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도 아니면 개 (1)
번태는 백정민을 풀고 연봉 협상에 들어갔다. 연봉이라고 표현하니 이상하지만 본인이 사용한 표현이 그랬다.
“스파이 취직이니까 말일세!”
유청은 끝까지 백정민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번태가 제시하는 액수를 듣고는 약간 흔들렸다.
금수저인 류의건마저 흠칫할 정도였으니.
“정말로 그 돈을 다 쓰시려고요?”
“무슨 일이든 멍멍 왈왈 잘한다지 않았는가? 액수를 맞춰줘야지.”
“차라리 그럴 거면 날 주쇼. 내가 대신 하게.”
“호오, 승지 자네 알러트였는가?”
승지가 이런 바보 같은 대화를 하는 동안 백정민은 액수가 흡족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쁘지 않군.”
액수에 대한 보답인지 백정민은 나머지 정보도 알아서 불었다.
“번태 당신이 여는 윷놀이 행사에 보스는 확실히 참가할 생각이다.”
“역시! 마왕이 쓰던 무기라면 아무리 알러트라도 탐낼 줄 알았지!”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은 아니다.”
그는 기존에 청월량 길드에 잠입했던 것처럼 알러트 조직원을 보내진 않을 거라고 설명했다.
“이미 팀장이 정해진 상황에서 팀원으로 들어가도 무기를 얻지 못할 거라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
“허어, 그래서 류의건 각성자를 팀장으로 내세웠건만?”
“뭐야. 나머진 연막이었수?”
“머리를 조금만 굴려도 무기를 노리면 류의건 각성자 팀으로 들어가는 게 당연하거든.”
번태가 슬슬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역시 대놓고 쳐놓은 덫으로는 들어오지 않는군.”
본인을 미끼로 썼다는 얘기에도 류의건은 잠잠했다.
처음부터 짐작했나보지? 하긴 그러니까 파란 쫄쫄이를 입고 나올 생각을 했겠지.
알고 보니 그것도 다 작전이었던 모양이다. 웃겨보여서 방심하게 만드는.
백정민이 말했다.
“보스는 신중한 성격이다. 보스 주변의 핵심 인물들도 보스의 정체를 모르니까.”
“그 놈 새끼들은 왜 자꾸 마왕이 있는 곳마다 나타나서 집적거리는 거야? 진짜 세계 정복이라도 하려는 거냐?”
“보스의 성좌 때문이다. 보스는 마왕의 힘을 스킬화할 수 있다.”
“뭐라고?!”
백정민이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진 말에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말도 안 돼! 마왕의 힘을 뺏는다니!? 어떻게?!]
성좌도 경악했다. 번태가 다급히 되물었다.
“그게 사실인가?”
“다른 각성자들의 스킬을 빼앗는 것도 마왕의 힘 중 하나라면 믿겠나?”
백정민의 말에 유청이 먼저 굳어졌다. 직접 당한 자이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여튼 마왕 새끼들은 안 빠지는 곳이 없군.
번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그런 무도한 힘을 성좌신이 줬다고 하기엔 독특하긴 했지…….”
“알러트가 마왕의 무기를 탐내는 것도 스킬화를 할 수 있어서입니까?”
“80퍼센트는 확실하다.”
미간을 구기고 있던 승지가 말했다.
“정리 됐네. 목표는 둘이다. 하나, 알러트 새끼들에게 무기가 넘어가지 않도록 막기. 둘, 그 사이에 알러트 본진 조지기.”
여전히 알러트가 마왕의 힘을 강탈한다는 충격에서 벗어나기 바쁜 다른 각성자와 달리 승지는 냉정했다.
“여기까지 불었는데 더 미룰 거 있나? 그냥 박살내자고.”
속전속결. 먼저 치는 놈이 콤보 권리를 가져가는 거다.
* * *
물론 승지는 이런 식의 심리전을 바란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
그가 고뇌에 찬 표정으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린 랭커들은 바로 알러트를 소탕할 계획을 세웠다. 스파이로 합류한 백정민이 있으니 정보전도 해볼 만 했다.
다만 쳐들어가는 것보다 보스를 붙잡는 게 문제였다. 한 때 승지도 본진에 갈 수 있었을 만큼 출입 보안은 허술했다.
“어차피 보스는 도주 수단을 따로 가지고 있다. 그러니 현장에서 마주치는 건 의미가 없어.”
“그럼?”
“정확한 타이밍에 붙잡아야지.”
백정민은 번태가 내건 미끼에 반드시 보스가 나타나리라 장담했다.
따라서 번태는 최대한 화려하게 미끼가 있는 쪽에 시선을 쏠리게 해놓고, 필요한 순간 백정민이 본진에서 그를 소환하도록 준비했다.
