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글라세로의 저주 (1)
최자림은 열쇠를 문지기에게 넘기며 물었다.
“길드장님은?”
“아직 회의 중이십니다.”
“그럼 나도 들어가야겠네! 일찍 왔다고 하면 좋아하실 거야.”
“혈압 약 챙겨놓겠습니다.”
금세 쏠랑 사라지려는 최자림을 본 문지기가 말렸다.
“이 분은 그냥 두십니까?”
“아, 맞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제대로 안내해드려야지. 명구한테 얘기해 둬라. 특! 별! 손님이라고. 꼭 강조하고.”
“특별 손님이요?”
문지기가 갸우뚱하고 승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헐렁한 점퍼 하나에 껄렁한 자세로 서 있는 그가 영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참. 그러고 보니 아직 각성자님 이름도 모르네요!”
간신히 한숨을 삼킨 승지가 대꾸했다.
“채승지입니다.”
“좋아요, 승지 씨! 이따 꼭 봐요!”
열렬히 작별인사를 해댄 최자림이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어색하게 서 있던 문지기가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에 들어가서 안내하실 분을 데려오겠습니다.”
“그러세요.”
사람이 사라지자 성좌가 더는 참지 못하고 상태창을 와다다 쏟아냈다.
[여기 너무너무 근사하다! 이런 곳은 처음 봐! 어떻게 지붕이 이렇게 생겼어?]
“시끄럽고, 아까 미션 깬 거 보상이나 내놔.”
[헤헤, 안 잊어버렸네?]
띠링!
[ 서브 미션 완료! ]
[ 서브 미션 보상 : 스탯 분배치 5, 성좌의 칭찬. ]
미션 보상으로 별로 필요 없는 것까지 알차게 따라와 있었다.
[자, 승지야! 그럼 나의 칭찬을 마구마구…!]
“체력이랑 민첩에 스탯 반씩 투자해. 남은 하나는 행운 좀 찍자.”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시작도 하지 마.”
승지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시무룩해진 성좌가 바뀐 상태창을 띄웠다.
[ 인간 : 채승지
계약자 : 웃고 있는 광대 1.
메인 미션 : 비어있음
서브 미션 : 비어있음
성좌 연결도 : 15 %
스킬 : 완벽한 콤보, 광대의 균형, 상단! 중단! 하단!, 광대의 축복, 프레임 컨트롤 … ???, ???
스탯 :
힘 7
민첩 14
지능 10
체력 13
행운 1(+1~99)
상태 이상 : 글라세로의 저주 (1/100) ]
[승지 넌 나한테 원하는 게 이거밖에 없지! 이제 만족해?]
“아직 멀었지.”
승지가 아직도 평균을 살짝 벗어난 수준의 상태창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았다.
행운을 찍지 말걸 그랬나.
아니지, 행운이 바닥이어서 지금 딱 한 번 던전 돌았는데 마왕의 저주까지 걸렸잖아?
그대로 미션을 진행했다간 무슨 흉한 일을 겪을지 모른다.
최악만 아니면 돼, 최악만.
스탯을 찍은 승지가 신중하게 다음 스탯을 고민하는 동안 삐걱거리며 다시 대문이 열렸다.
“채승지 씨?”
“예.”
“안녕하세요. 서명구라고 합니다.”
순박하게 생긴 청년 하나가 책 한 권을 꼭 껴안은 채 다가왔다.
“최자림 각성자님이 안내 부탁드렸다고요.”
“네.”
“이쪽으로 오세요.”
쭈뼛거리며 말을 건 명구가 손짓했다.
넓게 트인 안쪽으로 겹겹이 만들어진 건물이 보였다.
“저기 보이시는 푸른 기와가 길드 본부구요, 연못을 중심으로 식당, 숙소, 대련실, 연구실입니다.”
“그럼 본부가 청와….”
“뒤는 달라요!”
명구가 급하게 소리쳤다.
“일부러 청와각이라고 부르는데 꼭 최자림 각성자님은 대라고 불러서 가끔 간 떨어지게 한다니까요.”
하긴 그러고도 남을 성격이지.
명구가 소심하게 부르르 떨었다.
“저기 모인 사람들은 뭐죠? 미스핏 길드원은 아닌 것 같은데.”
“아, 저 사람들은 외부 투숙객이세요.”
