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그딴 식으로는 죽지 마라
유월은 서큐버스가 바로 승지가 있는 곳으로 데려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곳은 선착장이었다.
낯선 세계에 도착했는데도 유월이 덤덤하게 물었다.
“승지 씨가 여기 있습니까?”
“아니~. 이제부터 찾아야지.”
큐라가 나타나자 선착장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흩어졌다. 원래 서큐버스들은 인간인 척 신체 부위를 숨기고 다니는데, 이상하게 승지를 따라다니는 서큐버스는 날개며 손톱이며 그대로였다.
큐라가 펄럭거리며 유월의 근처를 날아다녔다.
“마왕님한테 받은 이동 능력은 별에서 별까지 움직이는 것뿐이야. 여기서 다시 자기가 있는 곳까지 짧게 이동하는 건 내 힘.”
“!%!$!!”
같이 따라온 거스가 불안스레 뭐라고 말했다. 뜻밖에도 그들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건 서큐버스인 큐라 밖에 없었다.
유청이 어설프게 가르쳐놓긴 했지만 거스는 우리말을 못 했고, 유월도 다른 세계 말을 배우고 싶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유일하게 양쪽의 말을 다 알아듣는 큐라가 킥킥거렸다.
“혹시 자기를 나한테 먹이로 줄까봐 계속 걱정하네. 정 배가 고파지면 저 대왕이 아니라 당신이 먹고 싶어질 텐데 말이야.”
“안 궁금해요. 빨리 이동하죠.”
유월은 선착장에 빨간 머리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재촉했다.
우연히 이세계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역시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바에는 현실에서 힘쓰는 게 나은데.
“흐음, 어디 보자. 자기가 어디까지 갔는지 볼까.”
큐라가 유월의 머리에 살포시 턱을 얹었다.
“자, 여기야.”
다시 큐라가 차원문을 열었다. 유월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서큐버스는 원래 이렇게 먼 곳까지 순간이동 할 수 있는 괴물이 아니다.
마왕의 성에 둥지를 틀고 지내다 배가 고파지면 마왕이 한꺼번에 어느 별에다 뿌려놓고 먹이를 다 먹으면 다시 거두어갔다. 역병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런 존재가 순순히 인간을 도울 리 없지.
유월은 이미 차원의 문을 넘을 때마다 조금씩 시간차가 난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걸을 때부터 매일같이 도장에 나와 수련한 몸이다.
철저하게 규칙대로 살아온 몸은 시차가 발생하거나 밤낮이 바뀌기만 해도 기민하게 반응했다.
모든 육체를 통제 하에 두거라.
그리하여 작은 눈 떨림 하나마저, 사소한 근육의 긴장마저 어디서 기인하는지 이해한다면 극복할 수 있다.
자신을 아는 것이 언제나 필승이다.
유월은 손에 배인 굳은살을 만지작거렸다.
신경이 예민하게 깨어있는 까닭에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오면 판단을 정지하게 된다.
그래서 자꾸만 본능대로 움직이게 되는 거지만.
마왕의 측근을 죽이면 집에 못 돌아가. 서큐버스는 죽이면 안 된다는 걸 까먹지 말자.
유월은 큐라가 열어준 차원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내 얌전하던 바람소리가 갑자기 아래로 꺼지며 깊은 소리를 냈다.
후우웅!
“@!!%@#!”
뒤따라오던 거스가 뭐라고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절벽을 마주치게 되었으니 놀랄 만도 했다.
“절벽?”
유월이 발끝으로 부스러지는 돌멩이를 눌렀다. 엉망으로 망가진 땅의 틈이 별의 아가리처럼 쩍 벌어져 있었다.
이리저리 파괴되고 박살난 땅은 분명히 방금 전까지 멀쩡했을 게 분명했다.
갈아엎어진 자리에 난 풀들이 지독한 풋내를 풍기며 싱싱했던 흔적을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이 절벽, 아무리 봐도 자연적으로 생긴 게 아닌데.”
“[email protected]#@$#@!!”
“사람이 없다고? 그러게. 이상하다? 승지 자기의 흔적이 마지막으로 남은 곳은 분명 여기인걸.”
그 때 대화 속에서 미세한 소리를 들은 유월이 시선을 위로 들어올렸다.
바람이 피리처럼 찢기는 소리를 냈다.
“온다.”
“으응?”
