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환영합니다 (1)
안식의 제국에 도착하기 전날 밤.
자다가 몸을 뒤척이던 승지는 배에서 무언가 굴러떨어지는 느낌을 받고 깨어났다.
[잘 잤어, 승지야?]
“으음.”
승지가 손으로 성좌의 대화창을 휘적휘적 치웠다. 손가락에 주머니가 걸렸다.
[옥새는 무사히 돌아왔어!]
“계약은 잘 지키는 대가리였네.”
좋아, 이게 돌아와야 일을 시작하지.
방에 다녀가면서 옥새만 놓고 간 게 아닌지 제법 그럴싸한 옷과 음식도 함께 놓여있었다.
호텔방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승지는 태연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그동안 이세계에서 이리저리 구르느라 옷은 걸레짝이 다 되어 있었다.
[꺅! 멋있어~! 역시 남자는 제복이야! 하아, 최고!]
“쓸데없는 소리 말고, 준비했던 거나 잘 하자.”
[걱정 마!]
승지가 문을 닫고 나오자 전전긍긍 기다리고 있던 체르마가 미간을 좁혔다.
“옷이 날개긴 날개군. 우리 제국인이라고 해도 믿겠어.”
“뭐 아침부터 시비냐?”
“배가 도착했다. 내리기 전에 잊은 거 없나?”
승지가 어깨를 으쓱했다.
“잊은 건 없는데 누구는 약속을 까먹었나 보네. 지금 황제 얼굴이 보이냐? 난 안 보이는데.”
미리 좀 옥새를 받아볼까 싶어서 말을 던졌던 체르마가 코에 주름을 잡았다.
“정말 짜증나는군. 그렇게 폐하를 경멸하면서 왜 굳이 폐하 앞까지 같이 가겠다는 건가.”
“성의 표시지.”
그리고 네가 먹고 나르지 않도록 시치미를 못 떼게 하는 역할도 하고 말이야.
체르마는 불쾌한 기색으로 승지의 하선을 도왔다. 그를 빨리 쫓아 보낼수록 자신의 혈압에 도움이 될 거란 판단 때문이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승지는 자신과 교섭하러 왔던 귀족들이 내심 실망한 기색을 보이며 지나치는 걸 목격했다.
“결국 체르마에게 팔린 건가.”
“쳇. 하필 그 꼰대 녀석에게….”
“뭘 대가로 준 거지? 그 가문엔 더 이상 남아있는 재산이 없을 텐데….”
번역 한 번 확실하네. 승지가 속으로 혀를 찼다.
걱정 마라. 너네도 잊은 거 아니니까.
제국의 선착장은 넓게 펼쳐진 보라색 대륙이었다. 낮게 자란 풀들이 바다와 파도 대신 쏴아아아 밀려가며 음영을 만들어냈다.
저게 안식의 제국 바닥인가.
배가 정지한 기묘한 보라색 풀밭은 배에서 내린 사람들만 밟고 있지 않았다.
“저기 보인다!”
“수색대의 귀환이야!”
선원도 아닌 주제에 자연스럽게 난간에 발을 올린 승지가 만족스럽게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호오. 계약한대로 정말 많이도 모아 주셨구만, 그 모래시계 양반.
“뭐지? 왜 환호 소리가.”
이상함을 감지한 체르마가 똑같이 난간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단순히 출항했다 돌아온 수색대를 맞았다기엔 너무나도 많은 인파를 보고 당황했다.
“어서 와요!”
“돌아온 걸 환영합니다!”
“다들 무슨 소린가.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얼떨떨하게 서 있던 체르마는 승지가 은근히 히죽거리는 걸 보고는 비로소 사태를 파악했다.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시간 단축?”
승지가 어깨를 으쓱였다. 곧 열린 배의 문턱으로 스르륵 청록색 옷을 단정히 입은 시종 하나가 올라왔다.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승지와 배에 탔던 인간들은 모두 그 길로 제국의 궁전까지 이동했다. 처음엔 그저 놀라던 귀족들도 모두 남김없이 참석하라는 이야기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특히 옥새를 넘겨주기로 했던 체르마는 승지의 옆에 딱 붙은 채 아예 이를 갈았다.
