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던전에서 던전으로 (3)
“정말 하실 겁니까?”
류의건만 안절부절 못했다. 어찌 보면 여기서 최강자인 그가 제일 눈치를 보는 상황이 참 특이했다.
그냥 검 한 방 날리고 약한 놈들은 알아서 기라고 해도 될 텐데.
하긴 유청이나 승지나 그런다고 말을 들을 위인은 아니긴 했다. 오히려 더 반발하면 반발했지.
계속해서 의견을 조율하려는 류의건은 오히려 자신이 정말 힘으로 나섰다간 걷잡을 수 없게 되는 상황을 피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류의건 당신은 다음 던전에서 힘 좀 아껴둬. 쉬고 좋잖아?”
“승지 씨…!”
“에헤이, 넣어두라니까.”
승지는 코앞까지 밀려온 류의건의 무기를 겁도 없이 만졌다.
류의건은 그래도 순한 양처럼 움찔거리기만 했다. 쯧, 착한 호구 같으니. 저래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사냐.
조만간 류의건도 정신 차릴 만한 이벤트를 기획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류의건은 정말 성격만 고치면 잘나갈 놈인데 말이다.
어차피 구해야 하는 이세계, 기왕이면 한국에서 그런 영웅이 나오는 편이 좋잖아. 국위선양이지.
어려운 단어를 기억해낸 승지가 스스로를 뿌듯해했다.
승지처럼 이 상황을 오백 퍼센트 즐기고 있는 이연주가 물었다.
“그럼 승부는 어떻게 판정하려구요?”
“간단하게 숫자로 따지면 되잖아?”
“양보다는 질입니다.”
[와아, 둘이 정말 사소한 거 하나까지 정말 안 맞는다!]
“양이든 질이든 아무튼 딱 보면 누가 더 잘했는지 잡은 거 보면 각 나오잖아.”
유청도 실력 차이가 확연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굳이 조건을 까다롭게 걸지 않았다.
훗, 후회하게 될 거다.
승지가 속으로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물론 개개인의 실력 차는 어쩔 수 없지만, 자신에게는 완벽한 콤보가 있었다.
99콤보만 성공하면 던전을 싹쓸이하는 건 일도 아니지.
다음 던전에서 몬스터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면 벌써 성공한 거나 다름없었다.
설마 다음 던전에서 바로 겁나 센 놈이 나오기야 하겠어?
[★마법의 주문★]
“뭐?”
[아냐~ 승지 밥 맛있게 먹으라구. *^^*]
놀리냐.
사방에 깔린 요정 가루 때문에 마스크를 벗을 수가 없어 식사도 빨대를 우겨넣고 프로틴 쉐이크만 먹어야 했다.
벌크업 하는 근육맨들 진심으로 존경한다. 어떻게 이런 거랑 닭 가슴살만 먹고 살지?
“맛이 별로세요? 초코 쉐이크 맛으로 바꿔드릴까요?”
“맛은 상관없는데 이 마스크는 대체 뭐로 만든 거냐?”
승지는 빨대와 턱이 떨어지지 않도록 빈틈없이 착 달라붙은 마스크를 가리켰다.
그냥 플라스틱 소재려니 했는데 탄력이나 흡착력이 좀 신경 쓰였다.
이미 쉐이크 한 통을 비운 이연주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말린 우루두투의 가죽이에요. 던전에서만 잡히는 물고기죠.”
“물고기…긴 하죠. 물에서 사는 살인 고기.”
“…승지 씨는 볼 일이 없길 바랍니다.”
류의건마저 슬슬 시선을 피하는 걸 보면 몹시 꺼림칙해졌다. 하필이면 코와 입에 밀착해서 쓰는 부분에, 제길.
입맛이 뚝 떨어졌지만, 꾸역꾸역 쉐이크를 다 먹은 승지가 고리를 꺼냈다.
“슬슬 24시간 다 지난 것 같다. 던전 문 열어보자.”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군요.”
손목을 틀어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류의건이 동의했다. 다음 던전에서 승부를 보기로 한 유청과 승지 먼저 일어났다.
“진 놈은 입 닥치기 걸고 가는 거다.”
“제발 그렇게라도 조용해졌으면 좋겠군요.”
끝까지 유청과 입씨름을 한 승지가 고리를 돌렸다.
그러자 새싹이 급성장하듯 나무줄기가 뻗어 나오며 던전 문이 열렸다.
[식물이다!]
승지가 새로 열린 던전 문의 잎사귀를 헤쳤다. 다음 던전에 들어가자마자 제일 먼저 마스크부터 벗어 던졌다.
“후아!”
폐부를 꽉 채우는 신선한 바람이 속을 탁 시원하게 만들어줬다.
“넓네요…!”