하늘에서 무언가 날아왔다. 깜짝 놀란 큐라가 반사적으로 사라지고, 기겁한 거스가 유월의 팔에 달라붙었다.
콰아앙!
이미 금이 길게 난 땅에 다시 한 번 굉음이 터져 나오며 안쪽이 무너졌다.
엄청난 흙먼지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쿠궁. 쿠구궁.
땅이 무너지느라 계속 발밑이 흔들렸지만 유월은 꼿꼿하게 추락 지점을 확인했다.
마침내 먼지 속에서 희고 큼지막한 게 튀어나왔다.
“저건…….”
날개가 구겨진 철가면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 *
“욱!”
승지는 단전에서부터 타고 올라온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그의 허리가 꺾였다.
“욱! 웨엑! 우윽!”
아무런 대비도 없이 목격하게 된 장면은 지나치게 폭력적이었다. 심지어 빨리 진행되지도 않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과 대화하고 웃던 얼굴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장면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질 것만 같다.
“승지님! 괜찮으세요?”
“…저리 치워!”
등에 닿는 손길을 느끼자마자 소름이 끼친 승지가 홱 밀쳐냈다.
곱슬머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승지를 바라보았다. 정말 ‘걱정’만 있는 표정이라 더욱 섬뜩했다.
손목으로 입을 문지른 승지가 희번득한 안광을 띄웠다.
“방금 뭐야, 씨발?”
“…….”
“정화 한다면서. 저게 썅 정화야?”
“승지님. 보이는 것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아가씨는 승천하신 거예요.”
곱슬머리가 안타깝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승지의 시야는 여전히 바닥에 눌러 붙은 덩어리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친 것들.”
“육체의 속박은 정념을 낳고 바른 길로 가지 못하게 합니다. 아가씨는 몸의 형태만 버렸을 뿐 여전히 살아 계세요.”
“미친 것들아.”
반복적으로 씹어 말한 승지가 형형한 눈을 들어올렸다.
“내가 이러려고 너넬 보호한 거냐?”
생각하니 다시 토기가 치밀었다. 욕지기가 솟은 승지가 대신 욕을 퍼부었다.
“지금 장난해?”
“승지 님.”
곱슬머리가 결국 간곡하게 손을 모았다.
“신념을 위해 죽는 일은 고귀한 일이에요. 자신의 선택이었어요. 누구나 바라는 성스러운….”
“다물어.”
승지는 털이 곤두섰다. 길드 연합이 대의를 위한 희생이라며 자신을 죽이려고 했을 때는 그냥 화가 났지만,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죽음을 꾸미는 인간을 보니 역겨웠다.
“변명하지 마.”
곱슬머리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승지 님. 아무도 안 죽고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없어요.”
“아니.”
승지가 험악하게 침을 뱉었다.
“그냥 그러는 게 편해서 뒤진 거겠지. 제정신인 인간이면 좋아질 수 있는데도 죽겠다고 하겠냐? 주변에서 가망이 없다고 하니까 죽겠다고 했겠지.”
“당연히 희생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요!”
곱슬머리가 항변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별을 위해서 기꺼이 수호성이 되기로 한 아가씨의 마음은 승지님이 말하는 것과 달라요!”
“웃기지마. 못 버티니까 내버린 주제에. 빌어먹을.”
승지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상황이 너무 정상적인 범주를 벗어나면 웃음이 나오나 보다. 처음 알았다.
“드래곤이나 믿어대는 이세계 외계인한테 이딴 말이 통할 리가 없지.”
곱슬머리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이해를 못하시다니. 이렇게까지 어린애 같은 분이실 줄 몰랐어요.”
“관심 없어. 얼마나 고귀한 일이든 상관없다고. 포장질은, 씨바.”
“…….”
“한 명 죽여서 편안해지느니 난 다 같이 불안한 상태로 쳐넣을 거다. 진짜로 그게 잘못된 상황이면, 그게 자기 고통이 되면 고치려고 하겠지.”
속에서 쓴 물이 치밀어 승지가 말을 멈췄다.
그냥 다 꺼졌으면 좋겠다.
“드래곤 새끼들한테 다 전해. 앞으로 눈에 띄지 말라고. 이제부터 나도 보이는 족족 때려잡을 테니까.”
승지가 훅하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미련 없이 신전 밖으로 나가는 승지를 곱슬머리가 불러세웠다.
“…승지 님!”
승지는 무시했다. 그러나 곱슬머리가 억지로 팔을 잡아채며 손을 내밀었다.
