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우린 X나 예전에 망했어 (2)
누군가 고무호스의 끝을 막아둔 것 같았다.
마왕의 무기가 뱀처럼 빙글빙글 돌듯이 커지며 클랩의 속을 채워갔던 것이다.
워우, 미친.
저도 모르게 그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순식간에 몸이 부풀며 변해가는 클랩의 모습은 호러 영화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마왕님 멈추세요!”
큐라가 급하게 클랩의 허리를 껴안았다. 마치 사람한테 하듯이 기도를 압박해 뱉어내게 시키려는 것 같았다.
클랩은 그러거나 말거나 우아하게 속눈썹을 까딱여 눈짓했다. 그래봤자 어차피 제 입 속이란 뜻이다.
당연히 마왕한테 상대도 안 되는 큐라로서는 오히려 거북이 등에 업힌 것처럼 점점 위로 상승했다.
“야, 그냥 포기하는 게 너한테도 좋아보인다만?”
“…….”
꾸국. 구구구국.
클랩은 고집이 셌고 승지는 점점 굵어지는 목을 한 손으로 잡기 버거워졌다.
어차피 놔도 더 이상 삼킬 순 없을 테니.
“에라이!”
승지가 탓 손을 놓았다. 그의 손에서 벗어난 마왕의 무기는 심판자의 가호가 멀어지자 오히려 더욱 폭주하며 크게 부풀었다.
“마왕님!”
쿵.
클랩의 머리가 높이 솟아있던 마왕성의 천장에 닿자 큐라가 소리쳤다.
“저 무기는 이미 새로운 주인을 섬기는 중이라 삼켜도 별 힘이 안 되실 거란 말이에요?”
“뭐?”
승지가 되묻는 것과 동시에 클랩이 오토바이만한 미간을 꾸깃 좁혔다. 그리고는 마침내 삼키는 걸 포기했다.
“푸에엑!”
엄청난 점액과 함께 비로소 무기가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흉물을 보자마자 승지가 역겨운 신음을 흘렸다.
“진짜 돌겠다.”
승지가 욕을 뇌까리자 마치 눈치를 보듯 핑글핑글 돌던 마왕의 무기가 빠르게 액체를 털어내고 뿅망치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치 그 뿅망치로 때리는 것처럼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클랩이 원래 모습으로 작아졌다.
꿈에 나올까 무서울 지경이다.
“너도 진짜 징한 놈이다.”
“퉤엣.”
마지막 침을 뱉은 클랩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큐라. 나한테 보고할 땐 그런 말 없었잖아.”
“그으게요오.”
큐라가 방금 그 꼬락서니를 보고도 클랩에게 애교를 부리며 치댔다.
“마왕님이 그 광대 녀석만 먹으실 줄 알았는데 자기까지 먹으려고 하실 줄은 몰라서요.”
큐라는 나름대로 승지는 살려주려 했다는 듯 귀엽게 눈을 깜박거렸다. 물론 넘어갈 승지가 아니었다.
클랩이 입술을 문지르며 물었다.
“저 인간과 광대는 하나잖아.”
“아아니죠. 이세계에서 마왕이 될 뻔했던 쪽은 광대니까 그것만 먹기로 하셨잖아요.”
잘들 논다.
“심판.”
스킬 창이 하나 새롭게 떠올랐다.
아까부터 계속 떠있던 가호 창이 점점 파랗게 변해가는 걸 힐긋거리며 승지가 말을 이었다.
“너 방금 한 얘기 설명 똑바로 해.”
심판 스킬이 발동되자 클랩과 큐라의 주위로 푸른 십자형 빛이 나타나 둘러쌌다.
동시에 그들 머리 위에 교수대처럼 날카로운 칼이 생성되었다.
시계추처럼 양 옆으로 느리게 흔들리는 칼날이 조금씩 목표를 향해 떨어졌다.
클랩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큐라는 불안하게 위를 흘긋거렸다.
그리고 세 번째 스킬까지 쓰자 승지는 진짜로 곧 뒤질 것만 같은 페널티를 받았다.
가호 스킬 끄면 바로 응급실이다.
피부가 점차 푸른빛으로 변해가는 걸 보면서 승지가 다그쳤다.
“누가 마왕이라고?”
“자기, 마왕에 대한 얘기는 들을 만큼 들었다면서?”
