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연극이 끝난 뒤 (4)
미스핏 길드에 도착한 승지는 수많은 동물들의 향연에 당황했다.
“윽…!”
토끼, 다람쥐, 개구리 같은 허약한 동물의 탈을 쓴 인간들이 길드 안을 걸어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허얼! 완전히 초보자 사냥터 같아!]
약한 각성자들인 건 알았지만 던전도 진짜 너무하는구만. 맹수랑 구별을 두다니. 차별대우 오지네.
우글우글한 동물 대가리를 본 놀람이 가시자 한결 차분해진 승지가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한 가진 확실해졌네.”
[뭐가?]
“머리가 정상이 아닌 인간들은 다 각성자야.”
승지가 차에서 내리는 사슴과 백호 대가리를 가리켰다.
서울 한복판을 걸었을 때는 각성자가 드물어 대부분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각성자를 모아둔 길드로 오니 확실해졌다.
승지의 표정이 떨떠름하자 사슴 탈을 쓴 류의건이 물었다.
“아직도 저희가 이상하게 보이시나요?”
“어.”
“그래도 백호로 보이는 건 좀 마음에 드네요.”
승지한테서 무슨 동물인지까지 들었던 유월이 가볍게 차문을 닫았다.
남의 머리가 동물로 보인다니.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완전히 미친 사람 같겠군.
하지만 이곳이 던전이라는 사실을 아는 승지에게는 다른 인간들이 아무리 평소처럼 자신을 대해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러다 갑자기 가면을 벗고 정체를 드러내 주세요! 하는 거 아니냐고.
그래서 승지는 인벤토리가 없는데도 꾸역꾸역 뒷좌석에 마왕의 무기를 집어넣고 왔다.
승지와 달리 유월과 류의건은 현실처럼 인벤토리를 쓸 수 있었다. 그 말인즉슨 스킬도 남아있다는 뜻이니.
싸우면 내 쪽이 과하게 불리하다고.
승지는 빌려 신은 슬리퍼를 깔짝거렸다.
“그래서, 누구한테 물어보면 되는 거냐?”
“아마 사라설 씨라면 잘 알고 있지 않을까요?”
“차에서 미리 연락 해뒀어요. 바로 나올 거예요.”
류의건과 유월이 척척 대답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설이 밝게 인사하며 나타났다.
“승지 씨! 유월 씨! 의건 씨!”
사라설의 머리는 두더지였다.
진짜 미치게 한다.
승지는 어색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오랜만이다.”
“던전 일로 오셨다면서요!”
“그게 아니라 이미 던전이야.”
“네?”
설명을 들은 사라설은 심각하게 고민에 빠졌다. 그래봤자 두더지 얼굴이었지만.
“확실히 우리 세계에는 알려지지 않은 마왕이네요. 본 적 없는 열쇠기도 하고요.”
“그래서 말인데, 내 눈에는 너희들이 다 괴물 같거든? 수상하면 바로 공격할 거야.”
대놓고 존재를 부정하는 승지의 말에도 사라설은 태연히 받아넘겼다.
“같은 마왕을 만났던 성좌한테선 소중한 사람을 찾았을 때 던전이 클리어됐다고 들으셨죠?”
“응.”
“그런데 효과가 없었고요?”
“…응.”
유월과 류의건은 별다른 반응 없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
아마 류의건은 눈치를 챘는데도 입 다물어주는 거고 유월은 진짜 모르는 거겠지.
젠장.
“아무튼 이런 정신 마법은 어떻게 깨냐?”
“정신 마법이요? 음, 제 생각은 달라요. 오히려 이렇게까지 현실과 똑같이 재현된 던전이라면 마법으로 만들기는 아주 어렵거든요.”
사라설이 말했다.
“제 생각에는 마법이 아니라 승지 씨가 갖고 있는 능력을 빼앗아서 던전이 만들어진 거 같아요.”
[헉, 그럼 내 힘과 승지의 힘 모두 마왕에게 빼앗겼다는 뜻이야?]
“던전에 들어온 다음부터 능력을 쓸 수 없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성좌는 남아 있구요. 그 힘은 모두 이 현실을 만드는 데 들어간 거죠!”
그럴듯한 이론이었다.
나랑 성좌를 합친 힘이 서울 하나는 너끈히 만들어 내고도 남는다는 건 좀 신기하네.