“안 꺼져?”
“가져가세요. 혼자선 떠날 수 없으시잖아요.”
땋은 머리가 하고 있던 목걸이였다. 이 별을 떠날 수 있게 배를 부르는, 마왕의 물건.
그러나 승지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땋은 머리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치워.”
물건을 받는 대신 가운데손가락을 올린 승지가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수많은 일들을 돈 받고 하니까 참아왔지만 지금처럼 기분이 더러운 순간은 없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승지를 본 성좌가 도리어 안절부절 못했다.
[승지야…….]
“젠장!”
쾅!
결국 참지 못한 승지가 신전 벽을 내치쳤다. 우스꽝스럽게도 1콤보! 하는 상태창이 작게 떴다가 사라졌다.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정 떨어지는 곳이다.
열 받은 머리를 최대한 식히며 승지가 이를 갈았다.
“최대한 빨리 여기 뜨는 법 생각 안 나냐?”
[으음, 음, 그러니까….]
성좌가 얼른 고민했다. 승지가 계속 끔찍한 죽음을 생각하는 것보다 여기서 빨리 떠나주는 편이 자신한테도 좋았다.
하지만 부르그골의 수하가 준 목걸이도 거절했고, 차원문을 열어줄 큐라도 없는데 여길 어떻게 떠날까?
고민하던 성좌가 조심스레 대화창을 띄웠다.
[⇧저기 있는 저 배를 탄다면…?⇧]
승지는 멀리서 하늘로 상승하는 배를 보고 욱했다. 처음 이 별에 도착하는 것보다는 숫자가 적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왕의 힘이 흐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결국 저것밖에 답이 없는 거냐?”
[응… 그치만 승지가 드래곤의 배에 타기 싫다고 했으니까 다른 방법도 더 고민해볼게! 찾아낼 거야!]
“아냐. 탄다.”
승지는 안 그래도 근질근질한 속을 폭발시키듯 그대로 밀어붙였다.
“일단 탄 다음에 배를 빼앗으면 더 이상 저 배의 주인이 드래곤이 아니게 되는 거잖아?”
[어?]
당황한 성좌가 주춤하는 사이 승지가 뛰어올랐다.
[잠, 잠깐만! 이렇게 무작정 뛰어가 봤자 승지한텐 허공답보 스킬 밖에 없잖아! 어떻게 저 배까지 가려고!]
“그 스킬이면 충분해.”
원래 화가 나면 더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건가?
여태까지 얻은 스킬은 전부 어딘가 부족하고, 우스꽝스러운 그야말로 광대다운 짓거리가 섞여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도 긁어모으면 어딘가엔 반드시 쓸모가 있다.
역시 그 곱슬머리 놈한테 더 똑바로 얘기해주고 나올 걸 그랬어! 정신 차리라고, 젠장!
멋있고 웅장하고, 그런 화려한 죽음을 위해서 사느니 차라리 이 광대 성좌의 멱살을 잡고 끝까지 갈 테다!
“소환!”
빼애앵! 배가 빵빵하게 부푼 인형이 승지의 발에 밟혔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
삐이! 삐요옹!
비장한 승지의 얼굴과 달리 발밑에 나타난 인형과 장난감들은 하나같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이게 분통이 터지는 건지 얼척이 터지는 건지.
심지어 새로 나타난 인형들은 제대로 된 발판 역할도 하지 못했다. 한 없이 가벼웠으니까.
하지만 한 번 발을 디뎠다 뗄 수 있기만 하면 아무리 약한 존재라도 다음 도약을 위한 조건을 만족시켜주었다.
물 위를 달렸을 때와 똑같아. 어차피 날 지지해주지 않으니까. 중요한 건 나다!
정말로 허공답보를 사용해 하늘을 오르는 승지를 보며 성좌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기분이었다.
승지는 달라.
승지라면 어떤 시련이 와도 헤쳐나갈 수 있을 거야. …나와 다르게!
텁.
배의 난간을 밟은 승지가 미련 없이 마지막 소환된 인형(하필 또 드래곤이었다)을 발로 밀쳐버렸다.
역시 비행선까지 들어오는 건 되도 나가는 건 안 되는군. 쓰레기 마왕 놈.
그냥 이제 드래곤이 뭘 하든 다 마음에 들지 않게 되어버린 승지가 험악하게 난간에 걸쳐 앉았다.
“여기 선장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