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환영합니다 (2)
건방진 승지의 말에도 황제는 화내지 않았다.
황제는 외계인 대장답게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이름을 받아다 어디에 둘 건가.”
“제국이 지배하는 별마다 내 이름과 함께 보내. 황제의 가호로 온 손님이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달라고 말이지.”
“지원이란 건 무엇인가.”
“던전을 말하는 거지.”
쌕쌕거리던 황제의 몸이 조금 더 위로 들썩였다.
“그대에게 별의 복구를 맡겨달라는 건가?”
더 쉽게 말하자면, 던전 클리어다.
승지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내 일이거든.”
성좌신은 이세계를 복구한 자에게 영생과 소원을 약속했다. 대부분의 각성자들이 그걸 바라고 미션을 쫓아다녔다.
하지만 딱 한 명의 일등에게 주는 보상보다 다달이 나오는 월급에 더 높은 점수를 쳐주는 승지는 새로운 물주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원래 그냥 일확천금보다 따박따박 월급 나오는데 별도로 대박쳐야 마음이 더 편안~하지 않겠냐?
미션 보상만 받는 게 아니라 황제까지 보수를 챙겨준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받을 건 다 받아야지.
지난번에 거스 대왕을 주워온 별처럼 던전이 있는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면 병사를 같이 끌고 오거나,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거기서 얻은 재물은 다 내 거지만.
승지의 발언에 신하들이 당황했다. 그저 옥새를 전하고, 전달한 귀족의 명성을 좀 올리고 끝날 줄 알았는데.
별안간 운반자가 자기 몫을 달라고 나온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무시할 수 없는 제안을 가지고.
“광대의 입에서 나오는 희언입니다.”
“저런 보잘 것 없는 자가 어찌 몬스터를 소탕하고 영지를 되돌린단 말입니까?”
“황제가 주겠다는데 밑에 놈들이 뭐 이리 시끄러워?”
“저런 건방진!”
성질이 급한 귀족 하나는 아예 눈까지 뒤집어가며 열을 냈다. 승지 바로 옆에 서있던 체르마도 마찬가지였다.
차마 황제 앞이라 쌍욕을 할 순 없는지 그가 앙다문 입술로 웅얼거렸다.
“자네 미쳤나.”
“황제께서 물어본 말에 답했을 뿐입니다만?”
승지가 일부러 존댓말까지 써가며 살살 그를 긁었다. 체르마는 너무 어이가 없는지 욕을 참느라 목이 보랏빛이 될 정도였다.
황제는 잠깐 동안 꿀렁거리며 머리를 움직여보더니 피리 소리 같은 웃음을 냈다.
“좋다. 광대 하나조차 제국을 위해 일한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얼씨구? 누가 제국을 위해?
슬쩍 반발심이 들었지만 승지도 제 때 입을 다물 줄은 알았다.
황제가 손을 들어 승지에게 자신의 이름을 대신할 표식을 건네주었다.
메달이네.
메달에는 이리저리 꺾이고 교차한 직선이 세로축으로 길게 그려져 일곱 개의 모서리만큼 새겨져 있었다. 별 같기도 하고 탑 같기도 하고.
마패가 따로 없군.
승지가 메달을 품에다 집어넣었다.
“좋아, 흔쾌하네. 이런 황제 밑이라면 당신 신하들이 주기로 한 선물도 확실하겠어.”
“무슨 선물?”
“옥새를 찾은 기념으로 준다던 선물들 말입니다?”
승지가 최대한 순진하게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승지지만 가증스럽다!]
성좌가 경탄했다.
“우리가 언제…!”
승지는 두 번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성좌와 미리 약속해둔 물건을 스윽 꺼냈다.
“진주 한 상자를 주겠네.”
“원하는 무기가 있으면 말해보게. 내가 소유한 대장간은 모성에서도 알아주는 장인이….”
“다이아몬드!”
“……어?”
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승지가 꺼낸 스마트폰에는 배에 탔던 귀족들의 얼굴과 대화가 고스란히 찍혀있었다.
이미 파토 난 거래라도 버리면 쓰나.
승지가 씨익 웃었다.
귀족들과 대화하는 동안 승지는 스마트폰 녹화를 켜놓고 성좌의 인벤토리에 살짝 걸치도록 해뒀던 것이다.
그래서 성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인벤토리를 움직여 승지를 방문한 귀족들의 얼굴을 낱낱이 찍을 수 있었다.