[그러기 위해서 입는 거니까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 승지야! 아주 잘 어울리는 걸!]
성좌가 때맞춰 대화창을 띄웠다. 작전이라는 핑계를 대긴 했지만 승지의 꼴에 가장 기뻐하는 것도 저 녀석일 거다.
“젠장할….”
승지가 빠득거렸다. 그는 완벽하게 몸에 달라붙는 빨간색 쫄쫄이에 이를 갈았다.
심지어 어깨에는 망토를 걸친 데다 이따가 머리에 뒤집어쓸 헬멧까지 야무지게 준비된 터였다.
벌써 옷을 닮아가듯 승지의 얼굴이 벌겋게 붉어졌다.
아무리 어그로를 끌어야 된다 해도 몸을 가릴 걸 아무거나 달라고 협박한 결과가 이거였다.
[아주 멋있는 걸 왜 그래! 근사해!]
“입 다물어.”
[게다가 헬멧 쓰면 아무도 승지인 줄 몰라볼 거야! 그게 작전의 핵심이잖아!]
승지는 당장이라도 거울을 깨부술 듯이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알바한다고 생각하자. 일하면서 더한 것도 해봤잖아.
제정신이라면 절대 입지 않겠지만 번태는 이번 일에 참가한 팀장들에게도 쏠쏠한 사례비를 챙겨준다고 약속했다.
그것만이었다면 거절했을 지도 모르지만 알러트를 잡기 위한다는 목적이 발목을 잡았다.
“특이한 복장을 입으면 사람보다는 복장에 시선이 쏠리기 마련이네! 그러니까 더욱 화려하게 입어줘야 해!”
“그러니까 왜 내가.”
“이번 일 해내고 싶지 않은가!”
“게다가 뜬금없이 머리를 가리는 것보다는 헬멧을 쓰는 게 더 자연스러우니까요.”
류의건이 거들었다. 작전대로라면 결전의 순간 그들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알러트 본진으로 이동해야했다.
갑자기 랭커들이 사라진다면 알러트 보스가 의심할 지도 모르니 대역을 세워둬야만 한다는 것이다.
머리만 가리면 똑같은 쫄쫄이를 입고 망토를 쓴 사람이 또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테니 번태는 반드시 복장을 엄수하라고 강조했다.
[대역을 쓰기엔 완벽한 복장이잖아! 승지 세계 사람들은 참 똑똑하다, 그치?]
“똑똑하긴 개뿔이.”
결국 승지는 묵직한 헬멧을 머리에 뒤집어썼다. 시야가 단번에 좁아지며 시선이 똑발라졌다.
“본진 들어가면 알러트 재산은 내가 다 털어먹는다. 빌어먹을.”
[응! 그래그래! 꼭 그렇게 해!]
승지가 대기실 문을 열어젖혔다. 그곳은 대형 월드컵 경기장을 방불케 하는 원형 체육관이었다.
“아! 지금 이 순간 도 팀의 팀장! 레드가 나오고 있습니다!”
함성이 귀를 찔렀다. 3층으로 되어있는 체육관의 관객석이 모두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방송국 카메라도 수십 대나 되는데다 드론까지 날아다녔다. 번태가 작정하고 큰 행사를 준비한다고 했을 때 이정도 규모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따로 준비된 난간으로 몇 걸음 걸어 나온 승지는 시상식처럼 마련된 앞쪽에 다섯 개의 깃발이 걸려있는 걸 보았다.
빨, 노, 초, 파, 검.
국기 대신 어깨에 걸치는 휘장처럼 매끄러운 다섯 개의 천이 화려하게 내려와 있었다.
[꺅! 저기 대형 스크린 좀 봐! 승지가 완전 크게 보여!]
승지는 힐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미묘하게 돌린 각도만큼 보이는 빨간 헬멧을 쓴 인간이 자신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보다는 그럴 듯 하네.
정말 만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히어로 복장에 승지는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을 헬멧에 쑤셔 넣었다.
젠장, 그래도 얼굴이 안 보이니까 덜 쪽팔리긴 하군.
승지가 걸어 나오자 원래 응원단이 서야하는 자리에 승지가 섭외한 팀원이 보였다.
“푸하하하! 복장 끝내주네요!”
“스, 승지 씨?”
“…….”
웃음부터 터트리는 최자림과 당황하는 오조희를 무시한 승지는 초조하게 유월의 반응을 확인했다.
역시 평소처럼 무표정이라 가늠이 잘 안 된다.
하하, 망했군.
[괜찮아, 괜찮아! 지금 승지 아주 멋있어!]
[당장이라도 반하겠는걸! 꺄하하!]
