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작전 본부 (2)
“마음에 안 들어.”
거울 앞에 선 승지가 불만스럽게 내뱉었다. 성좌가 금세 띠링하고 나타났다.
[왜애? 난 괜찮은 거 같은데.]
승지는 떨떠름하게 거울을 노려보았다.
“만만해 보이잖아.”
거울 속에 비친 승지의 머리카락은 본연의 색으로 돌아가 있었다.
염색할 때를 놓쳐서 지저분해지긴 했지만, 다시 염색한다면 까만색이 아니라 빨간색이 좋았다.
최자림은 혹시나 다른 연합 길드한테 들킬지도 모르니 승지가 따라간다면 꼭 변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충 모자랑 마스크 쓰면 되잖아?”
“아니죠! 길드에 들어가려면 분명히 신분 검사를 할 텐데 그 때도 가릴 수 있겠어요?”
“확실해?”
“그렇다니까요!”
마지못해 승지가 승낙하자 또 신이 난 최자림은 염색약까지 사서 돌아왔다.
“머리만 달라져도 사람 인상이 확 달라지죠!”
“그렇긴 한데.”
막상 까맣게 돌아간 머리카락을 보니 어색했다.
…옛날 생각나네. 젠장.
별로 좋은 추억이 없는 과거가 떠오른 승지가 수도꼭지를 꽉 잠갔다.
“허억!”
아침 샤워하는 김에 염색까지 마치고 나온 승지를 목격한 최자림이 기겁했다.
“스, 승지 씨?”
“뭘 그렇게 놀라. 내가 귀신이냐?”
“세상에… 승지 씨 의외로 빨간 머리가 아니니까 순해 보이시네요. 너무 마음에 드는데요!”
“꿈도 꾸지 마라. 넌 내 취향 아니야.”
“하윽 싸늘한 말투까지! 저 지금 두근거렸어요.”
최자림이 심장을 부여잡으며 주접을 떨었다. 그가 내지른 고성에 서명구가 피곤한 얼굴로 방문을 열었다.
“최자림 각성자님 아침부터 또 무슨… 으악!”
그렇게 소리를 지를 정도냐고.
승지가 떨떠름하게 서명구를 쳐다보았다. 당황한 서명구가 허둥지둥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와… 채승지 각성자님이셨군요. 그러고 계시니까 무지하게 어려보이시네요.”
“애새끼 같다고?”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쿠후후훙! 괜히 성질내긴. 쑥스러워, 승지야? 이건 승지가 귀엽다는 뜻인걸!]
“시끄러.”
아예 정색까지 한 승지가 질색을 했다.
에잇. 젠장. 이래서 염색하고 다니는 거였는데. 왜 하필 수염도 안 어울리는 얼굴로 태어난 건지.
어릴 때의 승지는 덩치도 작고 성질도 더러워지기 전이라 저렇게 만만하게 보는 인간들이 너무 많았다.
역시 사람은 기선제압이 중요해. 첫 인상부터 팍!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어야지.
승지는 그런 의미에서 평범한 얼굴이 딱 질색이었다. 못생겨도 좋으니 험악하거나 근육이 울룩불룩하거나 털이 많아야지.
내 집처럼 냉장고를 열어본 승지는 뭔지도 모를 식재료에 인상을 썼다.
“여기서 요리할 줄 아는 인간?”
“저요!”
“댁은 빼고.”
최자림은 뭘 잘한다고 해도 의심스러웠다. 서명구도 요리엔 소질이 없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돈 많은 놈이면 보통 가사 도우미 같은 거 있지 않냐? 요리도 막 해주던데.”
“불러드릴까요?”
류의건이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어우 씨 깜짝이야.
“인기척 좀 내고 다녀라.”
“다들 좋은 아침입니다.”
류의건도 이제 승지에게 익숙해졌는지 쉽게 흘러 넘겼다.
“승지 씨 염색 정말 신기하네요. 인상이 완전히 달라지셔서. 다른 분들도 못 알아볼 겁니다.”
“그래야지. 그러라고 한 염색인데.”
물론 랭킹 1위 영입만 끝나면 당장 빨간 색으로 바꿔버릴 거다.
배가 고픈 승지는 하이에나처럼 이리저리 부엌을 헤집고 다녔다.
아니지, 집주인이 있잖아?
“마침 잘 됐네. 류의건. 온 김에 부자들 먹는 음식 좀 해봐. 그동안 금수저는 뭐먹고 사나 궁금했는데 잘 됐다.”
“부자라고 해도 먹는 음식이 딱히 다르지 않은데….”
류의건이 멋쩍게 웃으며 칼을 잡았다.
“크으, 요리하는 남자. 멋있죠.”
“또 딴 소리 하지 마시구요. 유청 각성자님은 아직 자고 계세요?”
“글쎄. 아까 욕실에서 쿠당탕 하는 소리는 들리더라. 씻느라 고생인가 봐.”