명구는 연못 옆을 심각한 표정으로 지나는 사람들을 보고 아는 체를 했다.
“저희 길드에서 연구하는 게 워낙 다양하다 보니 도움을 구하러 오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승지야! 저 사람들 팔에도 너랑 똑같은 문양이 있어!]
뭐라고?
“너 저게 보여?”
“예? 제가 시력이 조금 안 좋긴 한데 저 정도는….”
착각해서 중얼거리는 명구 옆에서 성좌가 상태창을 크게 띄웠다.
[위치는 다르지만, 분명히 글라세로의 문양이야! 확실해!]
안 그래도 글라세로의 저주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승지가 바로 직구를 던졌다.
“혹시 여기서 저주 치료 같은 것도 합니까?”
“네, 가끔 일반적인 스킬로 안 되면….”
영문을 몰라하던 명구가 뒤늦게 박 터지는 소리를 냈다.
“아아, 참. 채승지 씨는 오늘 관리소 교육에서 데려온 분이셨죠? 그럼 글라세로의 던전을 하셨겠네요.”
“예, 그거. 어떻게 풀어요?”
“오늘 던전 공략하지 않았나요? 최자림 각성자님이 이번엔 저주 없이 끝내려고 준비 하셨던데요.”
거기서 사고가 좀 있어서 말입니다.
차마 혼자 동 떨어져 알을 박살 내고 다녔다는 얘기를 할 수가 없었던 승지가 둘러댔다.
“그냥 오늘 보고 궁금해져서요. 저주에 걸린 사람들도 있다니까…”
“음 그렇군요. 아직까지 글라세로의 저주를 푸는 법은 찾아내지 못했어요.”
“못 푼다고요?”
“네. 저주의 결과를 조금 늦출 순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해제할 순 없었어요.”
기대감이 와장창 박살났다.
[허엉, 어떡해…!]
바로 울먹거리기 시작하는 상태창을 치운 승지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 늦추는 방법은 뭡니까?”
“던전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글라세로의 눈은 자신의 권역이 아닌 던전은 볼 수 없으니까요.”
젠장. 젠장.
“그럼 계속 던전에서 살면 되는 겁니까?”
“에? 어떻게 그래요? 던전은 사람이 오래 있을수록 위험해져서 절대 그렇겐 못 해요!”
“그렇다고 바깥에 냅두면 마왕이 소환되잖아요?”
“네, 네? 마…왕이요?”
명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 가, 갑자기 마왕이라니. 마왕이 소환될 수도 있는 거였어요?”
“여기서 저주 연구한다면서요?”
그것도 몰라?
어이가 없어진 승지가 노려보자 명구가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글라세로의 저주는 피부병에 걸리는 건데요….”
[오잉?]
“…피부병?”
갑자기 머리가 딩해진 승지가 되물었다.
“저주의 결과가 고작 피부병이라고요?”
“고작이라뇨! 그 피부병이 얼마나 심각한데요? 저주에 걸린 다른 길드원은 지금 햇볕에 제대로 닿지도 못할 정도예요…!”
“됐고, 처음부터 좀 똑바로 설명해 봐요!”
승지가 윽박질렀다.
험악한 기세에 완전히 기가 눌린 명구가 설명했다.
글라세로의 저주는 던전에 있는 알을 깬 사람에게 모두 부여되는 저주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 발진이 생기고 물집이 부풀어 올라 살이 떨어져 나가는 저주였는데, 어떤 약이나 포션, 스킬로도 소용이 없었다.
유일하게 증상을 늦추는 방법은 던전에 들어가는 방법뿐이었다.
던전에 들어가면 저주에 소모되는 시간이 멈추기 때문이다.
“시간이 멈춘다고?”
“던전은 현실과 다른 세계… 니까요.”
명구가 데구르르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같은 글라세로의 던전이면 소용이 없어요. 그냥 저주의 시간이 계속 흘러가기 때문에 결국 버티기도 어려워진 길드에선 알이 있던 던전을 완전 공략하기로 했죠.”
저주에 걸린 환자들의 고통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증상을 늦추기 위해 던전을 소유한 다른 길드에게 매번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보다시피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네요. 던전은 끝났는데 환자들은 아직이니….”
명구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미스핏 길드가 소유하고 있던 던전이 사라져도 글라세로의 저주는 사라지지 않았다.
