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웃음 공세 (1)
안식의 제국에서 도착한 배가 왕성 위에 정지해있었다. 좀 더 고풍스럽긴 했지만 승지를 태웠던 배와 비슷했다.
금테 안경을 쓴 여자가 손끝으로 콧잔등을 눌렀다.
“왜 하필 이런 작은 별에서 마왕의 봉인이 풀린 건지. 그래서 내가 열쇠 관리를 잘하라고 하지 않았나?”
“마왕들이 침입해서 훔쳐간 걸 제가 무슨 수로…….”
째릿.
노려보는 시선에 노파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이번에야 말로 깔끔하게 뽑아내야 해.”
금테 안경이 차갑게 번뜩였다.
“지금 처리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퍼져나갈 거다. 왕에게는 뭐라고 설명했지?”
“공주가 제국의 후계자와 결혼한다고 했습니다.”
금테 안경이 어이가 없다는 듯 돌아보았다.
“그걸 믿어?”
“믿던데요.”
“양심이 없군. 차라리 잘됐어. 보상으로 가져온 물건들도 축의금으로 처리하고 공주는 후궁이 되어서 다신 돌아올 수 없다고 하면 되겠지.”
“그런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그냥 지금 하던 대로만 해도….”
“경관.”
금테 안경이 말을 잘랐다.
“자네가 공주에게서 마왕을 제대로 뽑아내지 못해서 이렇게까지 하게 된 거야. 공주가 불쌍한가? 난 제 때 보고를 안 한 자네가 더 불쌍하네. 그리고 한심해.”
“…….”
노파가 허리를 숙였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이번 일은 내가 처리해주지만, 자숙하고 있으시게.”
금테 안경은 어깨에 걸친 망토를 한 번 펄럭이더니 그대로 배 밑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애가 웃질 않는 걸 어떡합니까.”
노파가 중얼거렸다.
“오오, 어서 오십시오!”
제국의 손님을 맞이한 왕은 주책 맞게 달려 나갔다. 체통 없는 모습에 살짝 눈가가 씰룩인 금테 안경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제국의 안식이 폐하를 뵙습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이리로 드시지요. 식사를 준비해뒀습니다.”
“아닙니다. 공무가 우선인지라. 공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방에 있을 겁니다.”
왕이 손을 까딱여 병사를 불렀다. 꼬맹이 성좌와 공주를 부르러 간다는 걸 깨달은 승지가 시점을 바꿨다.
마왕이 나타난다는 소리에 꼬맹이 성좌와 공주는 싸움을 멈춘 상태였다.
“마왕이 왜, 왜 나타나?”
“…….”
직감적으로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다나우가 사정을 털어놓았다.
“내 안에 마왕이 있어.”
“힉!”
당장 도망가려는 꼬맹이 성좌를 다나우가 붙잡았다.
“끝까지 들어! 바보야! 내가 마왕이란 게 아니란 말이야!”
“어, 어쩌다 마왕이 들어갔는데!”
“나도 몰라! 어렸을 땐 안 그랬는데, 어느 날부터 마왕이 있다는 걸 알았어!”
“어, 어떻게 알았는데?”
“내가 웃으면 다른 사람들이 따라 웃어.”
꼬맹이 성좌가 눈을 꿈벅였다.
“…그건 원래 그런 거야.”
“아냐! 바보! 진짜 웃겨서 웃는 게 아니라 억지로 따라서 웃는 거란 말이야!”
“어엉?”
다나우는 자신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을 때 그 방에 있던 모든 사람이 동시에 깔깔거리며 웃는 걸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평소처럼 그를 귀여워하며 웃는 미소가 아니었다. 온 몸을 주체할 수 없이 떨고 못 견디겠다는 듯 힉힉거리는 웃음이었다.
정말 우스운 순간이었다면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의 갑작스러운 웃음은 공포를 낳았다.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웃고 있을 때는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기억을 못 해. 너무 무서워서 내가 점점 더 안 웃게 되니까 아빠는 날 걱정해서 제국에게 원인을 찾아줄 수 있냐고 물었어.”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병에 걸렸다고 했어. 그리고 나보고 웃어보라고 했지. 제국에서 온 할머니는 마법사라서 웃어도 좋다고 했거든.”
