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깨어난다 (2)
동물 머리를 쓴 괴물들이 자신을 납치하고는, 정신을 차려보니 암흑 속이었다.
바닥에 놓인 약간의 식량으로 버텨가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듣지 못했다.
이대로 죽는구나.
쓰러진 채로 정신을 놓으려던 그의 머리 위로 갑자기 어둠이 갈라지며 빛이 터져 나왔다.
“사람이 있어!”
“이봐, 정신 차려!”
우악스러운 손이 그를 잡아끌었다.
“……누구?”
“인사는 나중에 살아나면 해라!”
검은 액체를 뒤집어쓴 사람이 어깨에 그를 걸쳤다.
“몸이 많이 약해져 있어! 함부로 다루다간 죽을지도 몰라!”
“그럼 네가 맡아!”
승지는 바로 꾸물거리며 일어나는 다리를 망치로 찍어누르느라 바빴다.
쿵, 하고 어깨에 울리는 진동에 신음한 그는 곧 미끄러지듯이 암흑 속으로 빨려들었다.
다행히 지금의 어둠은 전과는 달리 여린 목소리가 계속 말을 걸어주었다.
“안심하세요! 여긴 저희가 맡은 곳이니까요! 바로 병원에 데려다 드릴게요!”
“고…고맙…….”
긴장이 풀린 그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그동안 손쉽게 적을 으깨버린 승지가 인벤토리가 터지며 나타난 다른 물건도 확인했다.
컨테이너를 정방형으로 자른 것처럼 생긴 검은 박스였다.
“저게 폭탄이란 말이지?”
“불길한 기운이 느껴져!”
“일단 네 인벤토리에 넣어둬. 당장 처리하긴 힘드니까. 그 안에선 터져도 문제없지?”
“으응, 맞아!”
곧 다른 각성자들도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을 구출했다는 소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승지가 올린 글에 진위를 따지기도 전에 다른 랭커들이 무조건 동의하는 답글을 달았던 것이다.
덕분에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빠르게 수습되었고, 해외로 보내졌던 인질들도 하나 둘 씩 세상으로 돌아왔다.
다만 승지와는 달리 인벤토리에서 나타난 폭탄을 처리하지 못해서 문제가 되었다.
애애애애앵!
사방에서 긴급 대피를 요청하는 사이렌이 터져 나왔다.
“젠장, 차라리 잘 됐어. 마왕들 뜨기 전에 미리 피하는 편이 나으니까.”
“다나우 말대로 범윤오보다 다른 마왕들이 먼저 나타날까?”
대답은 승지가 아니라 사람들의 제보로 나타났다.
띠링!
성좌가 급하게 게시판을 열었다. 그곳에는 마구 흔들리는 카메라에 찍힌 하늘이 보였다.
구름이 솜사탕처럼 엉기며 부풀었다. 마치 고치가 되듯.
놀란 촬영자가 영어로 마구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실처럼 엉긴 구름은 곧 거대한 고치의 형태로 바뀌더니, 안쪽에서 빛이 번쩍였다.
“뭐야 이건. 마왕이야?”
“맞아! 세상에! 저건 마왕 나르키스야!”
같은 마왕이 부르그골이 강림하는 방식과 비슷하게 그들은 하늘에서 왔다.
거기서 끊겼던 영상은 잠시 후 다른 사람이 다시 올라왔다.
고치에서 나방처럼 거대한 날개가 찢고 나오더니, 길쭉한 인간 같은 게 하늘을 보랏빛으로 바꿔놓았다.
승지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지만, 여기서는 외국의 하늘을 확인할 수 없었다.
광대도 벙 찐 채 영상물을 계속 열었다.
“인도에서도 지금 헬바티아 마왕이 강림했어. 맙소사…. 정말로 마왕이 이렇게 한꺼번에…!”
“클랩까지 왔잖아?”
헝가리에서 찍힌 영상이었다.
다른 마왕들처럼 거대하고 위엄찬 등장과는 달리, 자기 부하들 한 무리와 함께 포탈을 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쉭 소리를 내며 어딘가로 뛰어갔다.
“저 새끼들 다 어디로 가는 거야?”
“범윤오를 찾으러 가는 거야! 새로 나타난 마왕을 먹으려고!”
광대가 부르르 떨었다.
“부르그골이나 피우 마왕은 여기 강림하기 어렵겠지만, 다른 마왕들이 나타난 것도 이상해! 성좌신이 가만둘 리 없는데!”