큐라가 시침을 뗐지만 심판 스킬은 가차 없었다. 그가 거짓말을 하자 순식간에 칼날이 쑤욱 내려앉았던 것이다.
“꺄아악!”
“구라 치면 뒤지는 모양인데?”
“마왕님! 이것 좀 풀어주세요!”
“심판자의 능력은 발동하고 나면 못 되돌려. 신이 직접 관장하는 스킬이란 말이야.”
클랩이 잔뜩 심통이 난 목소리로 덧붙였다.
어째 신의 심판자 스킬은 하나같이 뒤를 돌아보는 게 없냐. 걸리면 그냥 끝이냐고.
“좋아하지 마, 인간. 어차피 네 놈 정도의 능력이면 제대로 죽이지도 못하니까.”
“저는 죽어요~!”
“그러니까 불면 되잖아.”
승지가 클랩을 무시하고 큐라만 닦달했다.
큐라는 울상이 된 얼굴로 심판장을 벗어나려고 해다가 팔이 타버렸다. 비명을 지른 그가 하는 수 없이 실토했다.
“성좌신이 접붙여준 인간은 둘이 동시에 마왕이 될 수도 있어. 보통은 한 쪽만 마왕이 되기도 버거워서 다른 쪽을 잡아먹지만, 자기랑 광대는 서로 애틋하니까 혹시 모르지!”
“잡아먹는다고?”
뭔가 불길한 예감이 스쳤으나 큐라는 아는 건 다 불었다는 것처럼 아우성을 쳤다.
“말했으니까 이제 풀어줘, 자기!”
“아직 멀었지. 아까 무기 얘긴 뭐야.”
“꺅! 그건 광대한테서도 들었잖아! 마왕이 되어갈 때 주변도 변한다고! 힘이 있는 것부터 마왕을 따르게 되는 거야! 그 무기처럼!”
뿅망치는 여전히 죄 없는 것처럼 바닥에 얌전히 누워있었다. 승지가 이를 악물었다.
“범윤오 어디 있어?”
승지가 빠르게 다그쳤다.
슬슬 몸에 오는 부담이 심상치 않았다. 이미 얘기를 들으면서도 뇌가 쪼개지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범윤오는 우리도 어디 있는지 몰라!”
“웃기지마.”
“정말이야! 우리도 존재만 느낄 수 있을 뿐이라고! 마치 성좌신처럼!”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생사는 알 수 있다 이건가.
쿠웅.
박동이 가슴을 크게 치고 지나갔다. 이미 눈이 시리도록 푸른빛은 진동하며 한계를 알리고 있었다.
“부족해.”
“아우, 정말! 인간들! 인간들을 납치해갔잖아! 아직 던전도 없는 녀석이 그 많은 인간들을 어디다 보관할 수 있겠어?”
…현실.
코스모스 센터가 환영처럼 눈앞을 때리고 지나갔다.
“큐라. 입 닥쳐.”
클랩이 나지막하게 지껄인 순간 심판의 칼이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쿠아아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거센 공기가 그들의 머리 위에서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풍압을 이기지 못한 승지가 쿠당탕 쓰러졌다.
클랩이 가볍게 손을 까딱여 정수리에 얹힌 칼날을 막아내고 있었다.
일단 목표에 부딪친 심판 스킬은 임무를 완료했다는 듯 사라졌다.
제기랄, 이미 무슨 스킬인지 알고 있었구만.
심판 스킬이래서 깔끔하게 죽여줄 줄 알았더니 고작해야 구속과 공격이 전부였다.
생긴 것만 요란했어.
“크헉…!”
승지가 기침을 토해냈다.
덜덜 떨던 큐라가 힐끔 눈을 드는 사이 그 자리에서 걸어 나온 클랩이 여유롭게 승지의 등을 꾹 눌렀다.
“잘 버텼네.”
바닥으로 쓰러진 승지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과부하가 온 몸이 원하지 않아도 덜덜 떨렸다.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이건 반동이 너무 심하잖아, 빌어먹을.
다른 자들과 부담을 나누지 않고 혼자 구속을 걸고 싸운 대가였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끌어올린 차이가 이렇게나 컸던 것이다.
광대랑 함께 싸울 때는 이정도가 아니었어.
본인이 가끔 무리하긴 했어도 페널티나 상황이나 어디까지나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이었다.
