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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쓰레기장 전투 (3)

승지는 유월에게 받았던 포션으로 마스크와 손을 씻어냈다. 다쳤던 부위가 회복되었지만 독은 해독하지 못했는지 약간 손이 아릿했다.

일부러 짝하고 손바닥을 부딪친 승지는 둔해진 감각을 무시했다.

이렇게 된 이상 작전이고 핵이고 다 필요 없어.

승지의 눈이 살짝 돌았다.

나한테 필살기가 있잖아?

마왕에다 들이박는 게 꼭 무모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어쨌든 각성자를 만든 건 성좌신이고, 바로 그 성좌신이 준 스킬이 필살기만 쓰면 목표의 완전 제거가 가능하다고 약속했다.

물론 이런 승지의 계획을 다른 사람이 알면 미쳤다고 펄쩍 뛰겠지만. 승지는 정말로 필살기만 박을 수 있으면 자신이 마왕을 퇴치할 수도 있다고 믿었다.

문제는 승지의 지능이었다.

분명히 멀리서 볼 때는 저 더럽고 지저분한 마왕을 박살내고 싶다는 생각만 치솟았지만,

정말로 공격하려는 마음으로 접근하려고 하면 도저히 다가갈 수가 없었다.

드글드글한 몬스터 탓이 아니었다.

압도적으로 높은 마왕의 스탯은 감히 하등한 자의 접근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승지의 스탯은 지금 마왕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사냥하는 각성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았다.

아무리 승지가 달려들어 공격하고 싶어 한들 육체가 마왕의 상대를 거부하며 도망치려 드는 것이다.

그건 사람이 아니라 성좌와 계약한 각성자로서의 본능이었다. 아니, 웃기는 소리지. 애초에 각성하지 않았다면 이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버티지도 못했을 테니까.

“빌어먹을.”

초조해진 승지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왜 이만큼이나 거리가 먼 거야?

빠드득. 승지의 어금니가 세게 갈렸다.

실력의 차이가 아니라 의지의 차이라며? 이딴 일은 노오력만 하면 극복할 수 있는 거 아니었냐고.

지금까지 랭커들과 싸우면서 잊고 있던 자신의 출발점이 절절히 느껴졌다.

분명 자신은 이제 막 달리기 시작한 각성자치고는 충분히 대단하다. 각성한 지 2개월도 되지 않았는데 여기 마왕전까지 나와서 싸울 정도면 다들 구라 치지 말라고들 할 거다.

하지만 정작 본인에겐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싸우려면 눈높이부터 똑바로 맞춰야 할 거 아냐.

형형해진 승지의 눈이 글라세로의 흉측한 머리에 고정되었다.

저 대가리와.

[승지야!]

막 움직이려던 승지의 눈앞으로 대화창이 확 뛰어들었다.

“야, 이! 너! 이딴 식으로 튀어나오지 말라고!”

[미안!!! 근데 류의건이 왔어!!]

성좌가 류의건을 마치 지원군, 구원투수,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비슷한 단어처럼 발음했다.

하지만 승지도 순간 비슷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큰 벽에 부딪쳐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왔냐!”

승지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만큼 류의건의 등장이 반가웠던 것이다.

“빨리도 온다, 짜식!”

승지는 류의건이 약속대로 코스모스 센터와 함께 입구 쪽을 정리하는 걸 보고는 뺨을 짝짝 때렸다.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서였다.

“성좌야, 너 지금 여기 상황 좀 상태창으로 바꿔서 보여줄 수 있겠냐? 맨날 쓸데없이 보내는 이모티콘처럼!”

[ㅇㅁㅇ? 아하! 미니맵을 원하는 거구나!]

“어! 바로 그거!”

승지보다 더 게임에 통달한 것처럼 성좌가 대화창을 크게 확대했다.

좋았어! 진작 이렇게 할걸!

성좌의 시야로 확보한 현장 지도는 완벽하게 실시간으로 맞아떨어졌다.

새까만 타원 주변을 돌아다니는 노란 점은 번태와 어둑시니 길드원이었고, 그 앞에 바짝 붙은 빨간 점이 유월이었다.

입구 쪽에 있는 푸른 점은 분명히 류의건일 테고 말이다.

“이 흰 점들은 누구냐?”

[별도 멤버들이야! 싸울 수 없는 부상자랑 미스핏 길드의 서명구. 아, 그리고 유청도 포함했어!]

