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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환영합니다 (3)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승지에게 힘을 봉인 당했던 신의 심판자가 자신 쪽으로 머리를 고정했다.

[헉! 꺅! 여기서 마주치면 어떡해! 빨리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니야? 우리가 한 짓이 있잖아!]

그건 그런데.

“왜 둘이 같이 옵니까?”

승지의 몸이 먼저 유월 쪽으로 나아갔다.

클랩의 성에서 누군가 자신을 찾으러 올 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다. 기껏해야 큐라 정도일까.

그런데 다른 각성자도 아니고 유월이 자신을 찾으러 온 데다, 이상한 불청객까지 껴있는 이 상황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승지 씨를 찾다가 만났습니다. 뒤를 쫓았거든요.”

유월은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는 듯 턱을 까딱였다. 큐라가 그의 뒤에서 살짝 머리를 내밀었다.

“자기! 보고 싶었어! 거스 대왕님도 인사해!”

“진짜 살아있었군….”

거스가 영 탐탁찮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체 뭐가 어떻게 엮여야 저렇게 되냐?

살아서 하나로 뭉쳐 다니기엔 영 이상한 조합 아닌가. 승지는 여전히 얼떨떨했다.

체르마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났다.

“자네가 어떻게… 저 자를?”

승지에게는 단순히 손잡이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대어 은근한 위협만 가했던 체르마가 심판자를 보더니 아예 꽉 칼을 틀어잡고 있었다.

뭐야. 이 반응은. 제국이랑 심판자랑 사이가 안 좋냐?

막연히 성좌신을 대신해 심판을 내리는 놈이니 제국과도 사이가 좋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귀족들의 반응은 마왕이라도 나타난 것 같은 분위기였다.

“…누가 여기까지 들여보낸 거야?”

“지금이라도 물러나야….”

황제가 신의 심판자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기에 다들 눈치를 보고 빠지지 못할 뿐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기묘한 시선은 아랑곳 하지도 않는 신의 심판자가 말했다.

“네가 봉인한 내 힘을 되돌려 받기 위해 왔다.”

“난 봉인 같은 거 할 줄 몰라.”

일단 심판자가 승지를 보자마자 먼저 공격을 퍼붓지 않은 건 좋은 신호였다.

그래도 승지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심판자의 힘을 돌려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네 힘은 그냥 내 스킬 때문에 없어진 거다. 못 돌려줘.”

“…….”

심판자는 실망하거나 그럴 리 없다는 현실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메고 있던 칼을 꺼내 위로 들어올렸다.

“광대에게 열라고 말해라.”

“…뭐라고? 너 이 자식 사실은 성좌가 뭔지 알고 있.”

푸욱!

승지의 뒷말은 가슴팍에 찍힌 칼 때문에 끊겼다. 유월의 눈이 커지고 옆에 있던 체르마가 놀라 소리쳤다.

“우왓!”

“꺄아악! 자기야!!”

큐라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승지는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아프지도… 않네?

승지는 거대한 구멍이 뚫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 심판자가 칼을 꽂아 넣은 자리였다.

원래라면 승지의 몸을 통과해야 했을 검은 새까만 공간에 박혀 있었다.

언뜻 든 인상은 인벤토리였다. 그러나 성좌가 열어주곤 하던 인벤토리는 열린 공간 안으로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이곤 했다.

그러나 지금 심판자의 칼이 박힌 곳은 검은 살로 된 벽처럼 꿀렁였다.

반응은 엉뚱한 곳에서 흘러나왔다.

[아야아……☹.]

순식간에 승지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왜 네가.

쑤우욱!

심판자가 그대로 칼을 빼냈다. 분명 아무것도 없이 매끄러웠던 칼끝에 푸르고 둥근 빛이 찍혀 나왔다.

선명한 푸른빛의 덩어리는 팟하고 작게 터지더니 다시 심판자에게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단순히 철가면에 날개가 달린 것 같은 심판자의 모습에 뚜렷한 변화가 나타났다.

실체보다도 더 거대해지고 위압감이 감도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괴이한 존재로 변이했던 것이다. 보는 자에게 공포를 강요하는 힘이었다.