어리둥절해하던 명구가 뒤늦게 잘린 유청의 팔을 떠올리고는 입을 가렸다.
“헉… 맞다, 팔…! 제가 도와드리러 가야 할까요?”
“됐어, 그 자존심에 명구 네가 도와주면 더 화날걸.”
최자림이 태평하게 얘기했다. 유청을 잘 아는 듯한 말투에 승지는 문득 팔을 잘랐을 때 일이 떠올라 물었다.
“근데 저번에 유청 얘기는 뭐냐? 넌 이해할 거다 어쩐다 했잖아.”
“후훗. 그거요? 유청 씨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이제 승지 씨 머슴인데 말을 안 하겠어요?”
“캐내기 귀찮아. 대충만 알면 돼.”
“흠, 그러면 세 줄 요약 해드릴게요. 유청 씨는 마왕한테 발렸다. 알러트도 엄청나게 증오한다. 둘이 같이 엮인 일 때문에.”
“최자림 각성자님!”
“왜, 맞잖아.”
“그걸 막 얘기하시면 어떡해요!”
“예. 제가 없는 자리에서 제 얘기 하지 마십시오.”
유청이 다소 초췌해진 몰골로 나타났다. 아무리 각성자라도 하루아침에 잘린 팔에 적응하긴 어려웠던 모양이다.
승지가 인사 대신 턱을 까딱였다.
“어이, 머슴. 주인보다 늦게 일어나면 되겠냐? 앞으로는 네가 깨우러 와라.”
“……알겠습니다.”
이젠 자포자기했는지 유청이 순순히 대답했다.
[우앙, 노예가 얌전해졌네! 좋아좋아!]
성좌도 달라진 유청을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요리를 끝낸 류의건이 접시를 달각 내려놓았다.
“아침 다 됐습니다. 다들 와서 드세요.”
“와! 맛있겠네요!”
“잘 먹겠습니다!”
“음.”
노릇하게 구워진 버섯과 계란이 올라간 토스트를 본 승지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부자들은 아침에도 고기 먹을 줄 알았다. 영화에선 짜장 라면에까지 고기를 넣어 먹었잖아?
그래도 본인이 한 음식이 아니기 때문에 승지는 군말 없이 먹었다. 뜻밖에도 맛있는 게 신기했다.
뭔가 보통 먹는 것보다 물렁하군.
승지가 알아낼 수 있는 차이점은 이정도가 최선이었다.
“맛있네.”
“아, 다행….”
“그보다 지금 어둑시니 길드장 위치는 파악됐냐?”
금세 관심이 사라진 승지가 우물거리며 물었다.
“대충은요?”
“어둑시니 길드장은 대부분 던전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해요.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봉사활동이나 미션에서 자주 나타난다고 하니 결국 타이밍이 관건이죠.”
“어둑시니 길드원이 협조만 해주면 바로 만날 수 있단 얘기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할 건 없을 거예요.”
“승지 씨. 글라세로의 저주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승지가 우물거리며 상태창을 띄웠다.
[ 글라세로의 저주 진행도 : 67/100 ]
“23일 정도 남았네. 중간에 글라세로가 보낸 몬스터랑 마주치면 여기서 더 짧아지고.”
“별로 여유롭진 않군요.”
류의건은 바로 길드로 이동할 수 있도록 차량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너무 눈에 띄지 않도록 리무진은 아니었다.
그래도 포르쉐였지만.
글라세로 대책 본부는 세 팀으로 갈라졌다.
“오늘 승지 씨랑 의건 씨는 어둑시니 길드. 청이 씨는 청월량 길드. 저희는 미스핏 길드로 갑니다. 절대로 이번 계획 노출되지 않게 조심해주시구요.”
“각자 최대한 많이 끌어들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최자림은 하이파이브를 하려고 했지만 유청의 노려보는 눈빛을 받고는 취소했다.
아무튼 그들은 본격적인 싸움을 위해 파티원을 수집하러 흩어졌다.
승지는 어둑시니 길드로 가는 차 안에서 문득 물었다.
“랭킹 1위랑 많이 친하냐?”
“예?”
“네가 랭킹 2위잖아. 다른 길드장 놈들이랑은 꽤 알고 지내는 것 같던데.”
마치 어색한 아버지와 아들이 나누는 듯한 대화에 류의건이 난감한 표정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그다지 친분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미션 때만 협력하는 관계일 뿐… 승지 씨 일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정작 중요한 순간엔 선을 그으니까요.”
“그럼 미션 때문에 협력한 것도 아닌 나한텐 왜 잘해주는 건지 더 모르겠는데.”
순간 멈칫한 류의건이 승지를 돌아보았다. 좀처럼 속내를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승지가 말했다.
“어차피 남이면 쓸데없이 죄책감 가지지 마라. 괜히 네 페널티만 늘어나지.”
“……승지 씨는 좀 다릅니다.”
받고 싶은 게 있고, 받은 게 있어서 조심하게 되는 관계랄까.
