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뇌물 공세 (1)
정신을 놓고 누워있었던 승지가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풍경이 바뀌어서 적응이 되질 않았다.
상승하던 배와 별이 가득한 까만 하늘은 어디로 가고 다시 방 천장이라니.
한바탕 꿈을 꾸고 일어난 것처럼 승지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어라?
승지가 양 손을 펴보았다. 너무 오랜만에 자기 의지대로 몸이 움직여지니 낯설었다.
“페널티 끝났네?”
[다른 세계에 다녀온 만큼 시간이 지나서 그런가 봐!]
성좌의 말에 승지는 휴대폰을 꺼냈다. 역류 스킬을 쓰기 전에 시간을 본 건 아니었지만 대충은 날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이 지나진 않았는데.”
[튜토리얼 때랑 똑같아. 승지는 잠깐 내가 만든 세계 속에 들어왔었던 거야.]
역류했으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던 승지가 되물었다.
“그럼 평소에는 네가 내 세계 속에 있다는 거냐?”
[그러니까 내가 승지의 성좌지!]
성좌가 태연하게 말을 받고는 조심스럽게 대화창을 넘겼다.
[그런데… 어디까지 본 거야? 승지가 기억을 보는 동안 난 간섭할 수 없었어.]
“대충 볼 건 다 봤다.”
승지가 무지근한 이마를 문질렀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건을 봤더니 머리가 아팠다.
“다나우라는 여자랑 둘이 도망치고 마왕을 때려잡고 이야기가 끝났어야 했는데. 왜 너네 둘까지 마왕으로 빠지고 성좌가 된 거냐?”
[웃음의 마왕은 살아있는 게 아니거든. 완전히 없애버릴 수가 없었어.]
성좌가 애매하게 말꼬리를 늘렸다.
[연결도를 많이 소모한 게 아니라서 뒷부분까진 안 나왔나봐. 일이 좀 생겨서 다나우랑 나는 제국으로 간 뒤에도 십 년 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어. 마왕은 그 때 이후로 되려고 한 거야.]
똑똑똑!
“크흐흠!”
자기를 잊지 말아 달라는 듯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헛기침까지 해댔다. 그제야 승지가 바깥쪽에다 소리쳤다.
“들어 와!”
재판 전까지는 죄인 취급이더니 이제 와서 예의를 차리는 것도 우습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인간도 그걸 아는 지 태도가 정중함과 어색함의 중간이었다.
“방을 옮겨주시랍니다.”
“아, 드디어?”
승지가 삐딱하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재판에서 던진 떡밥에 슬슬 입질이 올 때도 됐지.
은근한 뇌물이 먼저 올 줄 알았더니 방을 바꿔주기까지 하는 걸 보면 좀 더 높으신 분들이 행동에 빨리 나선 것 같았다.
“그래, 알았다.”
“따라오시죠.”
그를 따라가며 승지가 물었다.
“이제 내 신분이 어떻게 된 건가? 재판이 끝난 건가, 아니면 손님이 된 거야?”
“원래부터 참고인 자격으로 재판에 참석하신 겁니다. 지금은 오해가 풀렸으니 더는 운신할 곳을 제한할 필요가 있지요.”
웃기고 있네.
“그리고 지금은 단순한 손님에서 추가로 접대할 위치까지 넘어간 거고?”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문을 열었다.
“비슷합니다. 지금부터는 제 주인님의 호의거든요.”
배에서 쓸 수 있는 공간은 한정적이다. 그만큼 부피가 크고 호화로운 방일수록 대접이 후하다는 반증이 될 터.
승지에게 호의를 보이기로 한 주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제대로 선심을 쓰기로 한 모양이다.
방금 전까지 널빤지 하나만 깔려있던 방을 정확히 두 배로 확장시킨 다음에 가구가 들어갈 자리까지 확보한 호화로운 선실이었다.
“나쁘지 않네.”
승지가 방을 쭉 둘러보았다.
“네 주인이 배 주인이냐?”
“이 배를 소유하진 않으셨지만 호의를 제공할 만큼은 여력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에둘러 표현하려고 했으나 귀족식 말하기가 귀찮은 승지가 대놓고 깠다.
“고작 방 하나 바꿔줬다고 거래를 틀 생각은 아니지? 한 놈만 보고 팔긴 좀 그런데.”
“물론 이게 다가 아니죠.”