성좌도 유청은 전력으로 치지 않는지 유월과 같은 빨간 점이 아니라 흰 점으로 표시를 해놓고 있었다.

“…잠깐만.”

미니맵 속에서 이리저리 쓸려나가는 까만 점들을 보며 승지가 생각에 잠겼다.

막상 미니맵을 보자 푸른 점이나 노란 점이 아니라 유월이 있는 붉은 점에 시선이 갔다.

열심히 승지의 동공 움직임을 보고 있던 성좌가 갸우뚱하고 물었다.

[유월을 도와주러 가려고? 글라세로의 핵을 찾으려면 그게 제일 좋긴 하겠지만….]

“아니.”

승지는 자신이 마왕에게 접근조차 안 된다는 사실을 까먹은 성좌에게 말했다.

“머슴을 데려와야겠다.”

* * *

류의건은 내심 코스모스 센터가 이번 마왕 토벌전에 따라올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던전에서 갓 나온 각성자들의 패닉이 심했던 것이다.

평범한 각성자들이 던전에서 쇼크를 받은 건 몇 번 보았지만 그는 장애인들과 함께 싸워본 적은 없었다.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격렬한 반응에 더욱 당황하고 책임을 지려고 했었다.

그러나 오조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을 수습하고는 심지어 전장까지 이끌었다.

물론 그들이 글라세로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만큼 강한 각성자들은 아니었다. 다만 최소한 외곽에서 전선을 유지할 만큼의 힘은 되어주었다.

비밀로 토벌전을 진행하는 지금은 그런 도움마저도 절실했다.

때문에 류의건은 자꾸만 초조해져갔다.

자신이 뭐라고 이들을 책임지려고 했단 말인가. 랭킹 2위라서? 은연중에 무시한 것은 아니었나? 그들을 무조건 지켜줘야 하는 대상으로 보느라 정작 함께 싸울 동료로 보지 않다니.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몬스터를 베어내는 류의건의 검이 자꾸만 휘었다.

이런 생각은 분명히 알아서 페널티를 늘리는 짓임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가 없었다.

내게 정말 이 힘을 가질 자격이 있나?

퍼엉! 신성 마법을 담은 검이 글라세로의 용을 긋자 사방으로 점액이 튀며 용이 몸부림쳤다.

이미 내가 가진 것도 너무 많은데 여기서 제대로 다루지도 못할 성좌의 힘과 운명까지 감당하라니.

류의건은 그래도 억지로 검을 휘둘렀다. 쩌렁쩌렁한 채승지의 고함이 들리기 전까지.

“머스으음!! 어디 있냐!”

“…채승지 씨?”

류의건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글라세로 쪽에서 몬스터를 헤치고 온 채승지가 성난 얼굴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왜 갑자기 여길.”

“잡던 거 마저 잡아.”

채승지가 대충 손을 내저었다. 얼떨결에 류의건도 대충 검을 휘둘러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힘 조절에 실패했다.

앗, 이런.

콰앙!

잠깐 조절하지 못한 신성 공격에 직격당한 용이 폭발했다. 후두둑 떨어지는 독액을 본 각성자들이 황급히 대피했다.

당황한 류의건이 서둘러 정화 마법을 거는 동안 채승지는 뒤로 빠져있던 유청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너 여기 있을 줄 알았다, 자식아. 왜 대답 안 해?”

“또 뭡니까?”

“너 정말 유월만큼 세냐?”

도발적인 질문에 유청이 금세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다.

“더 강합니다.”

“팔 잘린 새끼가 존심은. 아무튼 너도 그럼 마왕 앞까지 갈 수 있다는 거네. 유월처럼.”

“그렇다면?”

채승지가 척하고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업어라.”

“????”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유청의 표정이 해괴해졌다. 얼이 빠진 건 옆에서 계속 싸우던 류의건도 마찬가지였다.

“업…는다니?”

“방금 팔 하나 없다고 욕한 사람은 어디라도 간 모양입니다?”

“말 꼬지 말고 새꺄. 다른 팔은 있잖아. 힘 스탯 헛 키운 것도 아닐 테고. 나 하나 못 드냐?”

욱할 뻔한 유청이 너무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들은 나머지 이성을 되찾고 말했다.

“굳이 도발하지 않아도 하라면 합니다. 보증선 거 안 잊어버렸으니까. 문제는 당신이 뭘 하려는 거지.”

