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선전포고 (2)
“지금은 믿어달라는 말밖에 할 수 없겠군. 자네가 지금까지 봐온 모습으로는 안 되겠나?”
“뭘 믿어. 평생 알던 놈도 배신하는 게 현실인데.”
툭 내뱉으면서도 승지의 눈빛은 그리 사납지 않았다.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었지만 솔직히 번태가 대단한 배신자일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도 싸울 생각은 없어. 그냥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다 까서 해결하자는 소리지.”
“미안하지만 그건 반대할 수밖에 없군. 공개 되서는 안 될 비밀이야.”
적당히 답을 듣고 넘어가려던 승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어차피 댁이 말 안 해도 범윤오가 까발릴 텐데?”
“그래도 안 되네.”
번태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쪽도 생각이 있다면 밝히지 않을 걸세. 손해를 볼 테니까.”
“그 자식이 그렇게 생각 있는 놈이었으면 이 지경까지 안 왔지! 대체 그 비밀이 뭐길래 그래?”
번태가 고개를 젓더니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듯 입 앞에서 손가락으로 엑스 자를 만들었다.
“말 못 하네!”
“심각한 상황에서 그런 포즈는 좀.”
“지금 중요한 건 우리의 결백 아닌가.”
번태가 확 손을 내렸다.
“승지 군의 요청은… 해볼 수 있는 데까지는 에둘러보겠네. 일단 우리도 알러트 소탕 파티에 참석해야하네!”
“그거 이미 조졌잖아.”
알러트 보스가 멀쩡하게 활개치고 다니는데다가 진범은 상위 랭커라고 통수까지 친 마당에 무슨 파티?
“가지 않으면 더 수상하게 보일 뿐이니까요.”
유월도 새하얀 이마를 손끝으로 꾹 눌렀다.
“부정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더라도 지금은 모여서 같은 입장을 발표하는 수밖에요.”
“…이미 파티 장소에 도착한 사람이 많다고 하니 그냥 흐지부지 되진 않을 겁니다.”
“맞아. 최대한 멀끔하게, 당당하게 참석해야만 하네. 자네들의 외모를 활용하면 더 좋고!”
“라고 수염 난 산적 분이 말씀하십니다.”
승지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차피 얼굴 팔아서 민심 잡는 거야 다른 인간들 몫이니 깔끔하게만 가면 되겠지.
딱히 외모에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승지도 얼굴 잘난 놈들의 위력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승지도 정장 입으면 사람들이 모두 설득 될 거…!]
“일단 류의건 뺨부터 때리자. 저렇게 희멀건한 얼굴로는 진짜 죄인 같아 보여.”
내내 넋이 나가있던 류의건이 급하게 핏기를 소생시키려고 뺨으로 손을 올렸다.
쿠웅!
“엇?!”
“건물이?!”
랭킹 2위는 뺨도 독하게 때리나 싶었는데 착각이었다.
[ 메인 미션 발생! ]
건물 밖에서 무언가 기어 다니는 소리가 났다.
“아 거 범윤오 자식. 대책 짤 시간을 안주는구만.”
랭커들이 동시에 무기를 빼들었다. 승지도 마찬가지였다.
[ 메인 미션 : 드래곤 둥지 파괴하기
둥지 째로 옮겨온 드래곤의 알은 부화 직전이다. 튕겨나간 알에서 드래곤이 깨어나기 전에 모두 파괴하고 함께 이동한 본체를 토벌하라.
부화까지 남은 시간 : 30:00분
보상 : 기여도에 따른 스탯 분배치, 성좌 연결도, 페널티 삭제, 스킬 등 ]
“이번엔 용이냐!”
“범윤오 군이 제대로 작정했나보군.”
번태가 쿠르르릉 지팡이 주위로 번개를 감으며 벽을 부쉈다.
솜씨 좋게 천장만 뚫은 곳으로 모두 뛰어올랐다.
드래곤이라길래 파충류 비슷한 모습을 상상했건만.
지네처럼 생긴 드래곤이 무수한 다리로 건물을 휘감고 있었다. 몸에는 석청 같은 벌집이 박혀있어 한층 더 괴상하게 보였다.
지붕에 안착한 랭커들에게 바람이 불어오자 은은한 꿀 향기까지 올라왔다.
“엄청난 녀석이 왔구만!”
“알은 어디 있죠?”
“크기 봐라.”
저마다 하고 싶은 말만 내뱉은 랭커들이 각자 목표를 향해 뛰어내렸다.