그가 비굴하게 웃어보였다.
“주인님께서는 신의를 보이기 위한 선금으로 금괴 500개를 약속하셨습니다. 거래의 대가가 아니라, 먼저 계약을 하는 권리로써 말이죠.”
[허억! (oOo)! 500개!]
단순한 성좌가 금세 입을 쩍 벌렸다.
[승지야! 계약을 안 하는데도 금괴를 준대! 일단 만나만 보자!]
그것도 나쁘진 않지. 승지는 고려해보았다.
먼저 접근한 걸 보니 이문 계산이 빠른 놈이고, 돈도 제법 있는 것 같지만.
절박하게 빨리 접근하는 인간일수록 사실 사정이 급하다는 걸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지금 아니면 못 한다느니, 여기 인원이 넘쳐서 당장 대답안 하면 다른 사람한테 맡긴다느니 하는 일자리에 들어갈 때마다 독박을 쓰는 건 항상 자신이었다.
한두 번 낚여보냐.
진짜 급전 필요한 것도 아니고 최대한 비싸게 빨아먹을 건데 벌써부터 혹할 필요는 없지.
탕탕.
그 때 열려있던 문을 누군가 바깥쪽에서 두드렸다.
“잠깐 실례하지.”
승지와 덩달아 고개를 돌렸던 하인이 흠칫 놀랐다.
“여길 어떻게…!?”
“손님을 원래 있던 곳에서 옮긴다는 얘기를 들어서 말이야.”
딱 봐도 귀족처럼 보이는 자줏빛 머리카락의 인간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얘기 중인데 미안하지만 손님을 잠깐 빌려가도 되겠나?”
“그… 그러십시오.”
하인이 바로 머리를 조아렸다.
오, 권력자.
승지가 그를 훑어보았다. 성좌가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어쩐지 낯이 익은걸?]
나도.
승지도 마음속으로 동의했다. 자주머리는 하인을 내보내더니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단 둘이 있어도 괜찮겠나?”
“뭐, 그러든지. 비리비리해 보이는데.”
그가 피식 웃었다.
“제국의 마검사를 우습게 보는 걸 보니 정말 멀리서 왔나보군.”
[어어어! 누군지 알겠다!]
성좌가 승지가 막 알아챈 사실을 소리쳤다.
[체자라의 후손인가 봐! 꺅! 세상에! 별로 안 닮아서 머리카락이랑 마검사라는 얘기에 겨우 알아봤어!]
성좌의 기억 속에 나왔던 금테 안경보다 훨씬 더 마르고 칙칙한 인상이었다.
알고 나서 보니까 좀 닮았는걸. 말투도 그렇고.
승지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보는 걸 보니 제국의 마검사에 대해서 아주 모르는 건 아닌가보지? 난 체르마라고 하네.”
“무슨 제안을 하러 온 거지?”
“당연히 그대가 재판 중에 대담하게 선언한 말이지 않겠나.”
딱딱한 공무원 느낌 그대로 체르마가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본래 제국인이 옥새를 습득했다면 다른 협상이나 보상의 여지없이 바로 황제 폐하께 반납하는 것이 옳네.”
“난 제국 사람 아냐.”
“알고 있네. 그래서 정당한 보상까지는 동의하는 바야.”
체르마가 의외로 정중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어떤 대가를 받든 넘기는 대상은 주의할 필요가 있지. 그리고 가급적이면 내게 넘기는 것이 옳다고 설득하러 왔다네.”
승지는 일단 솔직하게 자기 목적을 깠다는 점에선 가산점을 주었다. 하지만 예로부터 공무원한테 물건을 파는 건 손해가 막심한 일이 아니던가.
승지가 팔짱을 꼈다.
“내가 주운 게 그렇게 싸구려는 아니잖아?”
“아까 그에게서 꽤 높은 대가를 받기로 했나보지?”
“거래 자리에 앉는 데만 금괴 오백 개. 본격적인 가격이 좀 기대되더군.”
넌 얼마나 줄 건지 보자.
하는 심산으로 던진 승지의 말에 체르마가 선선히 웃었다.
“난 행성 하나를 주지.”
[!!!]
승지의 미간이 움찔했다. 체르마는 여유를 잃지 않으며 계속 밀어붙였다.