“그런데 이딴 걸 만들어서 대체 어디다 쓰는데?”
“글쎄요. 보통 이런 종류의 마법은 세뇌가 목적이거든요.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려고요.”
“…….”
승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세뇌라니, 찝찝하다.
“고작 각성자들 머리를 동물로 바꿔놓는다고 내가 마왕 편에 붙을 거 같진 않은데.”
“정확한 목적은 알 수 없죠. 아무튼 던전이라면 분명 보스가 존재할 거예요. 그게 누군지 찾을 수만 있다면 나갈 수 있어요…!”
“성좌가 말했던 인간은 틀렸었잖아.”
“던전이 항상 똑같으리란 법은 없으니… 반대로 승지 씨를 아주 싫어하는 인간을 찾으면 어떨까요?”
사라설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도움을 주고 떠났다.
날 아주 싫어하는 인간이라?
잠깐 고민해보던 승지는 유청을 불렀다.
“미스핏 길드라니 이번엔 또 무슨 일입니까?”
“푸웁…!”
유청을 보자마자 승지가 뿜었다.
유청의 머리엔 개가 달려 있었다.
심지어 불독이야!
“푸하하하! 으하, 으하학!”
얼굴을 보자마자 승지가 미친 듯이 웃어대자 유청의 불독 머리가 더욱 찌그러졌다.
“저 인간 왜 또 저럽니까?”
“그럴 일이 좀…….”
류의건이 상당히 궁금한 표정으로 유청을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머리로 보이길래 저렇게 웃을까 싶어서.
“하 시발 웃겼다.”
눈물까지 찔끔 나올 만큼 웃어댄 승지가 유청의 어깨를 잡았다.
“야, 네가 보스인지 확인 좀 해보자.”
“예?”
유월을 안았을 때처럼 낯간지러운 짓은 못하겠고. 어쨌든 던전을 만든 술사라는 걸 확인만 하면 풀린다니.
승지는 유청을 그대로 들처 맸다.
“?????”
“가만 있어봐.”
“뭐, 뭡니까?”
각성하기 전에도 사람 하나는 업을 수 있는 몸이었다고, 짜샤.
승지는 잠시 유청을 든 채 기다렸으나 던전이 클리어 되는 기색은 없었다.
“씁, 아니네.”
“아니 설명을 좀….”
승지가 유청을 내려놓자 유청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불독 머리라 더욱 멍청해보였다.
“너보다 날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 거 같냐?”
“예?”
한참을 멍청하니 있던 유청이 비로소 설명을 듣고는 인상을 썼다.
“거 참 희한한 던전도 다 있습니다.”
“동의한다.”
“…뭐, 당신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저 말고 다른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어? 누군데?”
“알러트 관계자겠지요. 당신이 보스를 포함해서 다 박살 내 놨으니까.”
불독 대가리를 한 유청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승지는 어둑시니 길드로 갔다.
번태가 쓰고 있는 머리는 심지어 용이었다.
이젠 상상 속의 동물까지 나오냐.
물론 용 대가리가 된 번태는 마냥 재밌어 했다.
“호오! 나는 뭘로 보이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남아있는 알러트 애들 중에 누가 날 제일 싫어할 거 같은지 알아내야 한다고요.”
“글쎄. 다들 대단하게 자네를 싫어하는 건 아닐세! 가장 원한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알러트 보스가 아니겠나.”
“걔는 이미 죽었잖아.”
“그럼 나도 모르네!”
번태는 이렇게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승지는 일단 닥치는 대로 붙잡혀있던 알러트 간부들을 만나보았다.
도마뱀, 뻐꾸기, 어치, 하마.
축 늘어진 동물 대가리들이 승지를 맞아주었지만 모두 던전을 푸는 열쇠는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모두 만나보는 수밖에 없어!]
성좌가 불끈 다짐했다.
어쩔 수 없이 승지는 상당한 시간을 소비해가며 각성자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 와중에 길드 연합이 협조하기도 하고, 오조희(참새 머리를 한)가 도와주기도 했다.
그러나 던전 속에서 일주일, 한 달이 흘러가도 성과가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과 한 치도 다를 바가 없는 일상이 유유히 흘러갔다.
사람을 미치게 만들 정도로.
쾅!
탁자를 내리찍은 승지가 내뱉었다.
