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넌 마왕이고 동시에 버러지다 (2)
다량의 피가 빠져나간 탓인지 의외로 머리가 차가웠다.
저주가 몸을 파먹어 들어가는 게 느껴지는데도 의외로 기분이 상쾌했다.
팔을 치켜들려던 승지는 반대쪽 어깨가 돌아가는 걸 느끼고는 움찔했다.
어디든 몸을 움직이려고 하면 의도하지 않은 부위까지 함께 움직였다. 저주가 퍼져나간 자리와 몸이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것 같았다.
아하, 장난을 쳐보시겠다?
승지는 무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의 눈꺼풀도 함께 감겼다.
뭐, 상관없어.
승지는 내키는 대로 함께 움직이도록 내버려두고는 그대로 클랩에게 돌진했다.
그의 팔다리가 우쭐거리며 함께 나부꼈다.
저주의 효과를 보며 클랩은 더 찢을 곳도 없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우습다.
그러나 그런 광대 같은 꼬락서니를 무시하고 지나가려던 클랩의 웃음이 곧 지워졌다.
어쨌든, 광대의 손에 들린 칼도 칼은 칼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광대는 칼을 다룰 줄 안다.
써걱!
매끄럽게 클랩의 팔을 자르고 지나간 무기를 본 클랩의 눈이 커졌다.
“칼은 칼이네.”
잘 들어.
승지가 씩 웃었다.
“어이, 마왕 대가리. 네가 죽으면 저주도 풀리겠지?”
“인간 주제에!”
클랩의 잘린 팔에서 저주가 쏟아져 나왔다. 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체조차 남지 않을 때까지 저주를 퍼부어주마!”
“와봐!”
승지가 도발했다. 그는 여전히 멋대로 움직이는 몸을 신경 쓰지 않고 움직였다.
어차피 여기서 자신의 웃긴 꼬락서니를 볼 인간들은 범윤오 때문에 피를 쏟고 있었다.
못 본단 이야기지.
뭐, 클랩의 부하들이나 범윤오는 이 꼴을 보겠지만.
걔네는 다음 차례에 죽일 예정이니 괜찮다.
승지는 프레임을 자기 자신에게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저주를 쏟아내는 클랩의 품속으로 곧장 뛰어들었다.
“죽으려고 작정했구나!”
클랩이 노호하며 그대로 피와 저주를 뿜었다. 닿기만 해도 살이 썩어 들어가고 손발이 문드러져 죽을 저주들이었다.
그런데 당장 잘 썩은 살점이 되어 쓰러져야 할 승지가 연달아 클랩을 베어냈다.
“커헉?!”
클랩은 동시에 왼팔 위쪽과 배, 허벅지를 베였다.
그는 믿을 수조차 없었다.
신성 스킬조차 없는 애송이가 자신의 저주에서 버티다니!
혈관에서 흘러나온 저주의 유령들이 비명을 지르며 승지에게 부딪쳐댔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승지의 몸을 통과하지 못했다.
승지는 자신의 몸 자체를 프레임 속에 가둬놓았기 때문이다.
프레임 바깥에선 아무리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도 안 쪽까지 영향을 받으려면 둘은 같은 프레임 안에 있어야 한다.
저주가 승지의 몸을 침투해도 프레임을 거쳐 진행이 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세계에 갔다 온 경험 좀 응용해봤는데, 잘 먹히는군.
승지는 후두둑 떨어지는 클랩의 동강난 몸을 유유히 감상했다.
아무리 매서운 기세로 돌격한다고 한 들 달려갈 몸이 없다면 소용없다.
“하찮은 인간이!! 내가 죽어도 저주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어리석은 것!! 살아서도 죽어서도 지옥을 맛보거라!”
클랩이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로 계속 저주를 퍼부었다.
뭐, 별로 걱정은 안 한다.
승지는 칼끝을 높이 들어올렸다.
“살아있으면 언젠간 풀리겠지.”
“마왕님!!”
큐라가 비명을 질렀다.
콰직!
뺨을 실룩인 승지의 무기가 클랩의 머리를 박살냈다.
“꺼흑!”
클랩의 눈이 양 쪽으로 돌아가더니 안광이 푹 꺼졌다.
“안돼애애애애!!”
고성의 비명이 들리자 승지가 바로 무기를 돌렸다.
저주는 나중에 병원이든 류의건이든 맡겨서 풀면 되지만, 마왕이 죽었는데도 부하들이 살아있으면 곤란하다.
