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꽃종이를 쓸어내야지 (1)
“그럼 뒷정리를 해볼까.”
번태가 시체를 눕혔다. 승지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그 주위로 모여들었다.
기자들은 다른 어둑시니 길드원이 대신 상대하는 중이었다.
“더 기다릴 거 있나요?”
유월이 거칠게 헬멧을 벗겼다. 아직 사후경직이 없어 머리가 얌전히 드러났다.
“바로 언론에 발표하고 끝내죠. 번태 길드장님. 전 그보다 본진에서 포획해온 다른 간부들을 봐야겠어요.”
“마음을 알겠지만 조금 기다려주게.”
죽은 알러트 보스를 확인하고 나서 번태는 언론에 바로 얼굴을 공개하는 것에 반대했다.
“먼저 듣고 싶은 게 있거든.”
번태가 대답을 기다리듯 승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승지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는 성좌를 찾다가, 툭 내뱉었다.
“내 성좌가 알러트 대가리의 성좌와 원래 알던 사이야.”
“!”
사람들이 동요하든 말든 승지는 신경도 안 썼다.
이래도 안 나와?
성좌는 여전히 잠잠했다. 충격을 받은 건지 뭔지. 승지가 뒷목을 문질렀다.
“싸우던 와중에 잘도 들었네. 내 성좌가 그래서 지금 조용해. 저 놈이 죽어서 성좌도 같이 사라져 버렸거든.”
“그럼 승지 씨가 원래 알러트와 알던 사이였다는 건가요?”
“아니 쥐뿔도 몰랐어. 이건 성좌끼리의 문제라.”
“바로 그걸세.”
번태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랭킹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건 좋지 않지만 보스의 정체가 그리 유명한 랭커가 아닌 게 문제가 되네.”
“78위 정도면 나쁘지는….”
“그런 원론적인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닐세, 선생. 차라리 나나 자네가 보스라고 밝혀지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야.”
류의건의 말을 잘라낸 번태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류의건의 낯빛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네? 그게 무슨….”
“전부 들은 건 아니지만 우리가 윷판에서 보았던 마왕의 힘은 각성자가 아니라 성좌의 힘이었을 걸세. 그렇지?”
“대충 맞아.”
“내가 기억하는 이서진 각성자의 능력은 대단치 않았어. 자네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이건 각성자가 알러트를 조직했다기보단 성좌가 알러트를 만들었다고 보는 게 더 옳지 않겠나?”
번태의 말이 던진 파문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그 말씀은….”
“성좌가 계약자를 조종했다는 뜻인가요!?”
갑자기 각성자들은 자신의 성좌를 확인하듯 주변을 흠칫거리며 둘러보았다.
최자림이 더욱 극단적으로 덧붙였다.
“오호, 성좌가 몸을 빼앗았다는 거군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지.”
승지도 내심 동의했다.
윷판에서 싸울 때, 그건 분명히 성좌인 다나우였다.
중간 중간 보스가 마왕의 힘으로 변하기도 했었지만 정작 계약자의 존재는 느끼지 못했다.
번태가 난감하게 수염 끝을 긁적거렸다.
“그래서 차라리 나나 류의건 선생처럼 상위 랭커가 알러트 보스라고 밝혀지는 게 낫다고 한 걸세. 이서진 각성자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알러트 보스라는 걸 믿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그들을 설득하려면 성좌가 그를 조종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하는군요.”
“파장이 크지.”
성좌와 각성자는 떨어지고 싶어도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최대한 빨리 미션을 깨야하는 상황에서 서로 간에 불신이 끼어들면 싸우는 데 방해가 될 수밖에 없다.
빨리 이세계 복구를 하고 싶은 번태의 입장으로선 가장 피하고 싶은 이야기일 것이다.
내내 냉정한 표정이던 유월이 말했다.
“하지만 그건 2차 각성자에게나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1차 각성자들의 성좌들은 본체가 있으니까요.”
“어쩜 그렇게 남의 일처럼….”
무심코 중얼거렸던 오조희가 급하게 입술을 꾹 눌렀다.
유월의 말대로 성좌가 몸을 빼앗을 염려가 없는 1차 각성자들은 이번 일이 알려져도 상관없을 것이다.
1차 각성자와 2차 각성자들 사이에 미묘한 공기가 흘렀다.