그런데 이제와 돌이켜보니 광대 성좌가 늘 무리하지 않도록 상태창으로 경고하고 본인이 페널티를 감수했었다.
알고 보니 승지를 포기하고 마왕이 되는 길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신의 심판자는 당연히 류의건이나 승지를 위해서 그런 페널티를 짊어질 리가 없었고.
살아있는 놈이 더해.
승지는 이 와중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클랩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웃어?”
“근데 말이야. 개새끼는 보통 나한테만 지랄을 하진 않거든.”
승지가 완전히 돌아버린 사람처럼 미친듯이 킥킥거렸다.
이 와중에도 한 점 엿을 먹일 수 있어서 몸이 으깨지는 와중에도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디 개싸움이나 한 번 구경해볼까?”
승지는 이미 망한 몸뚱이에다 한 번 더 페널티를 푹 찔렀다.
“소멸!”
“!”
승지의 몸에서 폭발하듯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섬광은 화산처럼 위로 솟구치더니 벽을 스치고 하늘까지 닿으며 사라졌다.
정확히 목적한 것을 소멸시키며 말이다.
파스스.
무너지는 소리도 없이 완벽하게 사라진 마왕성의 흔적이 공기 중에 흩날렸다.
먼지조차 남지 않은 깔끔한 소멸이었다.
“내 마왕성이!”
클랩이 으르렁거리며 승지의 등을 짓눌렀다.
“감히! 이런 짓을 한다고 달라질 게 있을 거 같아!”
“있지.”
승지의 입가에서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손가락을 움직일 수만 있었다면 위를 가리켰을 것이다.
“또 다른 미친놈이 개같이 달려올 거거든.”
우르릉.
류의건이 언제나 기를 쓰고 피하려던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었다.
방금 소멸 스킬로 잠깐 푸르게 변했던 하늘이 이번에는 황금빛으로 눌리고 있었다.
클랩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하늘이 둥글게 찢어지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막을 뚫고 들어오듯.
[ 페널티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가 당신을 찾아냅니다! ]
뚜둑.
고막이 끊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하고 매끄러운 발톱이 하늘 중앙에 나타났다.
그가 발톱을 아래로 내리 그었다.
그러자 마치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두 눈을 믿을 수 없던 클랩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올라갔다.
“부르그골!”
드래곤의 마왕이 이 자리에 강림하고 있었다.
마냥 승지를 보고 있던 큐라마저도 털썩 무릎을 꿇었다.
찢긴 하늘 사이로 행성처럼 거대한 파충류의 눈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의 색이 새롭게 쓰이는 것 같았다.
숨이 막힐 듯한 초자연적인 광경에도 승지는 제대로 색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와, 죽기 전에 용을 보다니. 씨발, 복권을 샀어야 하는 건데.
승지는 이미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클랩의 치마에 머리를 털썩 눕혔다.
아, 어차피 돈 많았지 나.
이미 글씨를 분간할 수 없는 푸른 스킬의 가호 창을 보며 승지는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더라?
죽기 전엔 살아왔던 시간이 저절로 눈앞에 휙휙 지나간다던데 이건 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각성하면 돈이나 뒤지게 많이 벌고 잘 살려고 했는데 어쩌다 마왕 새끼들이랑 엮여버린 건지.
하지만 일단 돈이 생기면 그거다.
안전 자산으로 묶어둬야지.
일확천금을 얻은 다음에 그걸 몽땅 잃어버리면 홧병으로 죽어버리고 말거다.
그러려면 일단 돈을 보관할 세계가 멀쩡해야지. 신이 뒤져서 세계까지 죽는다는 게 말이 되냐?
시발 꼭 내가 나서야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그런 마음가짐이었나?
얼른 방해하는 놈들을 다 쳐 없애고 꿀이나 빨려고 했는데.
드래곤의 눈알이 지옥에서 떨어지는 혜성처럼 이쪽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더럽게 크네.
역시 모든 건 마왕이 문제다.
승지가 한숨처럼 가호 스킬을 끄려고 했을 때였다.
뾰오옥.
땀과 피로 젖은 머리카락이 무언가 부드럽게 눌렸다. 좀 웃기는 소리와 함께.
“……?”
승지가 아래쪽으로 눈을 굴렸다. 그러자 샛노랗고 붉은 뿅망치의 모습을 한 마왕의 무기가 어느새 다가와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