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갑자기 분위기 친선전 (4)
“좋아요!”
방긋 웃은 이연주가 허공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무기 괜찮죠, 심판 님?”
“치명적인 건 안 됩니다.”
“걱정 말아요.”
아까 공격했던 쪼끄만 칼이나 꺼내려나 싶었는데,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건 네모나게 각진 금속 무기였다.
[헉, 저게 뭐야??]
저거 쇠 줄 톱이잖아.
말끔하게 차려입은 이연주가 공사판에서나 볼법한 도구를 든 모습에 순간 인지부조화가 왔다.
“아, 깜박하고 설명을 안 드렸는데 이연주 각성자님은 정형외과 출신이십니다!”
“뭐?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당황한 승지의 눈이 매끄러운 톱날이 번쩍이는 걸 포착해냈다.
분명히 아까까지는 지적이고 똑똑해 보이던 이연주가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대로 자리를 박찬 이연주는 완전히 고깃덩이를 노리는 하이에나였다.
“후후 전문가의 솜씨를 보여드리죠!”
“이런 씨!”
급하게 겉옷을 벗으며 뒤로 물러난 승지가 옷을 팔에다 말았다.
[조심해!!]
찌이익!
미처 다 감기도 전에 천이 찢어지며 눈앞에 섬뜩한 톱날이 튀어나왔다.
오, 시발.
식은땀이 흘렀지만, 톱날은 그대로 걸려있었다. 간신히 팔에 소매를 끼운 채로 옷을 뒤집어 막아낸 것이다.
이연주는 톱이 찍힌 그대로 내리그으려 했지만, 옷이 감긴 탓에 내려가질 않았다.
“걸렸네?”
승지가 홱 옷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힘이 부족했다.
젠장, 저쪽도 각성자라고!
살짝 당황했던 이연주가 힘의 차이를 알아차리고는 다시 여유를 되찾았다.
“아깝네요. 시도는 좋았는데.”
“시끄러!”
팽팽해진 옷을 양팔로 끌어당긴 승지가 소리쳤다.
“야! 스탯 힘에다가 빨리!!”
[알았어!]
“누구한테 말하는 거죠?”
성좌가 바로 두 번째 승리 보상을 투자했는지 팔뚝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이를 악문 승지가 다시 옷을 휘릭 돌려 당겼다. 무기까지 빼앗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승지의 힘이 강해지자 버티지 못한 건 이연주 쪽이 아니었다.
찌지직!
팽팽하게 갈리던 옷이 기어코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났다.
너덜너덜해진 소매만 남은 승지가 빠득 이를 갈았다.
“너 이 자식. 끝나면 옷값도 내놔!”
“얼마든지요.”
자유롭게 풀려난 이연주가 빙긋 웃으며 톱을 내려쳤다.
무시무시한 톱날은 스칠 곳도 많은데 찍히면 최소한 살점 한 덩어리는 내줘야 할 거다.
급한 대로 찢어진 옷을 당겨가며 톱을 걸어 낚아보려고 했지만, 그 때마다 이연주가 찢어발기는 통에 수포로 돌아갔다.
짜작! 짜악! 쫘악!
기어이 걸레짝이 된 옷의 잔해가 나풀나풀 흩어졌다.
빌어먹을, 저걸 어떻게 잡지?
계속 방어에만 급급하다 보니 콤보는 쌓을 생각도 못 했다.
접근해서 승룡권이라도 갈기기엔 저 톱이 무지막지하게 거슬리고.
원거리… 원거리 스킬….
머리를 굴리던 승지가 돌연 소리쳤다.
“있다!”
“?”
승지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뒤로 훌쩍 물러났다.
격겜에서 장풍을 빼놓을 쏘냐!
소류겐도 나갔는데 아도겐이 안 나가겠어?
승지가 다시 이연주가 접근하기 전에 서둘러 자세를 잡았다.
파동권 커맨드는 ↓↘→ + P!
[오오! 승지야! 뭘 보여주려는 거야?!]
그래!
승지가 자신만만하게 주먹을 쥐자 성좌도 덩달아 흥분했다.
[o(≧∇≦o)보여줘, 보여줘!!!!]
승룡권을 했던 것처럼 빠르게 동작을 입력한 승지가 힘차게 주먹을 뻗으며 외쳤다.
“아도겐!!!!”
…….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푸, 푸흑!”
최자림이 침을 뿜었다.
이, 이런 시발.
붉은 불꽃에 휩싸이는 건 기대도 안했지만 푸른 장풍이 튀어 나가기는커녕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승룡권은 나가놓고 왜 이건 안 돼!!
[응?? 승지야. 뭐 했어?]
격투게임을 모르는 성좌가 순수하게 되묻기까지 하자 기어이 수치심이 최고점을 찍었다.
