽군.

“매번 거절하기도 지친다. 조건 들어보고 맞으면 따라가 줄 테니까 영업이란 걸 해보시지?”

큐라가 씩 웃었다.

“이세계의 진실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아?”

“언제적 세계 팔이냐. 구체적으로.”

“뭐야. 까다롭긴. 구체적인 걸 원하면 구체적인 걸 물어봐야지?”

“좋아, 그럼 구체적으로 던전이 뭐냐?”

승지가 냉큼 직구를 던졌다. 저 녀석, 떡밥을 던지자마자 물어주다니 확실히 데려갈 마음은 있었던 건가.

큐라가 여유롭게 대답했다.

“던전은 마왕님의 소유지.”

“말 꼬지 말고. 왜 던전에 열쇠가 있고 각성자들이 거기서 깽판을 치게 놔두는 거냐고. 게다가 다 박살낸 다음엔 던전이 알아서 꺼져주는 건 또 왜야?”

“어머나. 각성자가 던전을 보는 관점 치고는 신선했어.”

큐라의 눈빛이 약간 변했다.

“마왕님들이랑 성좌신이랑 사이가 안 좋은 건 알고 있지? 던전은 그 영역다툼 같은 거야.”

“영역다툼?”

“성좌신의 구역을 마왕님이 점령하면 더 이상 신의 법칙을 적용할 수 없는 땅이 되지. 하지만 원래는 성좌신 구역이니까 그 쪽도 발악을 하잖아? 발악의 흔적이 너희들이 말하는 던전이랑 열쇠라는 형태로 나타난 거야.”

“그러니까 니들이 남의 집 털어놓고 주인까지 내쫓았는데 집 열쇠가 있는 주인이 열 받아서 대신 때려눕힐 각성자를 끌고 돌아왔단 소리네?”

“아하핫! 맞아. 요약 잘하네?”

큐라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놈 자식들은 죄의식이란 게 없나.

역시 마왕이나 그 부하들에게 제대로 된 도덕을 기대하긴 힘들 것 같았다.

열쇠 개수를 보면 마왕 놈들이 가진 던전이 한 두 개가 아니던데, 그럼 대체 얼마나 털어먹은 거야?

“그리고 던전은 사라지지 않아. 마왕님의 힘을 잃고 소유자가 없는 땅이 되어서 출입 금지를 당할 뿐이지.”

“원래 성좌신 땅이라면서? 주인한테 돌아가는 거 아냐?”

“한 번 빼앗겼던 땅은 되찾은 뒤에도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거든.”

큐라가 승지의 턱 밑을 손끝으로 올렸다. 체념한 승지가 말했다.

“집주인 빠지면 다음 주인 나올 때까지 던전에 못 들어간단 소리를 뭘 그리 어렵게 하냐.”

“후후. 난 자기가 글라세로 마왕님을 죽여도 던전이 남아있는 걸 보고 이미 알아차렸을 줄 알았지.”

“그걸 어떻게 아냐. 어쨌든 이제 그 냄새나는 놈 면상 안 봐도 되는 건 좋긴 하다만.”

“글쎄?”

큐라의 반응이 미묘했다. 갑자기 의구심에 사로잡힌 승지가 물었다.

“…설마 안 뒤졌냐?”

“아냐. 글라세로 마왕님을 당신이 죽였지. 하지만 한 번 부활했던 마왕이 두 번을 못 하겠어?”

큐라가 의미심장하게 말꼬리를 끌었다.

“물론 그대로 두면 힘을 되찾을 때까지 천 년은 걸리겠지만, 성좌신이 어떻게 각성자를 만들었는지 깨달았으니 글라세로도 같은 방법을 쓰려고 할 거야.”

“그게 무슨 뜻이야?”

“자기도 성좌가 되어서 각성자가 대신 힘을 길러주길 기다리는 거지.”

“뭐라고요!”

우당탕!

큐라의 말에 기어이 숨어있던 류의건과 유청이 튀어나왔다. 승지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졌다.

기껏 숨어 있으랬더니!

류의건은 심지어 몹시 당황한 낯빛으로 칼끝까지 내밀었다.