“어떻게 소식을 전했지?”
“뭔 소리야?”
“이 반응은 누가 보아도 폐하의 귀에 옥새 얘기가 들어간 것이지 않나.”
“뭐, 나름대로 소식통을 마련해둔 거지.”
“…….”
체르마의 눈이 어두워졌다.
그들조차도 승지와 함께 배에 탄 뒤에야 들을 수 있던 소식이 배보다 먼저 도착하는 건 말이 안 됐다.
승지가 관찰한 바로는 이들이 스마트폰처럼 원거리 통신 수단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우주에서 비둘기나 부엉이 같은 걸 날려서 연락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승지는 마법사였던 모래시계 대가리에게 이번 일을 제안했고,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냈다.
옥새를 찾았다는 소식을 미리 전해, 가능하면 사람들을 많이 끌어 모아달라는 요청은 승지의 예상대로 황제의 앞까지 직통 고속도로를 뚫어주었다.
원래 승지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쏟는 걸 싫어하지만, 이번만큼은 관객이 있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길을 안내하기 위에 두 발을 모은 채 날아가는 시종 뒤에서 체르마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뤼와 무슨 계약을 맺었는진 모르겠지만 실수한 거다.”
“뤼?”
“얼굴에 천을 감은 마법사 말이다.”
[모래시계 머리를 가진 마법사를 얘기하는 건가봐!]
체르마는 삭막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는 제국의 안정을 바라는 자들과는 다르다. 아무리 네가 제국인이 아니라고 해도 같은 우주에 있는 한 그 영향력에선 벗어날 수 없어.”
“자신만만하네.”
본인한테 일어나는 일들이 다른 자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니 뻔뻔스레 협조하라고 하는 게 아주 자신감이 쩔어 준다.
“내 기억엔 우리가 위험에 처했을 때도 그 제국의 영향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거 같은데?”
승지의 반응에 체르마가 오히려 역정을 냈다.
“그래봤자 고작 행성 하나의 위험 아닌가? 제국이 소유한 별이 몇 개나 되는지 알기나 하나? 감히 그걸 비교하다니.”
“응, 그래. 그럼 앞으로도 걱정 안 해도 되겠네.”
승지는 깔끔하게 거절했다.
애초에 제국 놈들이 마왕들을 다 못 잡아서 승지가 있는 별까지 마왕이 온 걸 생각하면 뻔뻔한 걸 넘어서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상관도 없는 우리가 뒤지게 몹 잡아가면서 니들이 싼 똥 치워주는데 이건 뭐 더 내놓으라고 하네?
승지는 지구를 대표해서라도 제국을 싹싹 긁어먹을 포부를 다졌다.
“…물론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할 생각은 아니다.”
뒤늦게 말을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체르마가 정정했다.
“그저 좀 더 신중해지라는 것뿐이야. 우린 더 큰 위험을 막으려고 애를 쓰고 있어. 그걸 알아주게.”
왜 집단을 가진 놈들은 다들 말하는 논리가 똑같을까?
길드장이나, 귀족이나. 에라이 염병할 것들.
언제나 집단 테두리 바깥에서 살아온 승지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걱정할 거 없어. 난 약속은 지킨다. 넌 입이나 잘 털어서 네 덕분에 옥새가 무사히 황제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고 말하면 돼.”
그리고 난 받아야 할 물건만 받으면 되고.
“…….”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체르마가 황제의 알현실을 눈앞에 두었을 때쯤에야 입을 벌렸다.
“우리가 섬기는 자들은 우리를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어쩌라고?”
“그래서 마왕이라고 부르지.”
지금까지 전전긍긍 치졸한 모습만 보여주던 체르마가 얼핏 엄격한 군인의 모습을 드러냈다.
“자넨 잘못된 세상에서 믿고 싶어지는 것을 찾아낸 적 없나?”
갑자기 뭔 소리야, 씨발.
단번에 좁혀든 승지의 미간과 달리 거대한 황금 문이 부드럽게 양쪽으로 열렸다.
드디어 황제에게 도착한 것이다.