“개시팔…….”
순간 엄청난 공격이 날아올 줄 알고 움찔했던 이연주가 의미심장하게 훗 소리를 냈다.
“어머나. 민망해라.”
승지의 얼굴에 피가 몰렸다.
“크하하학! 채승지 씨의 회심의 공격은 안타깝게도 불발이었습니다!”
아까 싸울 땐 잘만 닥치고 있더니 최자림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놀려댔다.
“대체 뭐라고 말한 거죠? 한국말이 아니라 모르겠습니다! 아자뵤였나요!”
“닥쳐!”
시뻘개진 얼굴로 승지가 소리쳤다.
쪽팔려 돌아가시겠다.
아니, 근데 아무리 격겜을 안 해도 저 말은 알지 않냐? 다들 게임 안 해?
물론 모두가 아는 게임 대사라도 외치면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상에서 쪽팔린 게 제일 싫은데 각성한 뒤로 왜 이렇게 많아진 거 같지?
이게 다 성좌 때문이다.
승지의 눈이 험악해지자 눈치는 빠른 성좌가 얼른 상태창을 열었다.
[승지야! 우리도 무기를 쓰는 거야!]
인벤토리가 휙 열리며 길쭉한 창대를 드러냈다.
맞다. 류의건한테 팔았다가 다시 산 뭐시기의 창!
[라드이안의 창이야!]
가뿐하게 사소한 건 무시한 승지가 창을 붙잡았다.
승지의 손에 잡혀 나타난 창을 본 박편호가 손가락질 했다.
“어어! 심판! 저 무기는 위험하잖아! 실격! 실격 처리해!”
“그래, 위험하네!”
“이 새끼들이. 그럼 맨손으로 톱질하는 애를 어떻게 이겨?”
“저, 저, 버릇없는…! 어디서 쌍욕이야!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에라이. 심판! 어떡할 거야!”
승지가 욱해서 소리쳤다. 류의건은 아까 듣고 싶어 하던 반말을 들었는데도 매우 곤란한 얼굴이었다.
“…확실히 창은 위험합니다.”
“나 이거 많이 써보지도 않았어!”
“그래서 더 위험하다는 뜻이지만… 만약 이연주 씨만 괜찮다면 이대로 계속하는 걸로 하죠.”
류의건은 선택권을 이연주에게 넘겼다. 여전히 흉흉한 줄 톱을 들고 있던 이연주가 고민하듯 턱을 괴었다.
“으음. 창과 톱이라. 거리로 따지면 제가 너무 불리한데.”
“방금 전까지 생사람을 썰어버리려던 사람이 할 소리냐.”
승지의 말에 살짝 웃은 이연주가 제안했다.
“그렇다면 승부를 판정 승부로 바꿀까요? 다치지 않게 앞으로 한 대만 때리면 승리하는 걸로 말이죠.”
“판정 승부?”
“그래요. 대신 앞으로 10분 동안 한 대도 못 때리면 둘 다 실력을 인정하고 이긴 걸로 해요. 어때요?”
버티기만 해도 공짜 치료권을 준다는 소리잖아?
개이득.
“그렇게 합의하시겠습니까?”
“네.”
“알았어.”
승지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자 이연주의 미소가 위험스레 더 짙어졌다.
“약속한 거예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일단 공격해보려던 승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쿠두두둑.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무언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종이로도 총알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갑자기 나타난 그것들은 모두 책이었다.
마치 책에 의지가 있는 것처럼 솟아오른 책이 이연주를 감싸듯 덮기 시작했다.
[방패? 아니, 방어막이야! 책으로 벽을 만들었어!]
성좌가 도서관장이라더니 책 한 번 제대로 써먹는다.
“갑자기 총알이라니 뭔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과연 채승지 씨가 총알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제 방어막을 뚫을지 궁금해져서요.”
쌓여가는 책 너머로 이연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10분이면 우리가 실험체로 다시 만나겠네요.”
“…!”
퍼억!
그제야 이연주의 의도를 알아차린 승지가 급하게 창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차르륵 모여든 책은 두터운 방패처럼 창을 가로막았다.
실수했다!
[ 1콤보! ]
공격에 성공했다는 콤보는 떴지만 정작 창끝은 두꺼운 종이에 꿰뚫린 채 나아가질 못했다.
[왜 그래, 승지야? 버티기만 해도 우리가 이기는 거잖아!]
“멍청아, 쟤도 이기는 거잖아!”
[으응? 그게 왜… 아!!]
10분간 버티면 둘 다 승리한다는 조건은 보상도 마찬가지란 뜻이다.
평생 공짜로 치료받으면 뭐하냐고, 지금 맨정신으로 사람을 썰어버리려는 미친 사이코 의사가 날 실험체로 삼겠다는데!
