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넘버원 훈련 (2)
두 번째로 바뀐 헬바티아의 던전은 게릴라전 형태의 무대였다. 수풀과 나무를 가장한 형체 뒤에서 인형이 돌발적으로 습격했다.
아까보다 싸워야 할 적은 강해졌지만 번태에게 스킬을 받은 승지에겐 쉽게 느껴져야만 했다.
…원래라면 그래야 했다는 뜻이다.
[ 기 모으기 : 파이팅 포즈로 기합을 외치면 에너지를 충전한다. 1회 발동 당 5초 지속. 20%의 추가데미지. ]
번태의 보상상자에서 나온 첫 번째 스킬이었다.
기 모으기를 사용하면 퍼엉 터지는 듯한 이펙트와 함께 전신에 힘이 흘렀다.
하지만.
“카가각!”
두 번째 스테이지로 넘어가자 인형들도 회색빛으로 강화되었다.
지금 승지의 스탯으로는 한 방에 때려죽이지 못할 만큼 단단해진 것이다. 그럼 당연히 기 모으기를 써야 하는데.
"…으, 아아아!“
양손을 불끈 쥐고 팔꿈치를 당겨 열혈만화 주인공처럼 자세를 취한 승지가 마지못해 소리를 질렀다.
"크흡."
"푸핫!"
"승지 씨. 저는 절대 웃지 않았습니다."
닥쳐!
승지가 홧홧 달아오르는 얼굴로 화풀이를 하듯 연달아 후려쳐 인형을 박살냈다.
빠각!
처음엔 승지가 뭘 하는지 몰라 놀란 각성자들이 그게 스킬의 조건이라는 걸 깨닫고는 기합을 내지를 때마다 싸우던 것까지 멈추고 구경했다. 유월 쪽은 차마 돌아볼 수 없을 만큼 쪽팔렸다.
이게 무슨 망신이야! 왜 자꾸 날 컨셉질로 몰아가는 거야!
그렇다고 안 쓰기엔 또 성능이 너무 좋았다.
[승지야. 부끄러워하면 지는 거야!]
"할 수록 점점 더 잘하는군! 더 소리를 크게 지르게! 정말 스킬 효과가 더 좋아질 거라니까!"
"제발 그 입 좀…! 입! 아가리!“
잔뜩 열 받은 승지가 새빨개진 얼굴로 앞서나가 인형을 다 때려부쉈다.
[ 28콤보! ]
기 모으기 효과에 더해 콤보까지 쌓이지 손쉽게 주변이 정리가 됐다. 인형이 박살나며 양쪽 눈을 반대 방향으로 튕겨 보냈다.
타격감은 좋은데…….
승지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인형의 눈알을 다시 발로 으깨버렸다. 죽은 다음에도 쳐다보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던 것이다.
승지가 잘근잘근 밟으며 찝찝함을 털어냈다.
“근데 진짜로 여기가 제일 좋아하는 던전입니까? 아까부터 나오는 몬스터 상태가 영….”
“헬바티아는 유일하게 각성자의 수준에 맞춰서 던전을 만들어주는 마왕이거든.”
마왕이 굳이 그런 친절을?
승지의 의문은 성좌의 설명으로 바로 풀렸다.
[헬바티아는 사람을 고문하는 걸 좋아해! 무작정 강한 몬스터를 보내면 괴로워할 틈도 없이 죽으니까 그게 싫어서 수준을 조절하는 거야.]
크엑, 마왕이란 새끼들은 다 왜 이러냐?
물론 헬바티아의 던전이 각성자들의 성장을 도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왕이 기대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면 계속 고문 받다 죽는다는 뜻이니.
정말 싫군. 이 마왕도 가능한 마주치고 싶지 않다. 아니, 이왕이면 모든 마왕이랑은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빌어먹을.
던전은 아랑곳않고 진행되었다. 갑자기 바닥이 꺼지며 창을 들고 있는 인형들이 함정처럼 솟아올랐다.
파직!