승지를 필두로 선 귀족들이 별빛이 범람하는 대전 앞으로 들어섰다. 당당하게 돌아온 개선장군을 환영하듯 웅장한 음악도 빠지질 않았다.
[우와! 우와아아!]
넋을 놓고 구경하는 성좌와 달리 승지는 자신을 둘러싼 이 광경이 낯설고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원래는 존재하지도 않는 보너스 스테이지가 열린 것처럼, 온통 번쩍거리는 것으로만 가득 찬 무대로 올라온 것 같았던 것이다.
황제를 만나는 건 원래 좀 위엄에 차있고, 엄숙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데 자신이 잘못된 건지 이 별이 잘못된 건지, 경외감은 어디에도 없고 분명히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장구한 세월을 버텨온 공간이 싸구려 초코과자 부속품처럼 쉽게 부러질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서 그런가.
승지는 처음으로 보는 황제의 모습을 구경이라도 하고 가려고 했다.
…근데 저거 인간 맞냐?
황좌의 등받이는 천장에 닿을 듯이 벽을 따라 높게 설계되어 있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황좌에 앉아있는 사람을 더 높은 곳까지 올려다보게 하고, 크게 보이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금 의자에 앉아있는 황제는 거의 눌어붙어있다는 말이 정확할 정도로 넓적했기에 본래의 연출이 제대로 들어먹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비참해보일 정도다.
“그대들이 내게 빛을 가져왔는가?”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너무 늙으면 살에 탄력과 힘을 잃는다. 그러니 저토록 사람의 형태가 아닐 때까지 살이 처지려면 대체 얼마나 나이를 먹어야 하는 거야?
사람이 아니라 슬라임이라도 보는 기분이었다. 엄청나게 주름이 져있고 군데군데 솟아 나온 흰 털이 아니었다면 차라리 그냥 비계를 쌓아놨다고 해도 믿을 텐데.
저게 정말 황제라고?
약간 얼이 빠진 승지는 체르마가 자신의 옆구리를 푹 찌를 때까지 인상을 쓰고 있었다.
“지금이 그 때다.”
승지가 반쯤 무의식적으로 옥새를 건넸다.
체르마는 옥새를 쥔 손을 가슴 앞으로 가져가 두 번 쿵 친 뒤, 승지로선 다 알 수 없는 몇 가지 격식어린 동작을 추가했다.
“신, 체르마. 황제 폐하의 근심을 찾아 돌아왔습니다.”
“…가까이 오라. 내 직접 보아야겠다.”
황제가 손을 뻗자 체르마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척척 다가갔다. 그리고는 다른 귀족들의 질시와 시기어린 눈빛을 받으며 무릎을 꿇었다.
“빛을 받듭니다.”
황제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헤쳐 옥새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게 된 것처럼 울룩불룩 튀어나온 살이 한 번 크게 들썩였다.
“나의 후계는.”
“이미 숨을 거두신 뒤였습니다.”
황제가 눈을 감았다 떴다. 그게 눈을 감아서 간신히 눈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정도였다. 승지에게는 그냥 까만 점처럼 보였던 것이다.
“비로소 내 미련에 끝을 고하는가.”
“…….”
체르마는 그저 고개를 숙이며 참담함을 표시했다.
“이 일을 전한 자가 있다고 들었다.”
갑자기 승지는 이 비정상적인 장면의 한가운데로 끌려왔다.
차라리 광대 성좌가 스킬로 만들어낸 무대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건 웃기기라도 했는데.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이세계 제국의 황제를 보며 승지는 어정쩡하게 고개를 들었다.
체르마는 당장이라도 제대로 된 인사를 하라는 듯 눈에서 아예 광선을 쏘아 보냈지만 승지의 목은 여전히 뻣뻣했다.
황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무엇을 받고 싶은가. 이방인이여.”
[뭘 달라고 하면 좋을까? 우리 금이랑 행성, 그러니까 던전은 충분히 받았잖아! 스탯도 엄청 쌓였고 말이야!
여기서 더 뭐가 필요할까?]
승지는 잠깐 눈을 굴렸다.
그리고는 별로 오래 고민하지도 않고 말했다.
“당신의 이름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