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색돌 (2)
회의 장소는 미스핏 길드였다.
[와아! 여기도 오랜만에 돌아오니까 감회가 새로운걸.]
성좌가 간만에 보는 기와 담장을 보며 즐거워했다.
미스핏 길드로 랭커들이 모이느라 옛스러운 담장 앞은 검은 세단을 비롯한 외제차들로 가득 찼다.
꼭 옛날 조폭 영화같군.
저마다 으리으리한 차에서 내리는 랭커들을 위해 안내하느라 미스핏 길드원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오들 잡긴.
승지는 그냥 뛰어서왔다. 새집과 거리가 별로 멀지 않았던 것이다. 느긋느긋하게 옥상을 뛰어 날아오니 별로 힘들지도 않았고.
근엄하게 차에서 내리던 인물 중에는 박편호도 있었다. 한껏 졸부 티를 내며 내리던 그가 승지를 발견하고는 움찔했다.
“윽…!”
“안녕하쇼.”
승지가 아는 체를 하자 그의 얼굴이 씰룩이더니 후다닥 길드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사람이 인사하는데 씹기는.”
[히히. 승지가 무서운가봐. 어흥!]
놀려주는 건 대충 마무리한 승지가 안으로 들어갔다. 확실히 몇 번 봤다고 들어가자마자 그를 제일 먼저 반겨주었다.
“어? 채승지 각성자님?”
“오랜만이다.”
여전히 책을 꼭 끌어안고 있던 서명구가 반가운 얼굴로 달려왔다.
“랭킹 올라오신 거 봤어요! 이제 다 잘 풀렸다면서요?”
“뭐 그렇게 됐다.”
“잘 됐네요. 이제 더 숨길 일도 없을 테니까요!”
서명구는 한 시름 놨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웬일로 혼자 다니냐? 최자림은?”
“…윽. 저 이제 최자림 각성자님이랑 같이 안 다녀요.”
“싸웠냐?”
“싸웠으면 제가 지죠.”
“하긴.”
서명구는 풀이 죽은 채 말했다.
[에이~ 설마 그때 헬바티아 던전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도 삐져있는 거야? 서운해서?]
성좌가 깐족거렸다. 최자림이 던전에서 서명구를 버리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본인이 다시 구하러 갔으니 된 거 아니냐.
이해는 안 가지만 승지는 별 생각 없이 말했다.
“너한텐 잘 됐네. 비전투계열이 최자림이랑 같이 다녀봤자 수명만 깎이잖냐.”
나름 위로랍시고 한 말이었는데 서명구는 오히려 더 시무룩해졌다.
“……그런가요. 어쨌든 회의 때문에 오신 거죠? 청와각 대회의실로 가시면 돼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청와각으로 향하는 연못 옆을 지나면서 서명구는 애써 최자림 생각을 떨치려는지 조잘거렸다.
“이번 회의에선 또 굉장한 문제가 터졌나 봐요. 외국 각성자들도 같이 협조할 거란 말이 있던데요.”
“그래? 난 외국 애들한텐 관심이 없어서.”
“채승지 각성자님도 이제 한국 랭킹권인데 세계적인 랭커들은 알아두셔야죠. 큰 메인 미션 하나 뜨면 보게 되실 텐데.”
“천천히 알면 되지. 근데 이거 정부 요청 들어주면 뭐 주냐?”
“아뇨. 정부에선 어디까지나 협조 요청을 하는 거라서 따로 보상금은 없어요.”
“쯧. 여전히 날로 먹는 놈들이구만.”
승지가 혀를 찼다.
“돈도 안 주면 이런 일을 누가 해?”
“이번 일이 미션에 필요한 분들이나 류의건 각성자님 같은 경우는 하더라구요.”
“아, 그래. 걔는 할 거 같다.”
어차피 하는 놈만 하면 뭐하러 회의까지 소집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개인 의뢰로 때릴 것이지.
“그래도 정부 요청을 들어주면 페널티가 많이 사라져서 꾸준히 수요는 있는 편이에요. 하지만 오늘처럼 비밀 엄수를 강조한 적은 없어서 좀 신기하네요.”
“으음.”
승지와 서명구는 청와각의 지하로 내려갔다.
