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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찍혔다 (5)

[히잉, 미안해, 승지야. 던전 안에서 스킬이 발동한 거라 튜토리얼처럼 가벼운 페널티라고 장담할 수가 없어.]

사지 마비가 가벼운 페널티라니. 환장하겠다.

“아까 박쥐 잡을 땐 괜찮았잖아?”

[그건 아마 콤보를 시작하기 전에 정했던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일 거야. 승지 네가 몬스터를 다 잡을 생각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 눈알들은 죄다 징그럽다고 생각하고 박살 내 버렸다.

즉 지금은 99콤보까지 가야 한다는 뜻이다.

승지가 질퍽하게 튀기는 액체를 고스란히 맞으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런 설정은 진작 좀 알려주지 그랬냐!”

[그건 네 스킬이라서 그래! 네 운명에서 발생한 힘이라 나도 완벽하게 알 수는 없어.]

성좌가 말하는 것과 동시에 때맞춰 알림창이 떴다.

띠링!

[ 성좌 연결도가 상승하였습니다. ]

[이것 봐! 내가 네 스킬을 파악하니까 연결도가 오르지? 튜토리얼이랑 미션을 해나가면서 나도 널 알아가려고 했던 거야!]

서브 미션의 존재 이유가 그거라니.

애초에 전지전능한 성좌가 아니라는 건 알아봤지만.

[ 56콤보! ]

“잠깐, 그럼 스킬이 전부 네가 준 게 아니란 말이야?”

[스킬은 각성자와 성좌가 연결되는 순간 신이 서로의 운명을 읽은 결과물이야. 내가 어디서 그런 격투 스킬들을 배울 수 있었겠어?]

퍽퍽퍽! 연달아 때리던 승지가 알 껍질에 걸린 지팡이 끝을 잡아당겼다.

“그럼 완벽한 콤보나 방어 스킬도….”

[다 네 운명이지!]

이런 젠장.

지금까지 쓰레기 같은 스킬을 줬다고 성좌를 욕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내 운명의 스킬이란다.

어쩐지 이세계에서 왔다는 놈이 콤보나 프레임 컨트롤처럼 격투 게임에서나 쓸법한 스킬을 준다 했다.

[그만큼 네 스킬은 특별해, 승지야! 조건이 까다롭긴 하지만 우리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졌을 지도 몰라.]

“그거 딱 하나만 마음에 드네!”

[ 80콤보! ]

여기까지 콤보가 쌓이자 부글거리며 알이 되살아나던 속도가 느려졌다.

팍!

꿈틀거리던 알이 다시 회복되지 못하고 쪼그라들었다.

아까랑 똑같은 물리적인 타격인데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어쨌든 일단 이것부터 조지고 보자!”

숫자가 줄어들수록 알에 떠오른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갈수록 또렷하게 노려보는 거 같은데.

끔찍한 모양새에 승지는 서둘러 남은 알을 깨트렸다.

[ 99콤보! ]

쩌적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연달아 알들이 폭발했다.

퍼퍼펑!

시원하게 터지는 알들을 보며 승지가 그제야 지팡이를 든 팔을 내렸다.

후우, 드디어 다 깼다.

쓰레기로 꽉 찬 방을 청소한 것 같은 만족감이 차올랐다.

그 때 갑자기 동굴이 흔들리지만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우르릉!

어디선가 한기가 서린 바람이 불어왔다.

[뭐지?]

승지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글라세로가 너를 기억하리라.”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벌레에 물린 것처럼 팔 한 쪽이 따끔거렸다.

“윽?”

[승지야! 괜찮아?]

승지가 따끔거리는 상처를 보려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 자리에 생전 처음 보는 문양이 하나 찍혀있었다.

눈꺼풀부터 시작해 정확히 눈동자를 관통한 세로 줄이 있는 눈 한 짝 그림이었다.

“……나 방금 저주 받은 거냐?”

[그, 그런 것 같은데?]

띠링!

[ 성좌 연결도가 상승하였습니다. ]

[헉! 왜 연결도가 오르지? 나까지 저주받았나봐!]

운명 공동체라더니 별 걸 다 공유한다.

혹시나 싶어 승지가 침을 묻혀 문양을 문질러보았지만, 문신처럼 딱 달라붙은 그림은 지워지질 않았다.

“스읍, 망했다.”

[어헝헝, 말도 안 돼! 여기까지 와서 저주라니! 원래 세계에 살 때도 걸려본 적 없는데!]

성님이 통곡하는 사이 상태창은 착실하게 떠올랐다.