[하하! 움직이는 광대의 CCTV!]
승지가 침대에 누워 계속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던 것도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고 영상을 편집하기 위해서였다.
“저… 저게 뭐야.”
“저런 걸 언제!”
“재미있는 물건을 갖고 있군.”
황제가 스마트폰에 관심을 보였다. 승지는 생생하게 재생된 귀족들의 목소리가 알현실 바닥으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었다.
황제가 마침내 귀족들에게 다시 관심을 돌리기 전까지.
“그대들이 이토록 제국을 생각하는 줄 미처 몰랐군. 원하는 대로 사례하라.”
“예에….”
귀족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했다. 황제한테 직통으로 확인 받았으니 사실 저거 옥새 산 걸로 한 자리 해보려고 했던 건데요, 하고 항의할 만큼 멍청한 인간은 없을 테니까.
그리고 제일 비싼 값을 주고 사긴 했지만 설마 다른 귀족들한테 여전히 보상을 뜯어낼 줄 몰랐던 체르마도 경악한 눈빛으로 승지를 흘끔거렸다.
[우리 승지는 양아치 짓을 해도 제대로 하는구나! 양아치 중의 양아치야!]
응, 고맙다.
황제는 건네받았던 옥새를 자기 살 속으로 집어넣어 간 곳을 모르게 만들었다.
“체르마. 그대의 공은 잊지 않겠다.”
“감읍할 따름입니다, 폐하.”
“이 일로 그대의 집안에 있었던 빚은 잊겠노라.”
“…….”
체르마는 그저 허리를 더 깊이 숙이기만 했다.
아하, 황제한테 뭐 죄 지은 게 있었나 보지? 어쩐지 비싸게 부르더라니.
황제가 다시 손을 들었다.
“오늘은 기쁜 날이니 모두 근심을 잊고 먹고 마시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 하옵니다, 폐하!”
그들이 외계인이라 승지가 알고 있는 말로 자동 번역되는 덕분에 아주 친숙한 대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오오, 인지 부조화.
사극과는 조금도 들어맞는 데가 없는 알현실을 따라 승지와 체르마가 황제의 앞에서 물러났다.
체르마는 황제를 만나기 전보다 훨씬 개운하고 건강해 보였다. 근심을 내려놓아서 그런 게 분명했다.
“어이, 약속대로 별은 내놔야지.”
“그 전에 하나만 묻겠다.”
체르마가 빳빳한 자세로 발뒤꿈치를 돌렸다.
“뤼에게 옥새를 보여주거나 넘긴 적이 있나?”
계속 신경 쓰는 게 뻔히 보이더니 결국 물고 늘어지는 군.
승지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자신이 검술에 문외한이라고 해도 칼로 손을 가져가면 대충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지 않겠냐.
불현듯 승지는 재판이 끝나고 뾰족 수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 값에 파는 것보다 누구한테 팔아야 자신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누가 봐도 수상쩍은 모래시계 대가리한테 배팅했어야 하나?
“그 쪽에다 팔 걸 그랬나.”
“무슨 소리냐. 절대로 안 돼!”
체르마가 목소리를 높였다가 급하게 낮췄다.
“폐하께선 그 자를 신뢰하고 있지만 난 도무지 믿을 수 없어.”
“왜?”
“…모든 사람들이 너무 그 자에게 호의를 갖고 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승지의 눈살이 구겨지자 체르마가 변명했다.
“아니, 누굴 그런 인기 없는 인간이 질투하는 소리나 지껄이는 사람으로 몰아가지 말게!”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호의도 자연스러워야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이지. …그 자는 모든 말이 거짓이다. 심지어 진짜 사실을 말할 때조차 거짓이라고 나올 정도로 수상해.”
뭔 헛소린가 싶었던 승지가 아, 하고 되물었다.
“너도 거짓말 탐지 스킬이 있냐?”
“……너도?”
체르마의 표정이 변했다. 그가 칼에서 손을 떼고 승지의 어깨를 잡았다.
“그게 무슨 뜻이냐. 나 말고 누가 그런 힘을 가진 걸 보았단 거야?”
“이거 놔라. 감출 생각 없으니까.”
승지는 귀찮게 틱틱 손가락을 튕겼다.
“네가 나한테 주려는 별 때문에 대충만 안다. 자식아.”
“별… 그럼,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체르마의 눈꺼풀이 훅 벌어지더니 양쪽 눈으로 넋이 빠져나가는 듯 했다. 고정 장치라도 고장 난 것처럼.