유월은 억지로 표정을 풀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서리로 만들어진 속눈썹 아래로 그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오조희 씨. 각성자와 성좌 사이에 불화가 생기는 것보다, 제 2의 알러트 조직이 나오지 않도록 뿌리를 제거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자! 그래서 일단 승지 자네에게 물어보려는 걸세. 알러트 보스의 성좌가 무언가 다른 점이 있었나?”
번태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승지가 후하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다른 성좌들과 구별할 점이 필요하다는 얘기겠지. 맞아. 저건 원래 마왕이 될 뻔했던 성좌거든.”
“아하!”
번태가 일부러 쾌활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결론이 나왔군! 세상에는 성좌가 마왕에게 감염되어 발생한 일이라고 알리세. 그럼 전보다 사람들이 마왕을 잡는 일에 힘쓰겠지!”
“…….”
번태의 제안은 긍정적으로 들렸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묵묵히 시체를 노려보던 유월은 결국 손을 뗐다.
“보도자료 정리되면 넘겨주세요. 자세한 얘기는 그때 하죠.”
“알았네.”
“잠깐…!”
유월이 그대로 나가려고 하기에 승지가 그를 붙잡았다.
한 때 품에 안아도 보았는데 잡은 손목이 너무 가늘어서 깜짝 놀랐다.
“더 묻고 싶은 거 없습니까?”
“…승지 씨 성좌가 원래 알던 사이라고해서 나쁘게 볼 생각은 없어요.”
“그게 아니라.”
승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애초에 무슨 말을 할 생각도 없었다. 그냥 본능적으로 붙잡았을 뿐.
여기서 보내면 안 된다는 이상한 책임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유월은 승지의 손을 뿌리치지도 않고 가만히 잡혀있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승지 씨는 승지 씨에요. 성좌랑 상관없이.”
정말 아무 상관도 없나?
알러트 보스의 성좌가 다나우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냥 죽이면 안 된다고 자신이 먼저 생각하고 말았는데?
유월은 고개를 돌려 번태를 향했다.
“알러트 본진에서 잡아온 간부들은 언제 볼 수 있죠?”
“절차가 끝나면 안내해주겠네.”
“그럼 그때 다시 뵙죠.”
유월은 가볍게 목례하고는 그를 떠났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던 류의건이 말했다.
“유월 씨를 그냥 보내도 될까요.”
“일부러 보낸 걸세. 아무래도 그한텐 이 뒷내용은 좀 자극적일 테니.”
번태가 갑자기 수상하게 뒷말을 떼었다.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번태에게로 몰렸다.
“자극적이라뇨?”
번태는 지금까지 쾌남처럼 웃던 표정을 수염 아래로 집어넣었다.
“사실 나는 알러트 보스의 성좌가 이대로 사라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네.”
[…다나우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내내 조용하던 성좌가 그 말에 비로소 번개같이 나타났다.
이 자식이 내가 부를 땐 안 나타나더니.
짜증나기도 하고 어쨌든 다시 나타나서 안심이 되기도 했다. 괜히 충격을 받아 잠수를 타면 곤란하니까.
“계약자가 죽으면 성좌도 죽는 거 아닌가요?”
“그래, 그게 일반적인 상식이긴 하지만. 성좌를 빼앗는다는 건 옮길 수 있다는 말과 같지 않은가?”
“분신!”
갑자기 승지가 외쳤다.
“맞아. 기억났어. 알러트 부하 중에 분신을 쓰는 놈이 있었는데 자기 성좌랑 인벤토리를 분신에 옮겨놓는 바람에 정작 본인은 능력을 못 쓴 얼간이가 하나 있었어.”
“그렇구만! 부하가 가능했다면 당연히 보스도 가능한 일이겠지!”
번태가 옳다구나 맞장구를 쳤다. 오조희가 눈을 둥글게 떴다.
“알러트 보스의 분신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고 부하들에게 옮겨갔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알러트의 원흉은 사람이 아니라 성좌니까.”
“글쎄.”
승지는 그들이 자꾸만 성좌에게 희망을 불어넣기 전에 대화를 끊었다. 어쨌든 그가 죽인 인간은 악당이다.
살아있어선 좋을 게 없다.