마법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어 안심했던 제국의 경관은 다나우가 웃자 마법의 보호를 뚫고 같이 웃고 말았다.
그리고는 안색이 달라졌다. 이 힘은 마왕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나쁜 마왕을 뽑아내야 한다면서 할머니는 꼭 이 집에 있을 때만 웃어야 한다고 당부했어. 웃을 때 내 안에 있는 마왕이 겉으로 드러나니까 그 때 빼내주겠다고.”
“뽑았어…?”
이야기에 몰입한 꼬맹이 성좌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실패했어. 아무리 웃어도 마왕이 조금밖에 안 나온다고 자꾸 진심으로 웃으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깃털 같은 거로 계속 간질이면서 괴롭혔어.”
의외로 간질이는 고문은 유래가 깊었다.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다나우는 점점 웃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마왕이 있다고 하니 가지 않을 수도 없었고, 제국의 경관도 궁여지책으로 선물을 마구 주거나 하는 식으로 웃음을 유도했다.
“그게 한계에 달하니까 아빠가 나를 웃기는 사람에게 금 한 상자를 내리겠다고 까지 알린 거야. 하지만 그건 다 함정이야!”
다나우가 분개해서 소리쳤다.
“할머니는 내가 웃으면 자기가 기다리고 있다가 마왕을 뽑아가겠다고 했지만, 나는 봤어. 할머니가 나한테서 뽑아낸 마왕을 따로 보관하고 있다는 거.”
다나우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웃는 걸 걱정해 다시 제국의 경관을 찾아갔었다.
그리고 웃음의 마왕을 소환하려면 최대한 많은 사람
을 감염시켜야 한다는 글귀를 발견했다.
“그 할머니는 분명히 마왕을 소환하려고 하는 거야! 하지만 아빠는 내가 그냥 마왕을 뽑는 일이 힘들어서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아!”
“지, 진짜 읽어만 본 걸 수도 있잖아. 마왕을 없애주려고….”
“너 애가 왜 이렇게 순진해?! 그럴 리가 없잖아!”
애가 애한테 순진하다고 일갈하는 모습이라니.
덜컥.
그 때 문이 열리고 병사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공주님?”
숨을 들이켠 다나우가 꼬맹이 성좌의 등을 퍽 밀었다. 여전히 공주 옷을 입고 있던 꼬맹이 성좌가 졸지에 앞으로 나섰다.
그가 떨면서 말했다.
“내, 내가 공주예요!”
당연히 병사는 무시했다.
“하하, 장난치실 시간 없습니다. 공주님. 지금 제국에서 온 사자가 기다리고 있어요. 이리 오세요.”
병사가 침대를 꽉 붙들고 숨은 다나우를 보며 허리를 숙였다.
“빨리 병이 나으셔야 폐하께서도 걱정을 더시지요. 그래야 결혼도 하시고 행복해지실 거 아닙니까.”
“싫어!”
“악!”
다나우가 옹골찬 이로 병사의 손을 물어뜯었다. 제대로 물어뜯었는지 피까지 얼핏 비쳤다.
“뛰어!”
“어어?!”
다나우가 꼬맹이 성좌의 손을 붙잡고 뛰쳐나왔다.
“잠깐! 잠깐! 나 넘어져! 이렇게 긴 치마 입고는 뛰어본 적이!”
계단을 마구 뛰어가던 다나우가 다시 올라와 꼬맹이 성좌의 치맛자락을 양쪽으로 확 붙잡아 들었다.
“히익!”
“잘 들어! 넌 제국에서 온 사람한테는 네가 공주라고 해야 해! 그 할머니는 이 별의 탄생록을 갖고 있었어. 이 별에 사람이 얼마나 살고 있었는지 세어봤단 말이야!”
다나우가 눈을 이글이글 불태웠다.
“이 별에 있는 사람들로는 모자라니까 날 제국에 보내서 더 많은 사람들을 감염시키려고 하는 게 틀림없어. 그러니까 나대신 네가 가야 해.”
꼬맹이 성좌는 완전히 머리가 핑핑 도는지 눈을 열심히 굴렸다.
“그럼… 이 별에 네가 남으면 어떻게 되는데? 마왕은 없앨 수가 없잖아.”