“그딴 건 원흉한테 물어보자고.”
이 만악의 사태가 어디서 나타날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마왕들까지 고도로 관심을 기울이는 게 분명했다.
승지는 구출한 인간을 병원에다가 대충 넘기고 바로 수색에 들어갔다.
그가 높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지붕을 타고 오르는 동안.
광대는 끊임없이 성좌신과 접촉하려고 애썼다.
“왜, 왜 계속 응답이 없지? 우리가 뿜어내는 존재가 그토록 약할 리 없을 텐데!”
“제기랄, 뒤진 거 아냐?”
“아니야! 신이 죽었으면 우린 더 이상 성좌의 형태를 유지하지도 못 하는걸!”
끼릭.
승지가 매끄러운 유리로만 이루어진 벽면을 미끄러지듯이 올라갔다.
고층 빌딩에서 부는 바람이 위태롭게 승지의 몸을 떨어트릴 듯이 불었다.
어디냐, 범윤오!
지금까지 강림한 마왕들은 모두 하늘에서 왔다.
막연하고 또한 본능까지 더해져 승지는 계속해서 위로 향했다.
그런데 설마 이런 식으로 범윤오가 나타날 줄은 몰랐다.
삐비비빅!
갑자기 처음 들어보는 알림음이 도시를 가득 메웠다.
“뭐야?”
“뭐지?!”
원래 대피용으로 쓰는 경보를 누군가 해킹한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경고음 같기도 하고 축포 같기도 한.
그러나 명백한 불길함을 품은 소리가 온 사방에 진동했다.
당황한 승지가 경고음의 출처를 찾는 동안 무수히 많은 빌딩의 벽면으로 불빛이 쏘아져 나왔다.
ALERT! ALERT!ALERT!ALERT!ALERT!ALERT!ALERT!
똑같은 단어가 순식간에 건물을 뒤덮었다.
대피하던 사람들도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마치 경고의 파도가 해일로 변해 도시를 휩쓰는 것 같았다.
경계하라.
뒷덜미가 쭈뼛 섰다.
“저기다!”
“미쳤어, 설마!”
승지가 급하게 빌딩을 박찼다.
누가 보아도 범윤오 그 미친 관심 종자가 자신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불길한 색으로 번쩍이는 단어들은 마치 빨려 들어가듯이 한쪽으로 이동했다.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각성자가 아니면 절대 쫓아갈 수 없는 속도였다.
“지금 다른 곳에 나타난 마왕들이랑 싸우던 사람들이 제보를 올리고 있어! 갑자기 한 쪽으로 이동했다고!”
계속 상황을 확인하던 광대가 외쳤다.
“그들도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거야!”
“우리가 먼저 잡는다!”
승지가 이를 뿌득 갈았다.
범윤오가 마왕으로 강림할 장소를 본인이 뿌린 건 좋았지만, 다른 마왕들까지 함께 꼬이는 게 문제였다.
복잡한 싸움은 바라지 않는다!
범윤오 그 자식 명줄만 내가 끊게 내버려 두라고!
파앗!
그때 승지가 달리는 가로수 위로 익숙한 인영이 하나 치솟았다. 승지처럼 알러트, 경고를 따라 범윤오를 쫓아가는 각성자였다.
그런데 머리카락이 유독 길었다.
“유월?”
그를 알아본 승지의 눈이 조금 커졌다. 유월도 승지처럼 주변을 부숴가며 달려가고 있었다.
어디까지 전해 들었는지 몰라도 알러트라는 신호와, 쏟아지는 제보들 사이에서 필요한 정보는 다 습득한 모양이다.
같은 장소로 달려가는 동료를 발견하자 갑갑하던 숨이 갑자기 트였다.
그래, 이번 미션은 절대로 실패할 리가 없다.
범윤오 놈이 마왕이랍시고 나타나봤자 순식간에 이빨까지 죄다 털리게 만들어 주지!
승지와 유월이 나란히 달리며 도로를 뛰어넘었다.
빌딩을 가득 채웠던 글자들은 한 점으로 사라지더니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목표점을 지정하기엔 충분했다.
서울타임스퀘어였다.
미친놈!
나타나도 제일 혼잡한 곳을 고르겠다 이거냐!
저절로 혈압을 치솟게 만드는 행태에 승지는 무기부터 꺼내 들었다.