“작은 행성도 아니야. 짧게 대가를 받고 끝내기엔 옥새는 너무도 귀한 물건이거든. 작위가 있는 별까진 내 힘으로 손댈 수 없지만, 그래도 자자손손 물려받을 재산이면 솔깃하지 않나?”
[미쳤어! 승지야 이건 무조건 받아야 해! 던전 하나만 해도 돈이 얼만데 행성 하나엔 던전이 얼마나 많이 나오겠어!]
승지도 예상치 못한 스케일에 내심 속이 술렁였다.
빌딩 하나만 가져도 승지가 사는 세상 기준으로는 역대급 재벌이었다. 행성을 가지면 그곳에서 생산되는 모든 재화가 자신의 것이 된다는 뜻인데.
이건 아예 작정하고 큰 회사를 통째로 넘긴다는 뜻이 아닌가.
과연, 이세계. 미리 해쳐먹은 게 많아서 넘기는 것도 크구만.
이것만 받으면 평생 일 안 해도 먹고살 수 있다는 거 아냐? 미션 같은 것도 다 필요 없어지잖아!
이미 반쯤 기울어진 승지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체르마가 능숙하게 조율했다.
“황제 폐하께 옥새를 직접 가져가도 이만한 대가를 받기는 힘들 거야.”
“그럼 넌 왜 이렇게까지 내놓는 건데?”
“나라에 바치는 헌신에 대가를 바랄 필요가 있나. 가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이네.”
체르마가 겸양을 떨었다. 그러나 승지는 너무 과도하게 충성심을 말하는 그를 보자 오히려 의심이 들었다.
“…그 별의 주인이 된다고 해도 전부 내게 되는 건 아니잖아?”
“걱정 말게.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그곳에서 나오는 물건이 전부 자네에게 귀속되도록 처리하지.”
“내가 어디서 온 줄 알고?”
체르마가 가볍게 받아 넘겼다.
“어디에 있든 계약을 끝내면 제국의 배는 당신을 향해 날아갈 수 있다네. 물론 자네도 대가로 받은 행성까지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조치할 테고.”
“그 별의 이름은?”
“나비스.”
체르마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표정관리를 얼마나 잘하던지, 성좌가 대화창을 띄우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행성을 받고 끝낼 뻔했다.
[어? 나비스는 우리가 있던 별 이름이야! 나랑 다나우가 탈출한!]
갑자기 자기 고향별 이름이 나오자 흥분한 성좌의 대화창이 커졌다.
승지의 눈이 잠깐 가늘어졌다.
“잠깐 생각할 시간을 주겠어? 제안은 많이 받을수록 좋은 법이잖아?”
“물론이지.”
자기보다 더 높은 가격을 부를 사람이 없다는 확신이 있는지 체르마가 순순히 물러났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조마조마하게 서성이다가 다시 바깥으로 나온 체르마를 보고 바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 저. 그럼 이제 저희 주인님 제안도!”
“나중에.”
승지가 그의 눈앞에서 문을 쾅 닫았다.
“성좌야. 너 거기서 탈출한 다음에 그 별로 다시 못 돌아갔다고 했었지?
[응.]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거냐?”
성좌가 대화창을 꾹꾹 눌러 펼쳤다.
[방금 제안은 잘 거절한 거야. 저 거짓말쟁이! 우리가 도망친 뒤로 그 별은 웃음의 마왕이 지배하는 땅이 되었어. 체자라가 봉인에 실패했거든.]
“모두 다 던전이 되었다는 뜻이구만.”
[응! 그러니까 저 사람이 말한 대로 매년 행성에서 쏟아져 나오는 재산을 받는 건 불가능해!]
성좌가 열렬하게 말했지만 승지는 여전히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런데 난 어차피 각성자라서 던전이면 오히려 좋은 거잖아?”
[……어? 어라? 그런가?]
성좌가 아리송하게 대화창을 기울였다.
[확실히 승지한테는 던전이 더 좋을지도 몰라! 안정적으로 사냥을 갈 수 있는 곳이 생기면 강해지는 데도 도움이 될 테고, 돈도 돈대로 나올 테니까!]
“그리고 가장 좋은 건 상대방은 내가 그냥 던전이 되어버린 행성을 가져도 이득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거야.”
승지의 눈이 번뜩였다.
어디서 하자가 있는 물건을 선심 쓰는 척 넘겨주려고?
잘만하면 그냥 옥새를 넘기는 것보다 더 좋은 거래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