번태와 나란히 달리던 승지가 동시에 그 자리를 뛰어넘었다. 번태가 가볍게 검지를 튕겼다. 그러자 번개로 만든 공이 핀볼처럼 튀어 나가며 인형들의 머리를 꿰뚫었다.
핑핑피핑!
순식간에 인형의 머리에서 연기가 피오르며 쓰러졌다.
번태가 승지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자 조금만 더 힘을 내야지! 다음 보상까지 얼마 안 남았어!”
“…보통 얼마 안 남았다고 할 때부터가 진짜 시작이던데.”
“하하하! 예리하군!”
번태를 웃기는 바람에 등짝에 몇 대를 더 맞았다. 이보쇼, 본인이 랭킹 1위이라는 걸 좀 자각하시지. 승지가 얼얼한 등짝을 문질렀다.
“아아아아악!”
그 때 던전의 벽이 울리며 낯선 비명을 전달했다.
“누구지?”
“다른 일행입니다!”
류의건이 놀라 소리쳤다. 마음이 급해졌는지 그의 무릎이 먼저 앞으로 튀어나왔다.
“이상하군. 다른 길에선 먼저 위험에 빠질 일은 없을 텐데? 예정보다 빠르지만 구하러 가도록 하지!”
다른 각성자들이 바로 움직였다. 따라 이동하려던 승지는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누군가 옷깃을 잡아당겼던 것이다.
“아, 씨. 인형.”
“찾았다.”
즉각 인형을 부수려던 승지의 눈이 커졌다.
[마, 말했어!?]
갑자기 저게 왜 말을 하냐?
놀란 시선 속에서 인형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리를 따각따각 돌렸다.
“수~울~래. 찾았다.”
턱을 따닥이며 말하던 인형의 입꼬리가 쭉 찢어졌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화다닥! 갑자기 거미처럼 승지의 팔을 기어오른 인형이 소매를 물어뜯었다.
“미친!”
모기보다 빠르게 인형을 쳐낸 승지가 철퇴를 휘둘렀다. 뻑! 하고 맞아 떨어진 인형이 얌전히 떨어졌다.
이건 또 뭔 지랄이야?
인형이 물어뜯은 자리를 만져보던 승지의 표정이 싸해졌다. 인형이 물어뜯은 자리가 바로 글라세로의 문양이 있는 바로 윗부분이었던 것이다.
설마, 아니겠지.
승지는 애써 현실부정하며 인형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가 발바닥을 바닥에서 떼기 무섭게 누군가 작게 속삭였다.
“벌써 다 말했지롱.”
승지가 고개를 확 돌렸다. 그러나 여전히 인형은 박살난 채였다.
…이런 씨발. 역시 내 운수에 설마하고 그냥 넘어갈 리가 없나!
승지가 성큼성큼 앞으로 뛰어나갔다.
“어둑시니 길드장! 지금 당장 던전에서 나가야겠는데!”
“쉿.”
먼저 번태를 따라갔던 유월이 손가락을 입술 위에 올렸다.
“지금 승지 씨가 데려온 일행이 사냥중이에요.”
“뭐?”
코스모스 센터가?
왜 당장 안 구하러 가는 건지 의아해하던 승지가 바닥에 난 구멍으로 시선을 돌렸다.
억지로 뚫어버린 건지 요철이 심한 구멍 안으로 코스모스 센터원들이 고스란히 보였다.
“1조 앞으로! 침착하게!”
쿵쿵쿵. 발맞춘 소리와 함께 여섯 명이 앞으로 나섰다. 센터 각성자 5명에 센터 선생이 한 명씩 붙어 한 조를 이룬 형태였다.
오조희는 지휘관처럼 그들의 좌표를 지정해주고 공격을 선언했다.
알러트 납치 때처럼 한꺼번에 폭발시키는 화력은 아니었지만, 적절한 세기로 인형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공격을 방해하지 않도록 각성자 개개인의 특성을 고려해 조를 확실하게 짠 것도 인상적이었다.