가까스로 충격에서 벗어난 체르마가 바르르 아래 눈 둔덕을 떨었다.
“잘 들어. 그 별엔 절대로 가지 마라.”
“엥? 그럼 왜 주겠다고 한 건지?”
“젠장, 그래! 내가 자네를 속였다! 미안하군! 그 별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땅이야. 집안의 명예를 위해서 그 옥새가 꼭 필요했어!”
“그럼 뭐 다른 걸 내놓으시던가.”
승지의 말에 체르마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만한 대가는 우리 집안에 없네.”
역시나.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승지는 시큰둥하게 받았다.
쓸모는 내가 정하는 거지.
던전이 아니었더라면 승지한테도 쓸모없는 땅이었겠지만, 다행히 각성자에게는 아주 쓸 만한 곳이다.
던전 대여로 한탕 벌어볼까!
이미 잔뜩 이득을 챙겨놓고도 승지는 공갈을 잊지 않았다.
“어쩔 수 없으면 들어가야지. 준대놓고 막냐? 빨리 내놓기나 해.”
“…….”
눈동자가 갈팡질팡하던 체르마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별만 받아봤자 자네에겐 배가 없겠지? 그러면 들어갈 수 없겠지?”
“배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승지가 딱하다는 듯 그의 위아래를 훑었다.
“당신이 진짜 그 별의 주인이라면 단 하나라도 열쇠가 있을 테니까.”
“……!”
체르마가 흔들리던 그 순간.
덜컹.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똑바로 알현실을 걸어들어왔다.
“오오오…!”
“저 여인은 대체?”
갑자기 나타난 여자의 미모에 경탄한 사람들의 시선이 북에 걸린 날실들처럼 쭉 딸려 들어왔다.
왔구나.
승지는 뒤를 돌아보기 전에 마지막으로 침을 삼켰다.
“승지 씨.”
역시 유월이었다.
황제에게 도착하고 난 다음 맞춰서 돌아갈 수 있도록 미리 연락을 해두었던 것이다.
고작해야 지구로 돌아가게 언제, 어디로 나와 달라는 부탁이었는데도 마치 데이트 약속을 잡는 것처럼 마음이 들뜨고 말았다.
성좌가 호들갑을 떨었다.
[머리, 멋져! 복장, 끝내줘! 장소며 분위기까지 완벽해!]
[그런데 왜 그 전에 연락해서 돌아가지 않은 거야? 아직 얻을 게 많아서?]
“…잡혀있는데 모양 빠지게 구하러 와달라고 연락하기 쪽팔리잖아.”
승지가 낮게 중얼거렸다.
지금은 황제의 증표까지 얻어내고 옷까지 제대로 차려입은 상황이다. 은하계를 지배한 안식의 제국 수도에서, 온 귀족의 중앙에 있으니.
지금은 누가 봐도 멋있지 않겠냐?
승지가 자신감 있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조져지는 건 승지였다.
뜻밖에도 유월은 매번 입고 다니던 양복형 방어 장비가 아니라 드레스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승지는 웃는 얼굴로 굳어버렸다.
[흐아, 세상에! 정말이지 유월의 미모는 전설이야! 저런 사람이 칼만 휘두르다 각성자가 됐다니! 그 전에 벌써 시상식이든 모델이든 나갔어야 해!]
성좌의 말대로 빈틈없이 몸의 윤곽을 드러낸 드레스는 승지의 정신적 코피를 터트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침착해, 침착해. 빌어먹을. 환장하게 예쁘네. 멋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건 지금 나라고! 감탄할 때가 아니지!
“한참 찾아다녔습니다.”
유월은 아무렇지도 않게 승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승지는 헛기침을 하고는 목소리를 깔았다.
“크흠. 절 찾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바로 돌아가야죠.”
승지는 서두르지 않는 척 마주 내밀었다. 그러나 막상 서로의 손을 맞잡을 때가 되자 유월이 갑자기 손을 내렸다.
뭐야, 왜! 손잡게 해줘!
승지의 내면적 아우성을 듣지 못한 유월이 차분히 말했다.
“돌아가기 전에. 승지 씨가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을 만드셨더군요.”
“?”
유월은 승지가 볼 수 있도록 살짝 비켜섰다. 그리고 유월을 보느라 다른 곳을 까먹고 있던 승지의 시야에 철가면을 쓴 날개가 들어왔다.
아,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