아주 쉴 틈을 안 주는군.
순간이동으로 나타난 큐라가 재빨리 승지가 쪼개놓은 클랩의 몸을 끌어안았다.
“마왕도 죽었으니 빨리 꺼져! 너희들 상대할 시간 없으니까!”
“…정말이지 대단해!”
큐라가 눈물을 흘리는 눈으로 히죽 웃었다.
“감히 우리 마왕님을 이렇게 까지 몰아붙이다니. 역시 내가 보는 눈은 틀리지 않았다니까, 자기?”
“무슨 개소….”
문득 승지는 아주 느린 속도로 자신의 몸을 스며드는 온갖 저주들을 느꼈다.
마왕이 죽으면 원래 던전이고 부하들이고 싹 사라지는 거 아니었어?
불길한 예감을 느낀 승지가 큐라를 향해 두 번째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프레임을 아무리 가속해도 순간이동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불쌍한 우리 마왕님.”
큐라가 바로 앞에서 다시 나타나며 슬프게 속삭였다.
그가 원한이 철철 넘치는 클랩의 뺨을 어루만졌다.
“마왕님의 뜻은 이 큐라가 계승할게요.”
입을 맞출 듯이 고개를 숙인 큐라의 입에서 송곳니가 번뜩였다.
그리고는 그대로 클랩을 얼굴부터 뜯어먹기 시작했다.
“으윽?!”
“히익!”
광대는 물론 승지까지 흠칫했다.
“잡아먹고 있잖아!”
방금 전까지 자기 마왕이었던 육체를 뜯어먹는 큐라에게서 흉흉함이 흘렀다.
젠장, 마왕이고 부하고 다 괴물 놈들이라니까!
승지가 칼을 집어 던졌다.
그러나 큐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들더니 손가락 사이로 칼을 잡았다.
“잡았어?!”
살점을 머금은 괴괴한 미소가 그의 얼굴로 퍼져나갔다.
주인이었던 마왕과 달리 그는 육체적으로 싸울 일이 훨씬 많았던 것이다.
그런 큐라가 클랩의 저주까지 얻으면 훨씬 더 사악한 존재가 될 게 분명했다.
“야 이 빡 대가리야! 안 막고 뭐해! 살점을 먹어서 본인이 마왕이 되려는 거잖아!”
범윤오가 악을 썼다.
저 새끼가 훈수를?
유월과 번태와 씨름하고 있던 범윤오가 그 와중에 볼 건 다 보았는지 그 와중에 탐욕을 부렸다.
“저걸 먹어야해! 내가 먹어야 한다고! 그래야 이걸 떼어놓지, 썅!”
범윤오가 버둥거리면서 손을 뻗자 아까보다 범위가 늘어났는지 큐라에게도 그의 스킬이 닿았다.
“웃?! 꺄악!”
그래도 역시 마왕은 아닌지라 큐라는 클랩처럼 범윤오의 공격을 쉽게 받아넘기지 못했다.
큐라의 손에서 쨍그랑 칼이 떨어지고 온몸에 난 구멍에서 피를 분출했다.
범윤오가 바닥을 기며 소리를 질러댔다.
“내려놔! 아니, 내 입으로 집어넣어! 그럼 봐줄게! 봐준다고!”
“저, 저 욕심 많은 새끼. 귀청 떨어지겠네.”
역시 멍청한 놈들은 자기가 망할 줄도 모르고 욕심부터 부리고 본다니까.
덕분에 손쉽게 무기를 회수한 승지가 가볍게 큐라의 목을 쳤다.
사방이 안 보이고 안 들리는 상태라 고스란히 칼에 맞은 큐라는 꿈틀거리다가 스르륵 사라졌다.
그리고 남아있는 클랩의 살점들은.
에휴, 시발.
승지가 역겨운 표정으로 휙 쓸었다. 그러자 다 잘린 파를 냄비에 넣듯 칼 옆면에 밀린 클랩의 시체가 인벤토리 안으로 쏙 들어갔다.
뒤처리까지 해야한다니 마왕 새끼들 정말 지긋지긋하다.
“보관, 이 아니라 염병할 나중에 다 불태워 버려. 하나도 남김없이.”
“응, 알겠어!”
광대가 꺼림칙한 승지를 대신해 마왕의 시체를 맡았다.
“이번에도 잃어버리면 너 진짜 가만 안 둔다.”
“다, 다나우가 없어진 건 정말 예외야!”