[ 지하왕 글라세로의 저주에 걸리셨습니다!

자신의 안식을 방해받은 글라세로는 절대로 당신을 잊지 않을 겁니다.

그의 권속들이 당신을 쫓기 시작합니다!

추적 진행도를 모두 채우면 지하왕 글라세로가 현실에 나타납니다.

추적 진행도 : 1/100 ]

내용 한 번 살벌하네.

“어이 성좌.”

[흐어엉, 나 정말 착하게 살았는데 마왕이라니! 마왕의 저주라니!]

“지하왕 글라세로가 마왕이라고?”

[맞아! 끈적끈적하고 더러운 지하의 마왕, 글라세로! 어떡해, 승지야! 우리가 최초로 너희 세계에 마왕을 불러낼 수도 있어!]

“…….”

내가 영웅도 아니고 마왕을 불러낸 각성자가 된다고?

아니, 아무리 운이 없어도 그렇지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

최악의 미래에 승지의 이마에 살짝 땀이 맺혔다.

“……안 걸리면 돼!”

[그게 무슨 말이야, 그걸 어떻게 하는데!]

“그럼 얌전히 죽을 거야? 쫄지 마!”

[흐어엉 마왕을 잡으려면 영웅들이 다 몰려와도 부족할 텐데. 우린 망했어!]

성좌가 꺼이꺼이 통곡했지만, 승지의 정신은 오히려 더 예리해졌다.

마왕이든 뭐든 살면서 누구한테 찍혀본 적은 많았다.

내가 순순히 죽을 것 같아?

다행인지 불행인지 더 저주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방금 한 짓이 던전의 마지막 공략이었는지 벽이 꿈틀거리며 줄어들더니 사라져갔던 것이다.

퀘에엑!

던전이 괴상한 소리와 함께 터졌다.

“밖이다.”

승지가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밝은 빛을 보니 적응이 안 됐다.

그들은 다시 각성자 관리소로 돌아와 있었다.

자신은 물론 따로 떨어졌던 각성자들까지 모두 다.

“어라? 갑자기 나왔네?”

“끝, 끝난 건가요?”

초보 각성자들이 웅성거렸다.

유청과 최자림도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어떻게 된 거죠?”

“누가 던전을 끝낸 거야.”

유청의 말에 최자림이 번쩍 손을 치켜들었다.

“혹시 던전에서 무슨 짓을 하신 분 계세요? 알을 봤다거나?”

빌어먹을! 저 자식들 알에 대해서 알고 있었잖아!

그러나 졸지에 마왕 소환진이 되어버린 몸뚱아리로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다.

던전에 대해서 알고 있던 놈들이라면 글라세로의 저주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테니까.

어떡하지? 일단 쌩 깔까?

지팡이에 남아있던 액체를 후다닥 문질러 닦은 승지가 모른 척 다른 각성자들 틈에 끼어들었다.

그동안 최자림은 애타게 던전 공략자를 찾았다.

“정말 아무도 알을 안 건드리셨나요? 본 사람도 없어요?”

“큰일인데.”

“저흰 몰라요!”

“오히려 우리가 설명을 들어야 할 거 아니냐고!”

대놓고 벌이는 취조 분위기에 몇몇 각성자들이 항의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우리가 초보라지만 너무한 거 아닙니까?”

“맞아! 아까 위험할 때 바로 구해주지도 않았잖아!”

“나 다친 건 누가 보상해 줄 건데!”

“잠깐, 진정하세요!”

잘한다. 더 싸워라. 나 묻히게.

승지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사람들을 말리다 못한 최자림이 꺼낸 말에 바로 표정이 구겨지고 말았다.

“여기 마지막 공략은 글라세로의 알을 없애는 거라… 모든 눈을 동시에 감지 않으면 다시 살아나는 것과 함께 저주에 걸리거든요.”

잠깐, 뭐라고?

공략법까지 알고 들어왔단 말이냐?

“우리를 그런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려고 했던 겁니까!”

“아뇨! 오히려 사람이 많아서 안전하게 공략할 수 있는 기회였죠. 알 자체는 하나도 위험하지 않거든요.”

“교육이 끝난 뒤 여러분과 함께 그물을 덮어 한꺼번에 불태울 생각이었습니다…만.”

유청이 오묘한 눈빛으로 각성자들을 둘러보았다.

“대가는 알아서 감당하시겠지요.”

아니, 저 매정한 자식이?

그런 교육 내용은 시작 전에 빠릿빠릿하게 알려줘야 할 거 아니냐고!