계속 정신이 나가보이던 류의건도 일단 적이 눈앞에 나타나니 곧 정신을 다잡았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아닐세! 가장 큰 놈은 내 몫이지!”
류의건과 번태의 외침을 들으며 내려온 유월은 유유하게 벽면을 따라 내려가며 감겨있던 용의 허리를 갈랐다.
끄드드득!
“티이이이!”
드래곤의 다리가 곤두서며 두 쪽으로 꿈틀거렸다. 분노한 드래곤의 몸 속에서 피인지 불분명한 노란 액체가 튀었다.
“유월 자네!”
“본체는 사이좋게 나눠드시던가 하세요. 전 둥지로 갑니다.”
유월이 내려앉는 자세를 따라 유청도 급박하게 뛰어갔다.
“나도 가겠어!”
“넌 저것부터야.”
유월이 칼끝으로 뒤를 가리켰다.
드래곤의 몸에서 나온 액체가 꿈틀거리며 뭉쳐지더니 슬라임이 되었던 것이다.
어쩐지 너무 순순히 갈린다 싶더라니. 자르는 걸로는 안 죽는 놈인가.
유월은 뭉글뭉글하게 생겨나는 슬라임 떼를 보더니 빌딩 한 쪽에 처박힌 둥지 쪽으로 달려갔다.
보통 새가 사는 둥지를 100배로 확대해놓은 듯한 크기의 둥지에서는 지금도 흰 나뭇가지가 굴러 나와 시가지를 덮치고 있었다.
거기서 쏟아진 듯한 금빛 알이 자동차 사이로 굴러다녔다.
콰르릉, 번쩍!
곧 위에서 번태와 류의건이 싸우는 통에 하늘이 무수한 빛으로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럼 각자 처리하고 파티장에서 보세! 아까 했던 말 명심하고!”
지지직.
번태가 드래곤의 눈에 지팡이를 찔러 넣으며 전류를 방출했다.
사방이 온통 금빛이다.
[꺅! 승지야 조심해!]
머리 위로 꿀처럼 떨어지는 드래곤의 피를 피해 승지가 뛰어내렸다.
털퍽 거리며 떨어진 피는 뜨겁기까지 한지 김이 피어올랐다. 그리고는 끈적거리며 거품이 터지더니 슬라임으로 변했다.
“엄청 성가신 놈으로도 보냈군.”
[뭐부터 잡을 거야?]
“나도 유월을 돕는다.”
드래곤이 휘감은 건물은 출입을 제한해서 랭커들 말고는 도망갈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비각성자 구출이 우선이다.
드래곤의 둥지에 도착한 유월은 드릴처럼 벌써부터 둥지 끝부분을 파괴하고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따라가려던 승지의 뒤쪽으로 찢어지는 타이어 소리가 들렸다.
끼이이익!
“사, 살려줘!”
“밟아!”
[헉! 아까 모여들었던 기자들도 위험하잖아!]
허둥지둥 차로 뛰어든 기자들이 마구 엑셀을 밟아댔지만 드래곤과 싸울 때마다 예측할 수 없는 방향에서 피가 떨어졌다.
뜨거운 황금빛 슬라임 때문에 길이 바로 막혀 버렸다.
[어떡해? 구해줘야지!]
“쯧.”
승지가 혀를 찼다.
생각 같아서는 저 놈들이 당하든 말든 신경 끄고 싶지만, 여론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군.
내가 한 번 봐준다.
터엉!
승지가 차 트렁크에 손을 짚자 간신히 운전하던 기자들이 펄쩍 뛰어올랐다.
“힉!”
“사, 살려…!”
기자들은 사나운 눈빛의 승지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승지가 무뚝뚝하게 윽박질렀다.
“안전벨트 착용했냐?”
기자들이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흔들었다.
“빨리 안 차고 뭐해!”
“네, 네!”
급하게 안전벨트를 당긴 그들이 목숨줄처럼 찰칵 벨트를 채웠다.
대충 의자에 붙어있는 걸 확인한 승지가 그대로 차 앞쪽을 들어올렸다.
[오오오!]
각성자 만세다, 빌어먹을!
승지가 그대로 양 손으로 차를 들어 올리자 공중에 뜬 바퀴가 마구 공회전했다.
잔뜩 기울어진 차체에서 기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 시동 끌까요?”
“끄지 마!”
승지는 냅다 차를 들어 올리고 달려갔다. 그를 향해서 떨어지는 액체들은 성좌가 미리 알려주거나 프레임 컨트롤로 멈췄다.