승지의 가슴에 열렸던 공간도 닫혔다. 그러나 승지는 여전히 칼이라도 박힌 것처럼 숨이 답답했다.

“…방금 뭐야.”

“돌려받았다.”

심판자는 칼을 거두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심판자의 시선이 불에 달군 창이라도 되는 것처럼 귀족들이 삽시간에 떨어졌다.

“어이? 설명 안 하냐?”

심판자는 이미 승지의 존재를 잊었다. 그는 어느 한 쪽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유월의 뒤쪽이었다.

이 새끼가?

심판자가 유월을 노린다고 오해한 승지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그의 일행만 있는 게 아니었다.

완전히 잊고 있던 황제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오늘은 돌아가게. 심판자여. 어떤 마왕도 그대가 있는 곳엔 찾아오지 않을 걸세.”

“…….”

심판자는 여전히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승지는 불현듯 그곳이 큐라가 있던 자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야, 저거 황제야. 나도 딱히 내키지는 않는데 넌 이세계 인간이니까 황제말은 들어야 하지 않냐?

심판자는 여지없이 기대를 배신해주었다.

“악은 처단한다.”

심판자는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콰앙!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벽 하나가 반파되었다.

그러나 그가 기대했던 서큐버스의 시체는 나오지 않았다.

귀족들은 갑자기 나타나 검을 휘두르는 심판자를 보고도 비명을 지르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너무 자주 보아서 익숙해진 인간들 같았다.

이 미친놈들, 도대체 뭐야?

승지는 정수리까지 차고 오르는 의문을 참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캐묻고 싶은 건 정작 심판자가 아니었다.

성좌가 아직까지 대화창을 띄우지 않고 있었다.

“…놓쳤군.”

신의 심판자는 다시 검을 집어넣더니 크게 한 번 날개를 펄럭였다.

“야, 잠깐. 어딜 그대로 째려고. 방금 그거 뭐냐니까?”

심판자는 승지의 손이 닿기 전에 또 다시 거대한 푸른빛의 광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그대로 훙 날아올라 사라졌다.

뭐 저런.

결국 황당함을 참지 못한 승지가 소리쳤다.

“성좌 너 당장 튀어나와!”

승지에게 다가오려던 유월이 잠시 멈췄다. 성좌와의 대화를 마칠 수 있게 해주려는 것이다.

띠링! 띠링!

[승지야… 당황할 거 없어!]

[저건 신의 심판자의 힘일 거야! 나도 완벽한 콤보는 성좌신이 준 스킬이라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걸 몰랐어!]

“그렇다고 사람 몸에 꽂아서 가져가는 게 말이 되냐!”

[헉… 설마 베였어?]

“아니 멀쩡하지!”

승지가 성질을 냈다.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었으니.

“너 나한테 숨기는 거 더 없어?”

승지가 이를 갈았다. 성좌가 찔끔 대화창을 올렸다.

[난 승지한테 거짓말 안 해.]

“그럼 말 안한 거는?”

[안한 게 아니라 못한 거야! 나… 나 정말 승지한테 모든 걸 밝히고 싶은데…! 마왕 때문에!]

“넌 이미 죽었잖아. 그런데 마왕이 무슨 상관이야?”

[날 죽인 마왕은 죽지 않았잖아!]

성좌가 필사적으로 말했다.

[난 승지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안 해! 그 마왕은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언급을 하는 것만으로도 위험해서 그래. 정말이야! 승지가 사는 세계를 위험하게 만들 순 없잖아!]

“…그럼 이미 마왕이 지배하는 다른 별에선 괜찮냐?”

[어디? 아…!]

승지는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바로 몸을 돌렸다.

“야. 열쇠 내놔.”

“…!”

움찔한 체르마가 뜻밖에도 바로 품을 뒤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절대로 주지 않을 기세더니 이렇게 순순히?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냐?”

“자네가 아니라 신의 심판자를 보고 맡기는 거야. 적어도 심판자가 자네를 알면 최악의 지경까진 가지 않겠지.”

“퍽이나 고맙네.”

승지는 갈취하듯 그에게서 열쇠를 낚아챘다.

던전 열쇠는 치즈에 푸른곰팡이가 핀 것처럼 찝찝한 색이었다.

“…또 마왕이군요.”