함께 들어온 사람들도 바로 마스크를 벗었다. 남다르게 신선한 공기에 다들 기뻐 보였다.
“숲이면 누구 던전이었죠?”
“이정도로 보존된 자연이면 마왕 서식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안전하다는 거야?”
몹이 안 나오면 안 되는데.
승지 마음을 읽은 것처럼 이연주가 대답했다.
“어차피 이세계는 우리처럼 현실에서 온 각성자들을 저절로 배척하게 되어있어서 결국 습격에는 대비하셔야 할 걸요.”
“때 되면 나온다는 거네.”
“네. 그래도 이 던전이라면 오래 버틸 수 있겠네요. 환경이 좋아요.”
사라설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머물기도 괜찮고, 주변에 생명체가 많아서 던전이 눈치 채기도 어려울 것 같아요.”
“잘하면 자체적으로 식량을 수급해서 한 달보다 더 오래 머물 수도 있겠어요!”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린다면 좋겠지만.”
유청이 팔꿈치를 뒤로 붙였다.
“옵니다.”
바스락. 수풀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유청이 공격했다.
빠각!
무언가 단단한 게 박살나는 소리가 나면서 날아갔다.
“벌써 몬스터가!”
“사라설 씨, 이쪽으로 오세요!”
이연주가 급히 사라설을 당기는 사이 류의건이 칼을 꺼냈다.
후웅.
거대한 검날이 대지 위를 갈랐다. 우뚝 서있던 거목과 수풀들이 단숨에 잘려나갔다. 그러나 매서운 풍압에도 까딱 않고 모여 있는 키 낮은 풀숲이 보였다.
등딱지에 식물을 얹은 납작한 몬스터가 떼거지로 모여 있었던 것이다.
“거북이?”
[모라타다!]
머리가 네모나게 각이 진 모라타들은 아직 무슨 일인지 모르는 듯 천천히 움직였다.
먼저 주변을 정리해놓고도 공격적이지 않은 적의 모습에 류의건이 망설였다.
“전부 처리합니까?”
“당연히 잡아야 할…!”
“아니, 댁 말고 우리가 잡아야지!”
유청의 말을 끊으며 승지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저건 내 거다!”
카가각!
날카로운 검 끝이 등껍질을 긁으며 파고들었다.
[ 1콤보! ]
양손으로 체중까지 실어가며 찍었는데도 모라타는 꿈쩍도 안했다.
“그어어!”
모라타는 사람이 올라타자 광분하며 승지를 떨어트리려고 했다.
광대의 균형 덕분에 승지는 바닥이 흔들리는 혼란 속에서도 계속 공격에 집중할 수 있었다.
[ 4콤보! ]
[ 5콤보! ]
콱, 콱, 콰직!
최대한 한 곳만 노려서 때리는데도 모라타의 등딱지는 깨질 생각을 안했다.
서겅!
주변을 돌아보니 류의건은 두부라도 자르는 것처럼 손쉽게 모라타를 한칼에 잘라내고 있었다.
빠각!
심지어 유청까지 맨손으로 모라타를 후려치는데도 단숨에 등딱지를 뚫어버리는 게 아닌가!
이런 젠장!
다급해진 승지가 서둘러 콤보 수를 채웠다. 이런 벽을 상대할 때 믿을 건 가드 크러쉬 뿐이다.
“크래쉬!”
30콤보를 채우자 발동된 가드 크러시는 바로 철갑 같던 등껍질을 부수었다.
쿠국. 그그극.
껍질이 깨지자마자 파고든 칼날은 손쉽게 모라타의 심장을 찔렀다.
“꿰에엑!”
[ 1콤보! ]
쿠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모라타가 옆으로 쓰러졌다.
[꺄아! 잘했어 승지야!]
성좌가 호들갑을 떨었지만, 승지는 초조했다.
한 마리 잡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잖아.
가드 크러시를 쓰고 나면 콤보가 초기화가 된다. 한 마리를 잡으려다가 나머지 몬스터를 그대로 내버려두게 되는 셈이다.
한 마리 잡을 욕심을 버리고 99콤보까지 콤보만 쌓아야 하나?
승지가 침착하게 주변을 확인했다. 류의건과 유청은 개미 떼를 상대하는 닭처럼 하나씩 확실하게 찍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모라타의 숫자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수풀이라고 생각했던 게 모라타였고, 모라타라고 생각했던 게 쓰러진 나무이기도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무들 틈으로 나오고 있는 것도 죄다 모라타였다.
당장 몰려오는 숫자의 압박이 컸지만 괜히 랭커들이 아니라 뒤쪽은 안전했다.
차라리 완벽한 콤보에 집중하는 게 낫겠군.