승지가 아무렇지도 않게 귀환하는 걸 보며 범윤오는 바닥을 부득부득 긁었다.
따지고 보면 방금 승지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지만 범윤오는 하나도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격렬한 증오심만 들끓었다.
저 놈이 오지만 않았어도 이따위 비참한 꼴로 바닥을 길 일이 없는데!
이세계에서 완전히 변화한 후 웅장하고 대담하게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걸 위한 알러트 신호를 보내지 않았나!
그런데 알에서 부화하기 직전에 채승지를 만나버린 것이다. 그것도 광대 자식이 이세계로 끌고 오는 바람에.
시대의 영웅도 아니고 고작 광대에게 농락당했다는 수치심이 그를 더욱 미칠 듯한 지경으로 몰아갔다.
게다가 그가 오장이 뒤집히는 고통을 맛보고 있을 때 더한 현실이 닥쳐왔다.
뿌드득!
“끄아아아악!!!”
“됐다! 분리했어!”
그야말로 몸이 두 쪽으로 나뉘는 충격 속에서 범윤오가 척추를 뽑아내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던 유월과 번태가 마침내 그를 알과 분리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제대로 무언가를 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닌, 오로지 손으로만 해낸 쾌거였다.
물론 그것은 평범한 절단 수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을 따르게 했다.
두 랭커들은 상대방과 상의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잡히는 살점을 마구잡이로 때리고 잡아 뜯었기 때문이다.
“흐아아아! 아파아아!! 아아악! 이 개새끼들이!!”
“효과가 있나요?”
“그래, 드디어 이게 멈추는군!”
번태와 유월이 욕설을 무시한 채 눈과 귀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를 문질러 닦았다.
드디어 범윤오의 공격이 멈춘 것이다.
알과 분리되자 마왕이 되는 것도 실패한 게 분명했다.
골반 아래쪽을 그대로 알에 남겨둔 채 범윤오는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가 모골이 송연해지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움켜쥐었다.
“내가 왜! 왜 나만 이렇게 당하는 거야!”
“네가 편을 잘 못 골랐으니까, 이 등신아.”
승지는 클랩이 걸었던 저주가 사라지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돌아왔다.
마왕 클랩은 확실히 죽었다.
그리고 꼴을 보아하니 마왕이 되려던 범윤오도 곧 숨질 것 같았다.
승지가 아등바등 기어 다니는 범윤오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가만두지 않겠어! 가만두지 않겠어! 으아아악!! 다 죽여 버릴 거야!”
“자, 침착하게 범윤오군. 이대로 아래쪽을 포션으로 치료하고 피부를 덮은 수포를 제거할 걸세. 상당히 아프겠지만 그만한 고통이면 성좌신도 페널티로 인정해주지 않겠나! 미리 정산한다고 생각하세!”
“닥쳐! 닥쳐! 닥쳐어어!!!”
범윤오가 미친 듯이 발광했지만 마왕도 뭣도 아니게 된 인간을 랭커들이 제압하지 못할 리 없었다.
번태가 뿔이 달린 범윤오의 뒤통수를 꾹 누른 채 포션을 꺼냈을 때였다.
초조하게 다른 성좌를 살릴 수 있을지 지켜보던 유월이 딱딱하게 물었다.
“이 수포들마다 성좌의 시체가 들어있다면, 범윤오는 죽이고 시체만 성좌로 되살릴 순 없나요?”
번태가 눈썹을 꿈틀거렷다.
유월은 유량의 성좌 때문에 간신히 범윤오를 죽이고 싶은 걸 참고 있었을 뿐이다.
한숨을 삼킨 번태가 재빨리 선을 그었다.
“아니, 그건 불가능하네.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겐가?”
“지금 죽여 버리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환이 될 텐데요?”
“유청 군이 바로 그래서 채승지 군을 죽였던 것으로 아는데.”
번태와 유월의 시선이 맹렬하게 부딪쳤다. 그러나 정작 이야기의 당사자였던 승지는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그 얘기 좀 기다려봐.”
“무슨 소린가, 승지 군! 자네도 길드 연합의 실수를 반복하려는 겐가!”
“내 대가리가 깨진 게 아니라면 저쪽 하늘에서 날아오는 게 마왕 같거든?”
그들이 흠칫했다.
하늘 한 쪽에서 거대한 폭풍우에 밀려나듯 구름이 가늘게 감기고 있었다.
마왕 나르키스의 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