류의건은 승지에게 자신이 관리소에서 그가 페널티 스킬을 가진 걸 확인했다는 사실을 말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류의건은 바라는 걸 먼저 말하지 않도록 교육받았다.
어떻게 보면 채승지는 정말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한 부분이 있는 듯 했다.
까맣게 머리를 내린 승지의 옆얼굴은 오히려 동생처럼 보일 만큼 어려 보였지만 말이다.
류의건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사실 제가 승지 씨보다 연상인데….”
“어이쿠! 벌써 도착했네. 내리자.”
승지가 후다닥 문을 열고 내뺐다.
뭐냐. 설마 이제 와서 형님 소리 듣고 싶어 하는 건 아니겠지.
누가 먼저 나이 얘기를 꺼냈을 때 좋은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미리 피해놔야지.
어둑시니 길드는 이름과 달리 아주 채광이 좋은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
미술관처럼 생긴 외관은 탁 트인 출입구로 이어져있었다. 게다가 방문객을 엄청 환대해주기까지 했다.
“어둑시니 길드에 잘 오셨습니다! 각성자분은 이쪽으로, 비각성자분은 저쪽으로 가서 출입증을 받아주시겠어요?”
“각성자용 두 개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네에!”
유니폼까지 차려입은 어둑시니 길드원이 입구에서부터 반겨주었다. 예상했던 검문조차 없었다.
목걸이 형태의 출입증을 받은 승지가 물었다.
“여긴 원래 분위기가 이래?”
“보안이 허술하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죠.”
류의건이 출입증을 걸자 특유의 생김새와 어우러져 잘나가는 대기업 신입 사원 같은 느낌을 풍겼다.
반면에 자신은 아무리 잘 봐줘도 인턴 꼴이다.
뭐, 그래서 류의건이 대신 눈에 띄어주니 다행인가.
어둑시니 길드는 정말 많은 방문객들이 있었다. 비각성자는 물론, 미스핏에서 언뜻 본 각성자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을 의식한 승지가 살짝 모자챙을 내렸다.
다행히 그들은 먼발치에서 본 승지를 빨간 머리로만 기억했는지 코앞까지 와도 알아보지 못했다.
“류의건 각성자님! 안녕하십니까.”
“정말 간만에 뵙네요.”
“저도 반갑습니다.”
“같이 오신 분은?”
“제 동료입니다.”
“그나저나 류의건 씨. 다음 메인 미션이 마왕 소환이라는 소문이 돌던데 사실일까요?”
“아… 그건.”
류의건을 본 각성자들은 하나같이 지나치지 못하고 말을 걸었다. 비각성자들은 그마저도 시도하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동경하는 눈빛으로 훔쳐보기만 했다.
같이 다니기 귀찮군.
승지가 시선을 돌렸다. 마침 하와이안 셔츠 유니폼을 입은 길드원이 지나가기에 그가 어깨를 잡았다.
“어둑시니 길드장은 언제쯤 돌아오는지 압니까?”
“네네? 글쎄요. 곧 오실 때가 됐는데, 중요한 일이면 소환해드릴까요?”
“길드장을 소환할 수가 있습니까?”
놀란 승지가 묻자마자 하늘에서 갑자기 토끼 인형이 마구 떨어졌다.
광대의 소환 스킬이 소환이라는 단어에 반응해 발동해버렸던 것이다.
엉겁결에 인형에 파묻힌 길드원이 질겁했다.
“엄마야!”
“아, 실수! 미안합니다!”
채승지가 당황해서 떨어진 인형을 주웠다. 젠장 이런 스킬이었지. 까먹고 있었다.
당황한 승지가 앙증맞은 인형을 빠르게 주웠다. 반응 속도는 경이로웠지만 대신 양 손에 잡은 인형이 터질 듯이 꽉 차고 말았다.
아, 스발. 이걸 어따 써.
승지가 여전히 토끼 눈을 뜬 길드원을 보며 슥 손을 내밀었다.
“…선물로 드릴까요?”
[푸웁….!]
웃지 마, 인마.
공교롭게도 스킬로 나타난 도구로 웃긴 장면을 연출해버려서 기껏 내민 인형마저 펑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타이밍 진짜 미친다.
얼떨떨하게 그걸 다 보고 있던 길드원이 의아하게 박수를 쳤다.
“와, 마술사 각성자신가 봐요.”
“좀 다른… 아니. 맞네요. 대충 그런 걸로 해둡시다.”
[모야아~! 광대라고 제대로 말해줘!]
시꺼.
아무튼 바보짓에 호감을 샀는지 경계를 푼 길드원이 웃으며 말했다.
“어둑시니 길드원이면 누구나 길드장님을 소환할 수 있거든요. 물론 정말정말 중요하고 위급한 상황에서만 써야하지만요!”
“잘됐네. 이건 정말정말 중요하고 위급한 상황이니까.”
승지가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하려던 찰나.
띠링!
[ 메인 미션 발생! ]
승지를 쫓아온 글라세로의 추적자가 다시 한 번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