그 때까지 지켜보던 유월이 중얼거렸다.

“승지 씨를 따라다니면 마왕이 마를 일은 없겠어요.”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승지는 급격한 현타가 왔다.

“……칭찬으로 들으면 됩니까?”

“네. 사냥감이 마를 일은 없잖아요.”

유월은 승지의 골칫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왠지 그가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 그럴싸하게 들렸다.

하긴 마왕 새끼들은 다 싹 잡아버리면 되는 거 아니냐. 거대한 미끼가 된 기분이긴 하지만, 이 미끼에는 이빨이 달렸다고.

유월이 말했다.

“그래도 일단은 돌아가죠.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난 없는데.

유월의 말을 들으니 승지는 갑자기 기분이 묘해졌다.

우주 한복판을 지나 찾으러 올 만큼 유월이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거… 괜찮네. 나쁘지 않나.

기분이 좋아진 승지는 뇌를 거치지 않고 말했다.

“그런데 그 옷은 대체…?”

“이거요?”

유월이 가볍게 쇄골 부근의 천을 당겼다. 와, 씨. 승지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여기 들어오려고 입어야 했어요. 알고 보니 이곳에서는 서큐버스의 차원문이 열리지 않더군요.”

“엣헴. 여기까지 오게 된 건 다 내 덕이도다!”

까먹고 있던 거스 놈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우쭐거렸다.

알고 보니 세 사람은 승지처럼 황제 앞까지 무사히 들어올 수가 없어서 신원보증을 따로 해야만 했던 것이다.

“신의 심판자도 잡았단 말입니까?”

“오히려 그 때문에 함께 온 저와 거스 대왕의 출입을 막고 싶어 하는 눈치더군요.”

유월의 말로써 제국과 신의 심판자의 사이는 좋지 않다는 사실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유월의 설명에 따르자면 그들이 대놓고 심판자를 막아서지도 못했다고 한다.

거 참 기묘하네.

“훗! 내가 이렇게 위대한 인물인 줄 이제 알겠노라? 여기까지 나를 데려오느라 모두 고생했노라!”

거스 놈이 자연스럽게 뻐기며 슬슬 무리에서 빠져나갔다.

“제국까지 왔으니 왕국으로 돌아가는 배만 타면 그대들과는 영원히 안녕이도다! 아쉽지 아니한가? 나는…!”

“빨랑 안 꺼져?”

자꾸 말이 길어지는 거스에게 승지가 확 손을 들어보였다. 거스 놈이 바로 줄행랑을 쳤다.

유월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처리해야 할 일은 정말 다 끝났군요. 문제는 서큐버스가 사라졌다는 건데.”

“하아 자기들~~!”

말하기 무섭게 큐라가 다시 나타났다.

“심판자 갔지? 정~말 십년감수 하는 줄 알았네!”

“죽은 거 아니었습니까?”

“섭섭하게 무슨 소리야! 신의 심판자가 자기 몸에 칼 꽂을 때부터 벌써 도망가고 있었지. 아마 심판자를 보고도 살아남은 서큐버스는 나뿐일 거야!”

큐라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정말 사람 귀찮게 하는 서큐버스지만 이제 집에 돌아갈 수단이라고 생각하니 저 얼굴도 제법 반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본인한테 얘기하면 난리 칠 테니 말하지 말자.

“자! 돌아가야지!”

큐라가 승지의 팔짱을 끼고 잡아당겼다. 하지만 승지는 움직이는 대신 유월을 기다리며 손을 내밀었다.

“뭐죠?”

“같이 돌아가야죠.”

승지는 자신이 지금까지 봤던 매체들을 싹싹 긁어모으며 최대한 멋있어 보이는 대사를 찾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괜한 미사여구 붙이면 더 촌스럽다는 걸.

“찾으러 와줘서 고맙습니다.”

“…….”

유월은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술을 벌렸다가 도로 다물었다. 붉게 물든 입술이 망설이듯 살짝 중얼거렸다.

“다신 사라지지 마세요.”

그리고 손을 잡았다.

[꺅!!! 기회를 놓치지 않는 남자!]

시끄러.

승지는 회심의 미소를 감추며 단단하게 잡힌 손에 만족했다. 이것덕분에 이번 일이 정말로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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