[우와! 납치 사건 이후로 오조희가 지휘 스킬을 얻었나봐! 조 이동이 아주 매끄러운걸!]
진짜 제법이잖아? 확실히 힘을 빌려주겠다고 할 자신감이 있었구만.
오조희가 한 차례 몬스터를 밀어낸 걸 확인한 승지가 그를 불렀다.
“오조희!”
“승지 씨? 거기서 뭐하세요?”
“혹시 다친 사람 있냐?”
오조희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뇨? 다친 사람은 없는 걸요?”
“그럼 아까 비명은 누가 지른 거지?”
“명구야!”
열심히 구경하던 최자림이 갑자기 소리쳤다.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른 최자림이 바로 서명구를 찾으러 사라졌다.
“안 따라가 봐도….”
“됩니다.”
세상에 할 걱정이 없어서 최자림 걱정을.
승지가 안절부절 주저하는 류의건을 다시 끌어다 앉혔다. 오조희가 밑에서 소리쳤다.
“어떻게 된 거죠? 저흰 클리어했다는 말을 듣고 이동했는데요.”
“첫 번째 스테이지만 클리어된 거라네! 자네들이 방금 두 번째 스테이지까지 클리어한 것 같으니 곧 보스가 나올 걸세!”
“아, 잠깐. 더 진행하기 전에 방금 던전에 있던 인형이 내 글라세로의 문양을 알아봤어.”
“조금 늦게 얘기하셨군요.”
유월이 담담하게 지적했다.
이미 던전 벽이 덜덜 떨리고 있었던 것이다. 익숙하게 겪어본 변화의 전조였다.
쿠와아앙!
화산이 폭발하듯 바닥이 불룩해지며 새까만 인형들이 다닥다닥 기어올랐다.
“꺄아아악!”
“피하세요!”
“거기 가만히 있게!”
상반된 말을 외친 류의건과 번태가 동시에 구멍 아래로 뛰어내렸다.
검은 인형들은 마치 고치에서 막 깨어난 거미들 같았다. 작고 빠른 움직임이 파도처럼 뭉쳐 일렁였다.
사사사삭. 움직이는 중심에서 희고 둥근 인형이 천천히 등을 폈다.
다른 인형과 달리 정말 사람만한 크기의 인형이 마네킹처럼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저게 이 던전의 보스야?!]
랭킹 1, 2위가 모두 코스모스 센터에게 달려갈 때 승지는 보스를 노려보았다.
순백색이 음험하게 보이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지.
지나치게 매끄러운 흰 빛이 인형의 비현실적인 면모를 강조했다.
조지고, 나가자.
긴저의 메이스를 꺼낸 승지가 한 손으로 붕붕 돌렸다. 마침 쫄병들이 많은 보스니 콤보 쌓기엔 완벽했다.
“같이 싸우죠.”
제비처럼 날렵하게 위에서 뛰어내린 유월이 옆에 착지했다. 쿵. 그를 따라 떨어진 무기에서 묵직한 소리가 났다.
유월의 무기는 류의건의 검에 비견될 만큼 큰 대도였다. 그런데 날 부분이 두껍고 뭉툭해 실제로 뭘 베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게다가 손질도 제대로 하지 않는지 여기저기 말라붙은 핏자국과 녹까지 보였다.
순전히 힘으로만 휘두르는 건가.
유월이 무기를 강조하듯 슬쩍 밀어 올렸다.
“다른 사람들은 바빠 보이니까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승지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승지야 예쁜 말! 잘 보이고 싶은 사람한테는 일단 곱게 말하는 거잖아!]
뭔, 씨. 갑자기 그러면 이상하다고.
승지가 머리를 헤집더니 어렵게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어차피 글라세로 전에선 싫어도 같이 싸울 거 아닙니까. 그 때 협력하도록 아껴두죠.”
“아낀다고요?”
"큰 거 하나 보여주죠.”
유월의 미간이 의아하게 살짝 펴졌다.
승지가 공격에 나섰다.
쿵! 까각!