“일단 떨어져서 마저 설명하세요!”

“야, 아직 본론은 시작도 못 했는데.”

“다른 걸 시작하게 생겼습니다. 본인 꼴 좀 보십시오.”

“어?”

유청의 말에 승지가 고개를 내리자 어느새 풀어헤쳐 진 앞섶이 인사했다. 식겁한 승지가 허둥지둥 들춰진 옷을 내렸다.

“이게 언제!”

“내가 서큐버스라는 걸 잊은 건 아니지? 서운해, 자기.”

큐라는 킥킥거렸다. 순식간에 옷을 벗긴 게 그저 승지를 놀리려고 한 일은 아니었는지 이번엔 류의건과 유청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나왔구나? 난 대체 언제 나올까 했어.”

허탈해진 류의건이 칼을 내렸다.

“처음부터 우리가 여기 숨어있는 걸 알고 있었군요. 보였습니까?”

“우리 눈엔 다 보여.”

어쨌든 서큐버스가 정말 음흉한 의도로 몸에 손을 댄 건 아니라 다행… 뭐가 다행이야. 젠장.

뒤늦게 옷을 수습한 승지도 이렇게 어이없게 숨겨놓은 애들을 들킬 줄은 몰라서 허망해졌다.

“하, 나. 위험하지도 않은데 왜 튀어나온 거야?”

“덮치는 것도 엄연한 범죄입니다.”

“뭐 본인도 마음이 있다면 다르겠지만….”

유청이 음침하게 덧붙였다. 저 자식. 어떻게든 유월이랑 안 이어주려고 발악을 하는구만.

그러나 옆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서큐버스 따윈 유월에 비교도 되지 않았다. 유월은 훨씬….

류의건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방금 이야기는 저희만 듣기엔 너무 심각하지 않습니까? 마왕이 성좌가 되었다니…! 설마 또 승지 씨에게 달라붙은 거라면…!”

“아니~. 우리 자기는 깨끗해.”

큐라가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승지의 볼을 붙잡았다. 좋아서 죽겠다는 표정이었는데도 승지는 그저 놀리는 줄로만 알았다.

“장난치지 말고. 진짜 글라세로가 나한테 붙은 거 아냐?”

큐라가 눈웃음을 짓는 척하며 눈을 휘었다. 그러자 빠르게 가늘어진 동공이 훔치듯 유청의 얼굴을 확인했다.

유청은 마치 남의 일처럼 한 발 물러서 있었지만, 큐라가 얼굴을 기억하기엔 충분했다.

큐라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절대 자기는 아니야. 나 믿지?”

“왜 그러니까 더 불안해지냐.”

승지가 중얼거리자 큐라는 쿡쿡거리며 웃기만 했다.

“자기. 내가 서큐버스라서 믿지 못하는 거야?”

“그냥 너라서 안 믿긴다고.”

“아잉.”

“만약 글라세로가 붙은 각성자가 강해지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큐라는 승지가 아니라 류의건이 자꾸 질문을 던지자 귀찮은지 대충 대답했다.

“각성자가 얻은 힘을 쪽쪽 빨아먹고 글라세로 마왕님이 다시 부활하겠지?”

“큰일이군요.”

류의건의 얼굴이 한 층 어두워졌다.

“분명 그곳에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일 텐데… 혹시 글라세로가 붙었는지 알아보는 방법이 있습니까?”

“내가 왜 자기도 아닌 사람한테 그런 걸 알려줘야 할까?”

큐라가 짐짓 승지를 끌어안으며 튕기자 승지가 몸을 빼냈다.

“까지 말고 대답해.”

“너무 차가워, 자기. 더 자세한 대답을 들으려면 뒷부분은 유료라구?”

큐라가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나랑 마왕님 보러 가지 않을래?”

“……하.”

승지는 떼어내려고 해도 그냥 통과해버리는 큐라를 보며 천장만 쳐다보았다.

“너도 그렇고 다른 마왕도 그렇고. 글라세로가 나한테 붙은 것도 아니라면서 왜 그렇게 데려가려고 안달이야?”

“다른 마왕님? 누구?”