밤에 자다가 오줌 지릴 만큼 흉흉한 무기로 만들어 조져줄 생각이었다.
승지가 격투 게임에서 봤던 온갖 무기들의 형상을 다 마왕의 무기에다 적용해보고 있는데.
광대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어어앗?!”
“왜!”
“저기 백정민이 있어!”
승지의 고개가 홱 내려갔다.
돈에 따라 배신하는 졸렬한 악당인 백정민이 목표지에 도착하기 직전에 서 있는 걸 광대가 발견해낸 것이다.
또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었는지 텅 빈 도로 위에서 무언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저건 또 뭔 짓거리야?
“위험한 거 들었냐?”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사람도 아니야!”
“그럼 됐어! 상대할 시간 없으니까 제낀다!”
“알겠어!”
승지는 그를 무시하며 건너뛰었다.
그런데 백정민의 바로 옆을 지나가려고 하자 그도 승지를 알아보는지 갑자기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인사하듯이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뭐라고 지껄였다.
“뭐야? 저 또라이 자식이?”
“그쪽으론 안 가는 게 좋다는데?”
입 모양을 읽은 성좌가 통역했다.
“곧 마왕이 깨어날 거래.”
“저 똘빡. 그래서 가는 거거든?”
역시 박쥐 같은 자식이라 손해 볼 거 같으니 발 빼고 튀려는 모양이다.
승지는 대답을 큰소리로 전하는 대신 중지를 날렸다.
멀리서 대충 손가락 욕을 알아본 백정민이 인사하던 손을 내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나름대로 열심히 가던 피난을 계속했다.
잠깐 그에게 정신이 팔리느라 승지는 함께 달려오던 유월보다 약간 늦게 도착했다.
유월은 알러트라는 문구가 사라진 지점에 서서 위를 목이 꺾이도록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승지가 도착하기 직전에 갑자기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무슨…!”
승지가 급하게 발을 멈췄다. 더덕더덕 온갖 무기의 형태가 붙은 마왕의 무기도 괴상한 소리를 내며 멈췄다.
“어디로 간 거야? 왜 갑자기 사라진 거냐고!”
승지가 마구잡이로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하지만 폭탄과 갇힌 사람을 구출할 때는 훌륭하게 인벤토리를 박살냈던 무기는 계속 허공만을 갈랐다.
“무슨 스킬을 쓴 거야? 유월한테 투명화 스킬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고!”
“스킬이… 아니야!”
광대의 목소리가 급하게 치솟았다.
“승지야! 우리도 많이 써봤잖아!”
“인벤토리?”
의구심 섞인 승지를 광대가 급히 인벤토리로 삼켰다.
승지는 인벤토리로 들어왔다는 감각이 들자마자 바로 다시 주변을 확인했다.
“그래도 안 보이는데? 뭐야!”
“……설마!”
인벤토리 속에 나타난 광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완전한 이공간으로 가버린 거야!”
“알아듣게 설명해!”
“승지가 사는 세계에서 가져온 물건을 보관하고 있는데도 인벤토리가 왜 다른 사람한테 부딪치지 않겠어? 같은 공간이면서도 다른 차원이니까!!”
광대의 입에서 다급하게 단어가 붙어 나왔다.
“성좌나 마왕만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성좌신의 차원이야!”
승지는 설명을 다 끊어버렸다. 그가 사납게 고개를 저었다.
“됐고, 어딘지 알면 나도 데려가!”
“거긴 관념적인 공간이야! 살아있는 사람이 갔다간…!”
“다른 놈들은 갔다며!”
그럼 나도 못 갈 이유가 없다!
입을 딱 벌린 광대가 기겁을 하고 말렸다.
“이건 승지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짓이야! 가자마자 승지라는 존재가 사라질지도 모르는걸!”
“유월도 벌써 사라졌어. 스스로 간 거면 좋겠지만 아무리 봐도 너 같은 성좌가 없으니 납치 쪽으로 대가리가 기울거든? 그러니까 빨리 해!”
광대가 울컥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빛에 슬픔이 깃들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할 수밖에 없잖아. 하지만 절대, 절대로 인벤토리 밖으로 나와선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았.”
승지가 말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세계가 뒤흔들렸다.
온몸이 납작하게 짓눌리는 느낌과 함께 그는 난생처음 보는 괴상한 생명체를 목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의심했다.
……내가 지옥에 떨어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