미스핏 길드의 본부인 청와각은 단촐하게 생긴 1층짜리 건물보다 지하에 대부분의 시설을 몰아넣은 형태였다.
덕분에 연구에 매진하는 연구원들은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창백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시체처럼 걸어 다니던 미스핏 길드원들은 그래도 승지를 볼 때마다 안색이 좀 밝아지며 꾸벅꾸벅 인사해댔다.
그들에게는 생명의 은인이었으니까.
“승지 씨! 어서 오세요.”
“잘 지내셨어요?”
“안녕.”
[우와앗! 여기선 승지도 인기가 많구나! 잘됐어, 이걸로 실연의 아픔을 딛고 새 사람을 만나는 거야!]
시끄러. 누가 벌써 차인 줄 알아?
승지가 대회의실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유월이 보였다.
물론 승지는 유월 쪽으로 직행했다.
“안녕하십니까.”
“오셨어요.”
승지는 자연스럽게 유월의 옆자리에 앉았다. 좋아.
미스핏 길드장이 곧 회의실로 들어왔다.
“다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길드장 이화예가 말했다. 그의 뒤로 조폭처럼 생긴 한 남자가 따라 들어왔다.
이화예가 그를 소개했다.
“이번 문제를 위해 서울 경찰청에서 나오신 김엄택 경정이십니다.”
“반갑습니다. 각성자 여러분.”
마이크를 잡은 김엄택은 경찰청 출신답지 않게 근골이 튼튼해보였다.
각성자가 나타난 이후로 경찰의 업무는 상당히 축소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 자주 현장에 나간 흔적이 엿보였다.
저 사람도 각성자인가?
그가 딱딱하게 진행했다.
“앞서 전달한 것과 같이 이번 안건은 절대로 외부 유출을 금지하며, 악용하는 경우 성좌신의 페널티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주시기 바랍니다.”
“알러트 문제입니까?”
“그렇습니다.”
김엄택이 가죽 잠바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랭커들이 모인 탁자 위로 작은 물건을 하나 내려놓았다. 단번에 랭커들의 시선이 쏠렸다.
[응? 저게 뭐야?]
성좌의 눈에는 고스란히 물건이 보였을 텐데도 어리둥절해보였다.
[그냥 작은 봉지 안데 하얀 가루가 들었는데?]
…하얀 가루? 설마.
승지의 불길한 직감을 김엄택이 확인시켜주었다.
“현재 전세계에 유통되고 있는 마약, ‘키스’입니다.”
“!”
“마약…!”
비로소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각성자라고는 해도 마약을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인 자들이 많았다.
“무슨 마약 이름이 키스야?”
“마약이랑 각성자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회의까지 소집한 거람. 나 참.”
“이 마약은 마왕 나르키스의 던전에서 나온 재료로 만들어졌습니다.”
김엄택이 소란을 무시하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던전 이름이 나오고서야 랭커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와, 이젠 마왕 가지고 마약까지 만드냐. 가지가지 한다.
[아아! 나르키스의 마약이라서 이름을 키스라고 그런 거구나!]
좀 진지해진 랭커들이 김엄택에게 집중했다.
“마왕에게서 나온 소재를 가공했기 때문에 키스는 기존의 마약보다 훨씬 강한 환각과 중독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각성자가 아닌 자들에게도 효과가 있어 이미 북미 등지에서는 물론, 대한민국 내에서도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허어.”
“마약이라니.”
“우리나라는 마약 청정국 아니었어요?”
“아닙니다.”
김엄택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기존에 있는 마약들도 규제 대상이지만 이 새로운 마약인 키스는 마왕의 힘 때문인지 직접 사용하지 않고서는 적발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각성자들의 도움을 요청한 거군요.”
“예. 듣기로는 신성 스킬을 가진 각성자라면 마왕의 힘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하던데….”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이 류의건에게 쏠렸다. 류의건은 언제나처럼 호구스럽게 답했다.
“물론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
살짝 턱을 끄덕인 김엄택이 말을 이었다.
“감사합니다. 또한 마약의 유통을 막는 것에 앞서 마약 제조가 이뤄지는 원인부터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이에 여러분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협조라.”
“지금까지 한 얘기들만 봐서는 아무 단서도 없는 거 같은데요.”