“이러다 진짜 돌아버리겠네.”
[승지야…….]
“……잘못 생각한 게 아닐까?”
승지가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아무리 다른 게 다 똑같다고 해도 계속 동물 머리를 한 인간들과 만나고 다니는 게 평범할 리 없었다.
“각성자는 만날 만큼 다 만났다고! 생판 남까지 다 확인했는데 던전의 주인이 없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잖아….]
“생각을 바꿔봐. 던전의 주인은 벌써 찾았는데, 만나는 것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거야.”
[그럼?]
“…없애버려야 하는 거지.”
[죽, 죽인다고?]
“어차피 이 인간들은 가짜야. 던전 속의 존재라고.”
[하지만…….]
성좌가 거세게 도리질을 했다.
[던전 속이라도 너무 현실이랑 똑같은 걸. 진짜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 같단 말이야.]
바로 그걸 노리고 만든 던전이겠지.
승지가 양 손으로 이마를 쓸어 올렸다.
던전 속에서도 미션은 현실처럼 나타났다. 그러나 더는 싸울 수 없게 된 승지는 비각성자처럼 구경만 해야 했다.
동물 머리를 한 각성자들이 뛰어다니는 걸 보고 있으려니 느끼는 점은 하나 였다.
저것들, 정말 인간 같지가 않다.
사람다운 머리를 한 군중들이 더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낯설고 분리된 그 감각.
그러면서 승지는 던전의 목적을 어느 정도 깨달았다.
“이대로 내 힘을 빨려서 던전 속 비각성자로 남거나 보스를 죽여서 각성자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어.”
[뭐, 뭐어?! 하지만 던전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직 찾아내지 못했잖아!]
“바로 그게 핵심이다. 찾을 때까지 닥치는 대로 죽여보라는 거야.”
[!!!!]
승지가 관자놀이를 눌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그것뿐이었다.
벌써 한 달을 넘게 던전에서 시간을 써버리고 있었다.
원래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지는 던전의 특성 상, 이 던전도 같은 원리일게 분명했다.
던전 속에서 재현된 사람들과 만나면 만날수록 머리만 다르지 원래 알던 사람과 똑같다고 느끼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현실과 지나치게 똑같이 만들어놓은 거였어! 개자식이! 죄책감 좀 느껴보라 이거냐?”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 일을…!]
“하! 그래놓고 각성자들 머리는 동물로 만들어 놓다니. 조금 더 쉽게 죽이라는 거야, 뭐야.”
승지가 이를 갈았다.
눈빛에 얼핏 광기가 보여 성좌는 덜컥 겁이 났다.
[그, 그래도 진짜 죽일 건 아니지?]
“…….”
묵묵부답.
승지가 침묵하자 성좌는 무서워졌다.
[나, 난 모르겠어. 승지야. 인간을 죽이는 건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잖아!]
차라리 비각성자로 영원히 던전에서 살아도 좋다고 말할 뻔한 성좌가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이런 식으로 던전이 각성자를 삼켜왔던 걸까?
그래서 아무도 이 마왕에 관한 이야기는 현실에 전하지 못한 걸까?
차라리 그게 낫다.
성좌는 오히려 이 던전에서 탈출한 사람이 현실에 섞여있을 까봐 겁나기 시작했다.
“……잠깐.”
갑자기 승지가 이상한 눈빛으로 성좌를 올려다보았다.
“다시 말해봐.”
[으응?]
“아까 했던 말!”
[그게, 인,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건 안 될 일이라고?]
성좌가 더듬었다. 승지의 표정이 더욱 이상해졌다.
“…너랑은 다르지만 비슷한 말을 했던 인간이 있잖아.”
[어?]
아주 최근의 일이다.
알러트 보스로 나타났던 다나우는 승지에게 마왕이 아닌 사람인 자신을 죽여보라고 도발했었다.
굳이 승지에게 사람을 죽일 것을 강요하는 듯한 이 던전처럼.
승지가 벌떡 일어났다.
“그래! 네가 괜히 다나우와 친한 게 아니었어!”
[어? 어? 맞긴 한데, 무슨 소리야?]
승지는 형형한 눈빛으로 확신했다.
“이 던전의 주인은 다나우다! 현실에서도 진짜로 다나우가 살아있었던 거야! 그 인간의 숙주를 찾아내야 여기서 탈출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