섬광처럼 빠르게 그 사이로 달려 나간 승지가 웬만큼 드래곤의 영향을 받지 않는 구역으로 빠져나가자 빙글 허리를 틀었다.
마치 투포환을 던지듯 가볍게 회전을 넣자 차가 낮은 높이로 부웅 날아갔다.
승지가 소리쳤다.
“추락 대비하고, 이제 밟아!”
“네아아악!”
텅! 터텅!
끔찍한 추락을 예상했던 기자들과 달리 안정적으로 도로에 착지한 차가 그제야 급발진하며 부웅 튀었다.
“살았다!”
“성좌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저 미친놈이 진짜 해냈어!”
기자들이 환호와 비명이 섞인 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힘 조절 완벽하고! 승지는 천재야!]
“남은 떨거지도 빨리 치우자고.”
승지가 손을 탁탁 털었다.
어쨌든 제일 큰 문제인 드래곤을 번태와 류의건이 맡았으니 확실히 몸을 빼내기가 편했다.
기대와 겁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는 기자들을 같은 방식으로 실어 던진 승지가 와장창 쿵탕하고 떨어진 차들이 도로를 급히 빠져나가는 걸 확인했다.
드래곤을 올려다보니 거의 껍질이 다 벗겨져 있었다. 번태가 지팡이를 휘둘러 위쪽으로 쳐낼 때마다 황금빛 액체가 꿀렁이는 모습이 마치 폭포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류의건은 용에게서 떨어져 나와 알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가 깨트린 알에서도 황금빛 액체가 흘러나왔다.
“저걸 다 처리하고 나면 도저히 멀끔하게 참석하는 건 힘들어 보이는데.”
[응?]
“범윤오가 노리는 게 랭커들의 이미지 추락이면 잘 먹혀들어갈 거라고.”
타이밍 좋게 나타난 드래곤 때문에 마왕과 결탁하여 공포심을 조장한다는 범윤오의 선동이 먹혀들기가 쉬웠다.
차라리 드래곤이 완전히 사악하고 위험한 모습인 게 낫다.
꿀이 꿀렁이는 꿀렁꿀렁한 모습이니 지금 자기들끼리 장난 치냐는 반응까지 나올 법했다.
랭커들은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었지만 승지의 눈에도 저게 뭐하는 짓거린가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고온의 액체며 분열했다 합쳐지는 적이며 시간제한까지 있어 위험도는 배로 높은데 말이다.
울화가 터진 승지가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오는 슬라임의 머리를 터트렸다.
“페엑!”
뜨거운 황금빛 액체가 용광로 안에서 폭발하듯 비상했다.
승지는 일부러 손목을 드러내고 튀는 액체에 한 대 맞아주었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콘크리트를 녹이며 끓던 액체도 각성자의 몸에 닿으니 뼈를 녹이는 게 아니라 화상을 입는 것에 그쳤다.
물론 성좌는 호들갑을 떨었다.
[끄아! 아프겠다! 승지야 당장 포션 바르자!]
“됐어. 이 정도는.”
참을 만 하다.
승지는 기대보다 허약한 몹을 보며 투지를 불태웠다.
고작 이따위 걸 가지고 시간을 끌려고 했다 이거지?
범윤오 자식. 우릴 너무 우습게 봤어.
“다 쓸어버리겠어.”
그 순간 뿅망치 모양이던 마왕의 무기가 뾰족하게 변했다.
투앙!
승지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는 슬라임에 있던 자리에서 붉은 잔상으로 나타났다.
퍼엉!
퍼엉!
슬라임들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마치 총알이 연달아 튕겨서 발사된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야? 승지야! 예전보다 프레임 컨트롤을 훨씬 능숙하게 다루잖아?!]
놀란 성좌가 연신 대화창을 띄웠다.
초고속으로 이동한 승지가 슬라임 앞에서 잠깐 멈출 때마다 어김없이 슬라임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승지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다르다.
기존에 쓰던 프레임 컨트롤은 승지가 직접 대상을 붙잡고 제어한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 쓰는 프레임 컨트롤은 세계가 승지에게 맞춰 변하는 감각이었다.
혼자만의 힘이 아닌 것처럼.
우우웅.
승지의 손에 잡힌 마왕의 무기가 은은하게 붉은 빛을 냈다.
마치 이미 무기와 승지가 한 몸이 된 것처럼 힘이 흘러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