인형이 아니라 철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보스 스테이지에 접어들자 새까만 인형들은 이제 철퇴 한 방에 금이 가지도 않았다.
어차피 난 데미지가 아니라 타격 횟수가 중요하거든?
[ 14콤보! ]
[ 15콤보! ]
승지는 인형을 없애는 게 아니라 보스까지 가는 길을 트는 방식으로 목표를 정했다.
딸각거리며 그를 포위한 인형들을 부술 순 없더라도 최대한 멀리까지 날려버릴 순 있었으니까.
빠악!
[ 18콤보! ]
혹시 강하게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놈이 있으면 철퇴의 갈고리를 당겨 인형 뽑기처럼 머리부터 뽑아버렸다.
차칵. 차칵.
긴저의 메이스로 한 번씩 갈고리를 당겼다가 풀 때마다 점점 돌아오는 속도가 느려졌다. 제대로 징이 꽂히지도 않는 억센 것을 계속 옥죄었더니 헐거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몇 번 손잡이를 쥐어보던 승지가 그냥 야구 배트처럼 상무식하게 휘둘렀다. 인형이 공처럼 포물선을 그렸다.
멀리 멀리 날아가라. 뒈지면 더 좋고.
콤보를 쌓으면서도 승지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는 보스 인형에 집중했다.
흰 인형의 변화가 너무도 기이했기 때문이다.
따가닥!
분명 아무것도 없던 인형의 표면에서 털이 자라나고 옷이 튀어나왔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무대에서 옷을 갈아입듯이.
[맙소사…!]
마침내 완전한 형태를 갖춘 그것이 똑바로 일어섰다.
[저건, 저건 승지잖아!]
성좌가 섬뜩함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과거의 모습을 고스란히 닮은 새빨간 머리칼의 승지였다. 승지로 변하고도 인형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대신 진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젠장… 나도 아직 못 돌려놓은 머리를 먼저…!”
[지금 그게 문제야?!]
펄펄 뛰는 성좌와 달리 승지는 별다른 동요 없이 콤보의 나머지를 채웠다.
“모습만 훔쳐간 놈을 무서워하기엔 다른 인형들 생긴 게 더 끔찍하거든?”
게다가 곧 콤보도 완성되니 막타나 먹여주면 그만이다!
승지가 전진했다. 콤보도 착실히 올라갔다.
그 때 처음 던전에서 들었던 비명이 희미하게 다시 들렸다.
“아아악!”
서명구의 목소리였다. 최자림이 명구를 데리고 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보스가 나타나고 덩달아 매서워진 인형들의 공격에 이쪽으로 접근하질 못하고 있었다.
다른 놈들은 뭘하고 있는 거야?
뜻밖에도 상황은 심각했다. 자기들끼리 잘 싸우고 있었던 코스모스 센터원들은 오히려 번태와 류의건의 등장으로 결속이 깨져버리고 말았다.
센터의 각성자들을 잘 몰랐던 번태와 류의건이 상대적으로 약해보이는 센터 선생들을 따로 보호한 게 문제였다.
익숙한 센터의 선생님들과 갈라지고 적이 공격하자 센터원들이 패닉에 빠져버린 것이다. 몬스터를 사냥한는 것보다도 다치지 않고 그들을 수습하는 게 더 어려워져버렸다.
“여러분! 제 말을 들으세요!”
오조희가 황급히 지휘 스킬을 썼지만 인형을 견제하는 번태의 번개가 계속 우르릉거리며 시끄러운데다 거리도 멀어 제대로 발동되질 않았다.
덕분에 번태와 류의건도 당장 몸을 빼낼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또한 지금 제대로 싸울 수 없는 건 유청도 마찬가지라 유월은 어느 새 그를 지키느라 거칠게 대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인형들은 유월이 감당 못할 상대인 걸 알았는지 대도에 매달려 무게로 방해하고 있었다.
이 지경을 보고 났는데도 무슨 상황인지 깨닫지 못하면 천하의 얼간이였다.
왜 인형들이 나는 공격안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