랭커들이 말했다.
“마약이라니, 참. 별 걸 다 만드는군.”
“본 적도 없어요.”
“뭐 발견하면 연락해 달라는 거 아닌가? 이럴 거면 굳이 회의를 소집할 필요도 없을 텐데.”
“물론 그렇게도 수사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을 모이라고 한 건 다른 이유에서입니다.”
김엄택이 눈에 번득 힘을 주었다.
“나르키스 던전 열쇠를 소유하신 분은 모두 일시 반납해주셔야겠습니다.”
“뭐요?”
랭커들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가장 격하게 화를 내는 사람들은 역시 나르키스 던전 소유자들이었다.
“이봐, 비각성자라 모르나 본데 지금 남의 집을 갑자기 내놓으란 말이랑 똑같거든?”
“집보다 더하죠! 던전 열쇠를 반납하라니.”
“영장 있어? 아니, 이런 일에도 영장이 필요한가?”
“여러분, 진정해 주세요! 우선 얘기를 들어보고….”
류의건이 말려보았지만 다들 한 가닥 하는 랭커라 랭킹 2위의 말에도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애초에 각성자도 아닌 사람이 열쇠를 가져다가 뭘 할 수 있다고?”
“맞아.”
김엄택은 일부러 그들이 시끄럽게 떠들 동안 침묵했다. 그가 반응이 없자 랭커들도 결국에는 입을 다물고 김엄택을 노려보기만 했다.
“아무튼 난 협조 못해요.”
“나도 못합니다.”
“…….”
김엄택은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그래서 저 대신 협조를 도와주실 분을 모셨습니다.”
그리고 매우 망설이며 승지가 아주 잘 아는 포즈를 취했다.
[헛, 저건!]
콰과광!
대회의실에 번개가 내리쳤다.
“아, 이런 내가 또 늦었구만!”
또 괴상한 포즈로 나타난 번태가 시원스레 말했다. 김엄택은 프로답게 창피함을 빠르게 없애고 말을 이었다.
“같은 각성자가 확인하면 오랫동안 반납할 일은 없으실 겁니다.”
말이 협조지 따르지 않으면 랭킹 1위의 힘으로 직접 조져버리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못 알아듣는 랭커는 없었기에 다들 표정이 굳어졌다.
[호오, 번태가 나타나니까 분위기가 싹 정리되는 걸? 류의건의 말은 듣지도 않더니 역시 랭킹 1위는 다른 가봐!]
그것보다는 진짜로 공격할 수도 있을 만큼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라서 그렇겠지.
명색이 랭킹 2위인 류의건의 말을 사람들이 무시하는 건 그가 사람은 공격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같은 편을 공격하는 일은 더더욱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번태는 달랐다. 일견 정의스럽게 보일 때도 있었지만, 옳다고 생각하면 아무 짓이나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저 꼴로 다니는 것부터가 정신 사납고.
도대체 뭘 하다 왔는지 수영팬티 하나만 입고 있는 번태를 랭커들이 애써 외면했다.
저게 대한민국 랭킹 1위라니. 젠장. 유월 눈에 그딴 거 보여주지 말란 말이다!
번태가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흔들었다.
“자자, 다른 것도 아니고 마약이야. 나부터 모범을 보일 테니 다들 따라주게나! 마약은 없애버려야지!”
번태는 정말로 두툼한 열쇠 뭉치에서 나르키스의 던전만 골라 김엄택에게 건넸다.
김엄택은 속으로 불경이라도 외는지 해탈한 표정으로 그에게서 열쇠를 받았다.
“열쇠는… 크흠! 지금 키스 문제로 입국한 국제 수사관에게 검사를 받은 다음 다시 돌려드릴 겁니다. 그러니 걱정 말고 넘겨주십시오.”
“그럼, 그럼.”
번태가 맞장구를 쳤다. 어쩔 수 없이 랭커들이 열쇠를 넘겼다. 어쩐지 거부하면 번태가 공격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보다, 저 꼴을 안 보고 싶어서 넘긴다는 느낌이지만.
넘길 나르키스 던전 열쇠가 없어 구경하던 승지가 물었다.
“근데 여기 없는 놈들은 어떻게 할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