승지는 자신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잠시 성좌의 말을 무시하기로 했다.
체육관을 중계 중이던 아나운서는 말을 걸면 죽이겠다는 승지의 오오라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카메라를 돌렸다.
“자! 뒤를 이어 개 팀의 팀장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덜컹!
승지와 달리 시원하게 문이 열어젖히며 노란 헬멧을 쓴 번태가 뛰어나왔다. 물론 번개 효과도 잊지 않았다.
콰과광!
“기다렸는가!”
그가 뱃심 좋게 허리에 양 손을 짚자 망토가 위엄 있게 흩날렸다.
저 인간이야말로 레드를 하지 그랬냐.
번태의 팀원은 모두 어둑시니 길드원이었다.
그들은 번태가 난간으로 뛰어와 우렁차게 외치는 걸 박수 반 포기 반으로 맞아주었다.
“다들 잘 지냈나!”
함성이 대신 대답했다. 헬멧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누가 봐도 옐로가 번태였으니 말이다.
“이번 윷놀이 행사에선 1차, 2차 각성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각성자가 즐겁게 놀 수 있길 바라네! 불타는 정의! 뜨거운 열정은 덤이지!”
“번태맨!”
“꺄악! 길드장님 최고예요!”
“재밌다! 멋있다아!”
번태의 아무 말에 화답하는 소리가 드높았다.
인기 좋으시네.
사회자가 익숙하게 말을 받았다.
“번태 길드장님의 후원으로 이번 행사는 비각성자도 즐길 수 있게 온오프 동시 생중계로 진행됩니다!”
부우웅.
날아다니는 드론이 동그라미를 그리더니 조명을 깜박였다. 중계할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있다는 뜻일 터다.
헬멧을 쓴 덕분에 사방에서 번쩍거리는 빛에도 눈이 부시질 않았다.
“다음으로 거어얼~팀! 그린 팀장님 나와 주시죠!”
한 번 얼굴을 본 적 있던 랭커가 쭈뼛거리며 나왔다. 초록색 쫄쫄이를 입고 헬멧을 쓴 그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부끄러워 보였다.
“잘, 잘 부탁드립니다.”
그린의 팀원은 대부분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아마 일반적인 랭커나 지인을 모집해 온 듯 했다.
[그래도 숫자는 승지 팀보다 훨씬 많잖아! 조심해야겠어!]
성좌가 열심히 수를 셌다. 달랑 세 명을 데려온 승지와 달리 다른 팀은 최소한 열댓 명 이상씩은 팀원을 데려왔던 것이다.
숫자가 많으면 유리하다고 했던 말 때문이다.
[번태 아저씨가 작전이랑은 상관없이 일등하면 진짜로 무기를 준다고 했었잖아! 승지는 정말 무기 탐 안나?]
“글쎄, 진다고는 안 했다.”
[꺅! 승부욕! 너무 멋있어잉!]
“그 다음은 윷팀! 블루 팀장님이십니다!”
난리를 치던 성좌가 잠깐 조용해졌다. 류의건이 등장할 차례였던 것이다.
이미 뉴스를 통해 파랑 쫄쫄이가 류의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관객들도 덩달아 숨을 죽였다.
삐걱. 문을 열자마자 아까 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류의건! 류의건!”
“꺄아아아악!”
“오빠아악! 어디 갔다가 이제와아악! 너무 멋있어어!!”
약간 당황했는지 류의건이 헬멧을 쓴 채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성좌도 류의건에게 환장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쩜! 같은 쫄쫄이를 입었는데도 느낌이 살 수가 있지? 어깨가 달라! 아웅! 헬멧 밑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아!]
“너 나랑 계약 파기할래?”
[아잉! 승지도 진짜 진짜 멋있지! 승지는 나만 알고 싶은 멋있음이란 말이야!]
웃기고 있네.
류의건의 팀원은 그들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자랑했다. 응원석에 빽빽하게 찬 각성자들이 류의건을 올려다보느라 밀려날 정도였다.
“저거 진짜 아무나 다 뽑았나.”
[응? 에이~ 다 작전이지! 알잖아!]
알러트 본진에 잠입하는 임무는 지금 모인 팀장 중에서도 딱 셋만 알고 있었다.
많은 수가 알아봤자 좋을 게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모 팀장, 고등학생 블랙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는 작전 때문에 억지로 쫄쫄이와 헬멧을 착용하거나 그저 랭킹 1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 입은 그린과 다른 점이 있었다.
콰앙!
대차게 문을 걷어찬 블랙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고등학생다운 치기를 듬뿍 뿜어내며 휘리릭 난간 위로 올라갔다.
포즈를 곁들여서.
“이 몸 등장!”
저 새끼도 관종이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