“분신으로 성좌가 옮겨가기엔 주변에 다른 인간이 없었어. 알잖아. 게다가 마지막에 공격했을 때 뭐가 좀… 빨려드는 느낌이 들었다고. 힘이랄까.”
“아하, 그래. 마왕의 무기가 있었지.”
번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네가 가져간 마왕의 무기는 무엇이든 주변에 있는 걸 흡수한다네. 무기, 정령, 몬스터를 가리지 않고. 어쩌면 성좌까지도 흡수했을지도 모르겠군.”
[…….]
승지가 성좌를 흘깃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성좌 녀석이 평소처럼 떠들어주길 바라는 건 처음인데.
류의건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쨌든 보스 노릇을 하던 사람이 죽었으니 성좌가 죽었든 살았든 쉽게 세력을 보충하긴 어려울 겁니다.”
“맞아요! 게다가 어차피 남아있는 알러트 일당은 잡아들여야죠.”
“그래, 그 말도 맞군.”
번태가 깍지를 끼고 턱을 괴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승지를 향해 있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으면 되겠군.”
그가 눈을 반짝거렸다.
“윷판에서 마왕의 힘을 쓰던 알러트 보스를 잠깐이나마 붙잡은 스킬이 뭐지?”
성좌가 검은 공간을 열었을 때다.
번태의 눈은 이미 그 스킬이 알러트 보스의 힘과 같은 것이라 단정하고 있었다.
둘러대도 안 먹히겠군.
나야말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고 싶다고.
“성좌야.”
[……응.]
이번엔 그래도 대답이 돌아왔다. 다나우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그나마 기력을 불어넣은 모양이다.
승지가 눈짓했다.
“잠깐 자리 좀 비워줘.”
“알겠네!”
승지가 성좌랑 대화하려한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 우르르 자리를 피했다.
오조희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더니 제일 마지막으로 나갔다.
바로 승지가 질문을 던질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승지는 허리를 짚은 채 한숨만 내쉬었다.
참고 참던 성좌는 승지의 표정에 오히려 겁을 덜컥 먹었다. 그가 실망할까봐.
[승지야.]
“뭐였냐, 그거.”
[…그건 ‘우리’만의 공간이야.]
“우리라는 게 마왕이냐?”
[아냐! 그건 모든 성좌들에게 있어. 계약자에게 인벤토리가 있는 것처럼. 성좌에게도 성좌만이 지닐 수 있는 공간이 있어. 그게 계약이니까.]
“계약이라고?”
[…우리의 힘은 성좌신에게서 나오는 거잖아?]
성좌가 주저하며 말했다.
[스스로 공간을 가지고 존재하기 때문에 성좌들은 자발적으로 계약자와 분리될 수도 있어. 다른 계약자를 찾기만 한다면.]
자연스레 승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동안 반응 농담 삼아 성좌 녀석이 류의건에게 갈 거냐고 묻곤 했는데 그게 사실은 진짜 가능했다니.
아무리 강한 각성자라도 순식간에 성좌에게 버림받고 비각성자로 전락할 수 있었다.
승지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성좌가 급하게 덧붙였다.
[다른 성좌들이 모두 이 사실을 아는 건 아니야! 어쩌면, 나와 다나우 빼고 아무도 모를 지도 몰라!]
“그게 무슨 소리야? 넌 어떻게 아는데?”
[그건.]
성좌는 그동안 승지에게 감추려고 애를 썼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제 와서 승지를 버릴 수도, 그러고 싶지도 않다는 사실도 함께 떠올렸다.
어떡하면 좋아.
성좌는 울음을 토해내는 심정으로 대화창을 띄웠다.
[그건 내가 한 때 마왕에 가까웠던 몸이기 때문이야.]
성좌가 만들어낸 대화창이 길게 그들 사이로 떠다녔다.
멍하니 대화창을 노려보던 승지가 더듬거리듯 말을 뱉어냈다.
“잠깐만. 넌… 마왕이 아니잖아. 다나우를 마왕으로 만들려고 했을 뿐이라면서?”
[맞아.]
[난 그냥 다나우를 마왕으로 만들어서 모두를 지키고 싶을 뿐이었어.]
[하지만 다나우는 모두를 마왕으로 만들고 싶어 했어. 모든 사람을.]
[그래서 도망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