승지는 유효타를 버리고 타격 횟수에만 집중했다.
깽! 탕! 팅! 통!
신경을 안 쓰니 바로 칼이 대충 맞기 시작했다.
“뭐 합니까!”
“딱 기다려 봐!”
어이없다는 소리를 무시하며 승지가 고함을 질렀다.
[ 20콤보! ]
[ 21콤보! ]
[ 22콤보! ]
[다리!]
…다리?
“우앗!”
승지가 황급히 위로 뛰어올랐다. 쩍 벌어진 입이 따닥 소리를 내며 닫혔다.
한 번 물리면 뼈까지 씹어버릴 기세였다.
“아아악!”
“준호 씨!”
진작 책 속으로 숨은 사라설과 달리 정준호는 어설프게 싸워보려고 하다가 기어이 모라타에게 다리를 물리고 말았다.
뚜두둑.
뼈가 부러지는 살벌한 소리에 이연주가 다급하게 보호막을 올렸다.
“조금만 참으세요!”
류의건이 바로 달려와 정준호의 다리를 물고 있는 모라타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드득거리며 올라가고 있던 책 너머로 정준호의 몸이 넘어갔다.
정준호는 살렸지만 류의건이 막고 있던 부분이 바로 뚫려버렸다.
류의건이 다급히 뒤를 돌았지만 이미 전선은 세 발짝이나 후퇴된 뒤였다.
제 몸 하나는 지킬 줄 알았던 이연주도 이미 허벅지까지 보호막을 올려둔 상태였다. 조금만 더 적이 몰려들면 그도 더 이상 싸울 수 없어 방어만 해야 했다.
[ 40콤보! ]
잠깐 그들 쪽에 정신이 팔렸던 승지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이걸 보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러나 멈칫거린 시간이 너무 길었다. 승지가 다급히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투웅!
“꾸에엑!”
갑자기 모라타 무리 중에서 한 마리가 정통으로 배를 얻어맞은 듯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
유청과 류의건마저 잠깐 허공으로 날아오른 모라타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누가?”
“누구겠어요!”
“나라고?”
잠깐 얼이 빠진 승지가 부웅 떴다 떨어진 모라타의 추락지점을 눈으로 따라갔다.
스킬이 나간 건가?
바닥에서 기를 방출하는 기술… 그래, 격투 게임에 있긴 했었다.
무의식중에 콤보가 발동했다면 저런 그림이 연출될 가능성도 있지만, 내가 언제 커맨드를 입력했지?
어떻게 나간 건지도 모르겠다.
“승지 씨! 역시 힘을 숨기고 있었군요!”
이연주가 악을 썼다.
“근데 약한 척은 그만해도 되니까 다 잡으세요! 언제까지 싸울 생각이에요!”
약한 척이라고 봐주는 건 고마운데! 나도 모르겠다고!
승지가 급하게 다시 콤보를 시작했다.
[ 1콤보! ]
젠장, 다시 1이다!
아까 40콤보에서 끊긴 건가?
“페널티는!”
[페널티 없어! 콤보 제대로 들어간 걸로 처리됐어!]
“뭐라고?”
아까 날아간 모라타를 잡을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 목표 달성으로 페널티가 사라질 리도 없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상황 파악은 나중에! 지치기 전에 끝내야 해!]
“네 말이 맞다!”
승지가 양손으로 검을 고쳐 잡았다. 계속 도끼질처럼 패고 다닐 수는 없었으니!
“으랏차!”
다시 한번 모라타 위로 뛰어 올라간 승지가 골프를 치듯 검으로 시원하게 반원을 그렸다.
따다다다닥!
[ 2콤보! …3콤보! …4콤보! …5콤보!]
반월처럼 그어진 경로에 모라타들의 등딱지가 닿을 때마다 경쾌하게 긋는 소리가 났다.
당연히 콤보도 연달아 쌓였다.
몇 번 휘두르자 순식간에 20, 30 콤보를 지나 40콤보에 다다랐다.
이때 발경이 나갔단 말이지.
일단 그건 다음에 시험해보기로 하고 승지가 꿋꿋하게 콤보를 채웠다.
후웅!
[ 88콤보! …89콤보! …90콤보!]
“그어어!”
“꾸어!”
이젠 칼을 휘두를 때마다 모라타들이 발광하며 날뛰었다.
예리해진 날이 마치 류의건처럼 껍데기를 가르고 살을 베었기 때문이다.
“크윽!”
거북이 주제에 힘 한 번 더럽게 세네!
거의 황소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스킬로 간신히 균형을 유지한 승지가 비틀거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내려갈 거 같냐, 이것들아! 다 왔다!”
[ 98콤보! …99콤보! ]
승지의 검이 바람을 일으키며 그대로 모라타 무리를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