졸지에 혼자 다 뒤집어쓰게 생겼다.

[승지야, 아무래도 안 되겠어! 저 사람들한테 도움을 요청하자!]

성좌가 훌쩍이듯 상태창을 띄웠다.

[마왕을 소환하게 될 저주에 걸렸다는 걸 알면 분명 가만있지 않을 거야!]

“그건 알지만.”

정보를 쥐고 있는 건 저쪽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밝힌다?

승지의 눈이 냉정해졌다.

“일단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자고.”

* * *

승지는 교육이 끝난 사람들이 회장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초보 각성자들은 투덜거리면서도 다음 미션 때 길드 차원에서 꼭 한 번씩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자 입을 다물었다.

무기를 반납하고 돌아가는 가장 뒷줄에 승지가 합류했다.

“아, 각성자님!”

딸그랑.

승지가 깨끗해진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최자림 씨. 아까 했던 얘기 좀 계속하고 싶은데요.”

“얘기?”

무기를 회수하던 유청이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반대로 최자림의 얼굴은 확 밝아졌다.

“와아앗! 그럼요! 이쪽으로 오세요! 저희 길드에 오신 걸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설마 저 사람을 길드에 가입시킬 생각입니까?”

“왜 아니겠어요?”

“…….”

모든 무기를 인벤토리에 넣은 유청이 짧게 소매를 펄럭거렸다.

“…알아서 하십시오. 저희 길드의 도움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에 또 봐요, 유청 씨! 밥 한 번 먹어요!”

“됐습니다.”

둘이 친하기는 무슨. 역시 구라였어.

승지가 말했다.

“아직 길드에 가입하는 건 아니고 일단 뭐하는 곳인지 좀 알아보고 싶은데요.”

“안내를 원하시는구나.”

뭐가 그렇게 좋은지 최자림이 큭큭 웃었다.

“좋습니다. 따라오세요. 저희 길드 본부까지 태워드릴게요.”

최자림은 바깥에 세워뒀던 거대한 디펜더 차량에 올라탔다.

승지가 조수석에 앉자 최자림은 직접 벨트까지 채워줬다.

“하핫, 안전운전!”

왜 이 인간은 잘해줄수록 불안하지?

바로 액셀을 밟으며 최자림이 설명을 시작했다.

“보통 사람들이 길드하면 청월량이나 어둑시니를 떠올리기 쉬운데 우리 미스핏 길드도 1차 각성 때부터 만들어진 역사 깊은 곳이거든요.”

“앞…!”

“각성자들에게 미션도 물론 중요하지만,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세계 복구잖아요? 곧 미션보다 던전이 더 중요해질 시기가 반드시 올 겁니다.”

“앞에 보세요!”

벨트를 움켜쥔 승지가 소리 질렀다.

최자림은 달리는 내내 고개를 조수석으로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유, 안 그렇게 생기셔서 겁이 많으시네?”

속도보다 최자림의 무신경함이 더 경악스러웠다.

스탯인지 스킬인지 최고 속도로 달리다가 확 꺾어버리거나 어디 들이박기 전에 급브레이크를 밟아대서 사고가 안 나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우와 신난다! 이거 재밌다, 승지야!]

뭣도 모르는 성좌가 펄펄 뛰는 동안 승지는 양팔로 차를 움켜쥐고 버텼다.

“미친, 속도 줄여!”

“아하하 길드까진 멀리 가야 해서요~.”

망할. 차라리 택시를 탈 걸.

“일부러 튼튼한 차로 샀으니까 걱정 마세요! 여기서 튕겨 나갈 만큼 강한 각성자는 보통 도로에 떨어져도 무사하더라고요~.”

“그걸 말이라고…!”

저 인간도 저주받은 게 틀림없다. 글라세로 말고, 폭주족의 원한 같은 거.

아무튼 등짝과 어깨를 멍이 들 때까지 차량에 부딪쳐간 뒤에야 겨우 차가 멈췄다.

[벌써 끝이야? 다음에 또 태워달라고 하자!]

또라이야. 너만 타냐.

승지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내렸다.

“자아, 여기가 바로 미스핏 길드랍니다!”

“…한옥이네?”

“뜻밖이죠? 몇 년 전에 사들였는데 의외로 써보면 넓고 좋아요. 들어오세요.”

대문 앞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그들을 보고 인사했다.

“교육 끝나셨습니까?”

“엉, 여기는 손님. 우리 길드 들어오실 분이야.”

“아직 들어간다고는 안했습니다.”

“보면 들어오시게 될 거예요.”

최자림이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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