갑자기 큐라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눈을 반짝였다. 승지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궁금해? 궁금하면 너도 유료다.”

“너무해!”

“아무튼 당장 글라세로가 누구의 성좌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잖습니까.”

기다리다 지친 유청이 끼어들었다.

“그럼 원래 목적을 물어봐야죠.”

“원래라니?”

“아 맞네. 내가 니들 세계 인간을 하나 주웠거든.”

승지가 이세계인을 주운 얘기를 하자 큐라는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저런, 운이 정~말 없었구나?”

“데리고 있기 귀찮은데 어떻게 돌려보내?”

“어떡하긴. 그 사람이 발견된 별까지 돌아가서 풀어줘야지? 알아서 집에 돌아가게 내버려둬.”

“별이라면… 마무자의 던전을 얘기하는 겁니까?”

“그럼 던전이 별에 있지 어디에 있어?”

큐라가 의미심장하게 말꼬리를 올렸다.

“마무자 마왕님은 갖고 있는 별이 많으시거든. 정확한 던전 열쇠가 있을지 모르겠네?”

거슬리지만 무시할 수 없는 지적이었다. 애초에 별이라니. 이세계라고 해서 대충 다른 차원일 줄 알았더니 우주적으로 규모가 커지고 지랄이야.

승지의 표정의 영 좋지 않아지자 큐라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치댔다.

“하지만 나랑 함께 간다면 마왕님께 부탁해서 바로 문을 열어줄 수도 있어. 그럼 자기는 귀찮은 쓰레기를 치워버리고 짠~. 나랑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거지.”

“하부터 지까지 다 마음에 안 드네.”

“후후. 생각은 해봐. 알았지?”

큐라가 쪽하고 승지의 뺨에 입을 맞췄다. 당연히 승지는 뒤집어졌다.

“미친! 야! 돌았냐!”

“어머 그거 가지고 화내긴. 귀여워~. 다음엔 더 찐한 거 준비해서 올게~.”

“다신 오지 마!”

승지가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큐라는 벅벅 볼을 문지르는 승지를 보며 손 키스까지 날려주고는 천장을 통과해 사라졌다.

돌겠네, 진짜.

역시 저 서큐버스를 만나면 재수가 없다. 게다가 큐라가 사라지자마자 나타난 성좌 녀석이 아예 불에다 기름까지 부어댔다.

[흐엉~ 말도 안돼! 우리 승지 볼의 순결이~!! 순결이이!! 서큐버스한테 빼앗겨 버렸어!!]

“뭐 임마?”

[그렇잖아! 아니면 혹시 다른 사람이 볼에 뽀뽀해준 적 있는 거야?]

“넌 지금 그게 궁금하냐?”

[๑'ٮ'๑ 웅.]

미친다.

승지는 그냥 성좌를 무시하고 흉흉한 기세나 뿜어냈다. 난감해진 류의건과 유청도 선뜻 말을 걸지 못했으나.

저것들은 아무 말도 안하면 더 불안하단 말이지. 승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윽박질렀다.

“뻘 생각하지 말고 나갈 준비나 해. 설마 여기 마무자 던전 열쇠 하나가 없겠냐?”

“하지만 아까 들은대로 정확한 던전의 위치를 모른다면….”

“아 바깥에 있는 놈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설마 지가 사는 곳도 못 알아보겠냐.”

승지가 성질을 냈다. 확실히 서큐버스를 제외하면 가장 정확한 방법이긴 했다. 류의건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괜히 이세계 인간을 하나 주워가지곤. 뒤처리만 귀찮게 됐다.

…그냥 방생해버릴까?

바로 혹해버린 승지가 불쑥 말했다.

“정 하다하다 안 되면 여기 이민시켜버리자.”

“예?”

“왜, 괜찮잖아. 어차피 못 돌아가면 여기서 계속 살아야지. 초록색 초능력 공룡처럼.”

승지가 진심으로 말했다.

진짜 이민 오면 유청한테 한글부터 가르치게 시켜야지. 아마 저놈 가르치려면 죽도록 고생 좀 할 거다. 훗하하.

사악한 생각에 기분이 좀 나아진 승지가 킬킬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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