이연주는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시간제한이 있는 승부를 제안한 것이다. 어차피 자기 실험체로 써먹을 거면 치료도 해줘야 하니까 승지도 이긴다고 손해 볼 것도 없었다.
나 좋을 것만 생각했어, 빌어먹을!
반드시 혼자만 승리해야 할 이유가 생긴 승지가 뒤늦게 투지를 불태웠다.
양손으로 창을 붙잡은 그가 마구 책으로 감싸인 이연주를 내리쳤다.
콱! 콰직!
[ 6콤보! ]
[ 7콤보! ]
콤보가 시원하게 올라갈수록 조금씩 책에 찍힌 자국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웃!”
푸슉.
책 사이로 정확하게 톱날이 튀어나왔다. 하마터면 콧등을 찍힐 뻔한 승지가 화급히 떨어졌다.
“얌전히 계세요. 저만 승리하는 것보단 같이 승리하게 해드리는 게 더 좋잖아요?”
“웃기지마.”
선심 쓰는 말투라니. 완전히 얕보고 있잖아!
승지는 아예 책을 붙잡고 기어 올라갔다. 끊임없이 생성되는 책은 밀려 툭툭 떨어지면서도 계속해서 생겨나 겹겹이 견고한 벽을 만들었다.
마치 끊임없이 솟아나는 책 분수를 건드리는 기분이다.
[어떡하지? 단순한 공격은 안 먹힐 거야!]
그래도 일단 찔러봐야지.
승지는 아예 자리를 잡고 창으로 내리찍기 시작했다.
콰각! 콱!
표지를 뚫고 책이 찢겨나갔지만, 이번에는 이연주도 위쪽으로 공격해오지 않았다.
쳇. 벌써 눈치챘나. 이번에 공격하면 그때 내가 치려고 했더니.
“3분 지났네요.”
심지어 이연주는 안쪽에서 시간까지 재가며 사람 복장을 긁었다.
누군 뭐빠지게 공격중인데 시계나 보고 있냐?
승지가 한껏 짜증을 담아 창끝을 찍어 발겼다.
미션 보상이 기다리고 있지 않았더라면 진작 때려치우고 다른 방법을 찾아봤을 거다.
[ 28콤보! ]
[ 29콤보! ]
[ 30콤보! ]
[ 서브 미션 완료! ]
[ 서브 미션 보상 : 스킬 ‘가드 크러시’ 획득! ]
바로 이걸 기다렸다고!
이름에서부터 지금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거란 느낌이 팍팍 왔다.
[ 가드 크러시 : 상대가 계속 방어만 하고 있을 때 30콤보를 소모하여 방어 기술을 제거한다. ]
콤보를 소모한다고?
마침 미션을 하느라 콤보도 딱 30이다.
휘릭.
바로 창을 공중에서 돌린 승지가 새 스킬을 사용하며 내려찍었다.
“밑져야 본전이지! 크래쉬!”
챙강!
지금까지 들리던 찢어지는 소리 대신 유리가 깨지듯 청량한 음이 터져 나왔다.
마치 전류를 꽂아 넣은 것처럼 부르르 떨린 책들이 산산이 터져나갔다.
“아니…!”
흩어지는 책들 속에서 처음으로 당황한 이연주의 모습이 드러났다.
“대체 어떻게…!”
“반가워?”
발끝으로 날아가는 책을 박찬 승지가 그대로 창을 후렸다.
이연주가 뒤늦게 막아보려고 했지만, 처음부터 방어막이 깨질 줄 알았던 승지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 1콤보! ]
타앙-!
시원하게 손을 가격한 창끝이 줄곧 들고 있던 쇠 줄 톱을 날려버렸다.
팅, 팅, 털썩.
탄력 있게 바닥에 튀어간 쇠 줄 톱이 허무하게 땅에 뒹굴었다.
아연실색한 이연주의 손에서 피가 한 줄기 흘렀다. 톱을 놓칠 때 긁힌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눈앞의 상황에 온 정신을 빼앗겨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단 한 번도, 누구에게도 뚫리지 않았던 스킬인데……!”
“도저히 말도 안 돼?”
승지는 담담하게 비꼬았다. 이연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채승지 씨의 승리입니다.”
류의건도 놀랐는지 천천히 판정을 알렸다. 그러나 아무도 환호하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찝찝하군.
놀란 이연주보다 실망하는 미스핏 길드원들이 더 신경에 거슬렸다.
“아아….”
“…그럼 저주는 어떡하지.”
“정말 이대로 보내?”
[승지야! 정말 멋졌어! 마지막에 공격할 때 날아가는 책을 발판 삼아서 추진력을 얻은 게 너무너무 끝내줘!]
그래.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다른 사람을 다 합한 것보다 시끄러운 성좌의 응원에 승지가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