“…….”
다나우는 잠시 입을 다물고 꼬맹이 성좌한테 이 말을 해도 되는지 고민해보았다.
그리고 성좌가 이 말을 듣기엔 자길 충분히 싫어한다고 생각했는지 털어놓았다.
“난 그 할머니를 죽일 거야.”
“뭐어어!?”
“그 할머니를 죽이고 병이 다 나은 척 할 거야!”
다나우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러니까 그 때까지 네가 나인 척 제국에 가서 시간을 벌란 말이야아!”
다나우가 성좌의 치마를 잡아당기며 다시 뛰어가기 시작했다. 꼬맹이 성좌도 엉겁결에 필사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야심찬 다나우의 계획은 길을 잘못 들며 틀어졌다.
제국의 사자에게 계속해서 잘 보이려고 알랑거리는 왕을 피해 나온 금테 안경과 딱 마주친 것이다.
“!”
“힛!”
“?”
금테 안경이 우당탕 멈춰 선 두 아이를 발견했다. 그의 눈이 평범한 아이가 입기 힘든 비싼 드레스를 훑었다.
“공주님이십니까?”
“그, 그게….”
“그래! 얘가 공주야!”
다나우가 확 꼬맹이 성좌의 팔을 잡아당겼다. 울먹거리던 성좌도 사안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울음을 꾹 참았다.
“빨리 데려가요!”
“그래도 떠나기 전에 아버님께 인사는 드려야하지 않겠습니까?”
“벌써 했어요!”
금테 안경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성좌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연달아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데다, 차갑고 딱딱하게 생긴 어른이 손을 뻗자 무서워진 꼬맹이 성좌는 그만 울음을 참다못해 억지웃음을 짓고 말았다.
금테 안경의 표정이 변했다.
“웃었…어? 하지만 영향력이?!”
“이 멍청이!”
다나우가 소리를 질렀다. 실수를 깨달은 꼬맹이 성좌가 황급히 웃음기를 지웠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게 무슨 소란인가?”
왕이 허둥지둥 밖으로 나왔다. 그 뒤에는 다나우가 말한 제국의 경관도 함께였다.
노파를 보자마자 다나우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덜덜 떨리는 몸을 본 꼬맹이 성좌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다나우의 팔을 슬며시 당겼다. 같이 도망치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꼬마의 움직임 정도는 순식간에 파악한 금테 안경이 두 아이의 팔을 꼭 쥐면서 도주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가 침착하게 물었다.
“이 중에서 따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뭣… 당연히 저 쪽이오!”
왕이 다나우를 가리켰다. 금테 안경이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왜 속이려고 하신 겁니까, 공주님?”
“…저 사람이 마왕을 소환하려고 하니까요!”
다나우는 노파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비장의 한수라고 생각했지만 노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왕이라니?”
“공주님이 그동안 치료를 받으면서 고생이 심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억지로 웃는 일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때부터 저를 나쁜 사람으로 몰더니, 저런 생각을 하게 되신 모양입니다.”
금테 안경이 질문했지만 노파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다나우가 발을 굴렀다.
“거짓말!”
“진정하십시오, 공주님. 제게는 거짓말을 탐지할 수 있는 마법이 있습니다.”
금테 안경이 한 쪽 무릎을 숙여 다나우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저 말은 거짓이 아니에요. 그렇지 않나? 자네 입으로 마왕을 소환할 생각이 있냐고 말해보게.”
“저는 추호도 마왕을 소환할 생각이 없습니다!”
노파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눈이 커진 채 그들을 보던 왕은 금테 안경이 사실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안심해서 가슴을 쓸어 내렸다.
“거 봐라, 공주야. 나도 네가 어리고 힘든 건 이해하지만 이제 제국으로 가서 치료받아야지.”
“그리고 제국의 후계자랑도 결혼을 해야지요!”
노파가 깐족거렸다. 금테 안경이 잠깐 미간을 꿈틀거렸지만, 공주를 안심시키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는지 장단을 맞췄다.
“예. 그러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하. 하. 하!”
다나우는 이 상황을 보고 참을 수 없이 비웃음이 터진다는 듯 크게 웃었다. 그리고 마왕의 압도적인 웃음의 격류가 그들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