“은근슬쩍 말 놓네. 귀 열고 딱 들어라.”

채승지가 비장하게 말했다.

“내가 마왕을 잡을 거다.”

“미쳤습니까?”

“돌으셨군요!”

“좋아, 반응 끝내주네. 류의건 댁까지 그럴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이래도 과연 미친 소리일까?”

채승지가 설명한 마왕을 없앨 스킬은 1차 각성자인 두 사람이 듣기에도 특이한 스킬이었다.

필살기라니.

완전하게 대상을 제거한다니?

대부분의 스킬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얼마만큼의 추가 데미지가 있다거나, 무슨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설명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채승지의 스킬은 단연코 이질적이었다. 수치가 아니라 조건과 결과가 정해진 스킬이라니.

가끔 채승지가 이상한 힘을 보여주던 게 저 스킬 때문이었구나.

내심 납득한 류의건이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안 됩니다.”

“씁.”

“아무리 스킬의 정의가 그렇다고 한들 그것을 실행하는 주체는 당신입니다. 스탯의 차이가 심하게 나면 통하지 않아요. 당신과 마왕이라면 더더욱.”

“나도 알아. 다른 스킬 써볼 때 느꼈으니까.”

채승지가 툭 내뱉었다.

“하지만 위력이 약한 것과 아예 통하지 않는 거랑은 완전히 별개잖아?”

“통할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스킬대로 이뤄지기만 하면 내가 이겨.”

“그래도 무모합니다.”

“이보세요. 난 이기는 것보다 싸우지도 못하는 상황이 더 열 받거든? 안 통하면 ㅈ빠지게 튈 테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말하다가 문득 채승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피식 웃었다.

“아, 물론 빠져도 내 거 말고 저 놈 게 빠지도록 뛰어야겠지만.”

“하. 진짜 표현 더러워서 상대하기가 싫습니다.”

“그게 머슴의 운명이다. 받아들여.”

너무 싫어서 치를 떠는 유청에게 채승지가 눈썹을 까딱였다.

“넌 싸울 생각도 말고 다른 행동을 할 생각도 하지 마. 그냥 머리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얌전히 업고 뛰기나 해.”

“그냥 죽이시죠? 피차 편하게.”

“아~ 류의건 보증 잘못 섰네. 이대로 네가 죽음으로 째면 결국 남의 빚 대신 갚는 건 누구려나? 아이고, 대한민국 민간인들 다 죽겠네~.”

“빌어먹을!”

유청이 으드득 욕을 내뱉으며 무릎을 굽혔다.

“쁠리 읍히시죠.”

“머슴아. 어금니 떼라. 소리가 샌다.”

채승지가 일부러 느릿느릿하게 업히자 유청이 빡치는 얼굴로 허리를 확 폈다.

그래도 랭커라고 한 팔로도 안정감 있게 업었네.

분명히 심각한 상황인데도 약간 웃겨서 류의건이 애써 몬스터를 잡는 데만 집중했다.

자신이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유청이 저렇게까지 채승지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건 잘 알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다면 누군가 한 쪽이 죽어야 했다. 일단 복수라는 말이 끼어들면 멈추기가 쉽지 않으니까.

적어도 죽음보단 낫지 않습니까. 미안합니다.

류의건이 속으로 사과했다. 그리고 세상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팔다리를 걱정해주는 유청이 결국은 정의롭다고도 생각했다.

방법은 좀 많이 틀리더라도.

유청이 체념한 얼굴로 업힌 채승지에게 물었다.

“그럼 콤보부터 쌓으러 가면 되는 겁니까?”

“아니, 그대로 글라세로한테 직진이다.”

콤보는 진작 쌓아서 메모라이즈 해뒀거든.

채승지는 유일한 장애물을 넘을 다리만 필요했을 뿐이다.

“혹시라도 내가 안 도망치게 꽉 붙들어라.”

자기가 업으라고 한 주제에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으로 올려다본 유청이 곧 이해하고 말았다.

그들이 상대해야할 마왕은 원래 지금 가려는 방향의 반대로 달려야 정상인 괴물이니까.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렇게라도 마왕을 상대할 수 있어서 기쁘다.

유청이 새삼스럽게 타오르는 증오심에 몸을 내맡겼다.

그가 승지를 업고 빠르게 지면을 박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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