낭패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보아하니 마왕 글라세로를 소환하는 저주에 걸린 건 자신뿐인 모양이었다.
[뭐지? 뭘까? 혹시 승지 네가 혼자서 알을 다 박살내서 그런 게 아닐까? 그거 말곤 말이 안 되잖아!]
요컨대 마왕의 분노를 샀기 때문에 특급 저주를 먹여줬다는 소리다.
빌어먹을.
이쯤 되니 미스핏 길드가 진짜 미친놈들 소굴로 보였다.
“…초보자 교육에 그딴 던전을 가져오다니 제정신이야? 돌았어?”
“하, 하지만 정말 위험할 일은 없었는걸요! 글라세로의 저주는 알의 눈으로 본 사람만 걸리기 때문에 미리 그 위에 덮을 그물도 다 챙겼단 말입니다!”
“그 전에 알이 눈을 뜨면 무슨 소용인데!”
“아, 아니 그건 주문을 외우기 전까진 절대 눈 안 떠요! 혹시 알을 깼다면 모를까…!”
“뭔 소리야! 혼자서 거기 들어간 인간이 실수로 알을 깨트리면 어쩌려고?”
“예? 아무리 운이 안 좋아도 그 알이 있는 장소로 떨어진 사람은 없었는걸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네!! 박쥐 잡고 던전의 길이 바뀔 때마다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곧장 그 장소로 떨어진 사람은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잔뜩 겁에 질린 명구가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
그럼 순전히 내 운이 더럽게 안 좋은 거라고? 행운 스탯 0의 파워라고?
“잠깐, 잠깐만….”
승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히 주문을 외우기 전까진 알이 눈을 안 뜬다고 했지?”
“네!”
근데 난 주문도 안 외우고 알도 안 깼는데?
[……헉.]
승지의 핏발 선 눈이 상태창으로 돌아갔다.
성좌와 승지가 동시에 깨달은 것이다.
[여긴 지하왕 글라세로의 무덤이다. 잠든 자는 깨어나리니. 나의 권속들에겐 눈이 있다.]
멍하니 그 때 벽에서 읽어낸 말을 되풀이한 성좌의 상태창이 쪼그라들었다.
“그게 주문이었어?”
[내가 읽어도 되는 거였어?]
승지와 성좌가 동시에 충격에 빠졌다.
그 틈을 타 명구가 후다닥 그에게서 떨어졌다.
“아, 아무튼 따지시려면 길드 쪽에 정식으로 해주세요! 전 잘못 없어요!”
“야! 잠깐만!”
명구가 꽁지 빠져라 도망갔다.
승지는 황당해하느라 미처 프레임 컨트롤을 쓸 틈도 없었다.
“이런 미친…….”
머리를 부여잡은 승지가 쪼그려 앉았다.
결국 안 걸려도 되는 저주를 사서 걸린 셈이다.
[저기…… 승지야…….]
그것도 모르고 잔뜩 원망하는 말을 쏟아냈던 성좌가 어색하게 상태창을 띄웠다.
[그, 그게… 나도 이렇게 될 줄은…]
“……선택해.”
승지가 음산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어? 선택?]
“마왕 손에 죽을래, 내 손에 죽을래?”
승지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당황한 상태창이 애교를 부려보았다.
[두… 둘 다 싫어잉….]
“…이런 네가 있는 세계라면 망해도 될 거 같아!”
[으악, 승지야!]
“으아아아!”
승지가 상태창을 향해 분노의 주먹질을 쏟아냈다.
“죽어! 죽어! 인간아, 왜 사냐!”
[나, 난 인간 아니야!]
“언젠 또 인간이라며 망할 성좌새끼야!!!”
승지는 데미지가 들어갔으면 훌륭하게 콤보가 되었을 공격을 남발했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엔 지랄 발광이었다.
그것도 허공에다 주먹질하고 춤추는 개지랄발광.
“……승지 씨?”
망할.
웃음이 터지기 직전의 목소리로 최자림이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여기서 뭐흐큽, 하고 계세요?”
망할. 망할. 망할.
지옥 같은 분노 대신에 지옥 같은 수치심이 차올랐다.
아무래도 내 인생에 진짜 저주는 글라세로 따위가 아니라 이 빌어먹을 성좌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