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잠입 (1)
승지는 말라깽이에게서 정보를 싹싹 긁어냈다.
“그러니까 너는 처음부터 납치용으로 인벤토리를 키운 각성자라고?”
“옙!”
“미션을 성공하고도 보상을 포기하면 죄다 성좌에게 힘이 돌아가는 줄은 몰랐네.”
“그렇습니다!”
어쩐지 놈이 각성자치고도 비리비리하고 약하더라니. 말라깽이가 열심히 설명했다.
“저희 조직에서도 인벤토리를 많이 키운 사람은 도시 하나까진 넣을 수 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라고요!”
“목소리 줄여, 임마.”
말라깽이가 입을 헙 다물었다.
단순한 악당 조직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위험한 놈들이었다.
도시를 통째로 훔쳐갈 수도 있다니.
성좌는 다른 포인트에서 화를 냈다.
[너무해! 성좌가 가방도 아니고 그냥 물건만 담으려고 키우는 게 어딨어! 우리도 사람이고 인격체란 말이지!]
승지가 찌푸린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리 이용하기 좋은 인간들이 모였다지만 굳이 집요하게 센터만 노릴 이유는 없었을 텐데?”
“글쎄요….”
“눈알 돌아가는 거 보인다.”
“그, 그게 실은 조직에서 페널티를 조절하는 각성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페널티를 조절하는 각성자라고?”
“왜 찾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제가 아는 건 정말 여기까지예요!”
거의 손등까지 내려온 검을 본 말라깽이가 죽는 소리를 내며 버둥거렸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성좌가 마구 띄우는 대화창을 쳐다보느라 잠깐 조절이 안 됐던 것이다.
[승지야! 너도 기억하지? 우리한테도 페널티를 조절하는 스킬이 있는 거!]
[광대의 축복!]
[헉! 우리도 그럼 알러트한테 노려지는 거 아냐?]
그걸 아니까 쳐다본 거 아니냐.
승지는 고민했다. 페널티 조절 스킬을 가진 각성자를 노린다니. 지금 알러트를 피해봤자 어차피 다시 만나게 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럼 차라리 방심하고 있을 때 먼저 쳐버리자. 속전속결. 기회가 왔을 때 때리는 거지.
결론을 내린 승지가 말라깽이를 돌아보았다.
“야, 너 돈 좀 있냐?”
* * *
[…승지는 사실 양아치가 천직이 아닐까?]
성좌가 슬그머니 대화창을 띄웠다.
말라깽이한테서 뜯어낸 돈으로 새로 옷을 싹 갈아입은 승지가 어깨를 까딱였다.
아무래도 이번 작전은 백수처럼 보이면 성공률이 떨어져서 말이다.
승지가 새로 산 자켓을 당겨 입었다. 번들거리는 까만 광택이 제법 날티가 났다.
“원래부터 생긴 건 오해 많이 받았어. 장단만 잘 맞추면 돼.”
“저… 정말 잘 될지.”
“연기 할 생각만 하지 마라. 내가 봤을 땐 넌 거짓말에 재능이 없어.”
“예엡.”
승지가 말라깽이 등을 쿡 찔렀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말라깽이가 원래 접선장소로 다가갔다.
“어, 어이~!”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꺼져.”
“겨, 경계하지 마! 나도 알러트니까! 우리 구면이잖아!”
모순적인 말을 내뱉은 말라깽이가 서둘러 준비한 말을 늘어놓았다.
“이번 코스모스 센터 작전은 실패했어! 게다가 냄새를 맡은 청월량 길드원들한테도 쫓기고 있다고! 빨리 본부로 도망쳐야 해!”
작전을 성공했다고 하면 승지만 말라깽이와 있을 이유가 없어 생각해낸 구실이었다.
알러트의 문지기가 두 사람을 확인했다.
“뒤엔 누구지?”
“이번에 같이 갔던 다른 멤버야! 그 비, 비각성자 애들! 얘만 도망쳐 나왔어!”
아 이 자식. 말을 더듬으면 어떡하냐.
뒤따라오던 승지가 간신히 표정관리를 했다.
승지의 작전은 말라깽이를 내세워서 알러트 본부까지 잠입하는 거였다.
코스모스 센터를 습격했던 놈들은 서른 명이나 되니 일일이 얼굴을 기억하고 있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승지도 경계 스킬이 없었으니 괜한 의심을 받을 일도 없었다.
잠시 확인해보듯 머리 위를 쳐다보았던 남자가 되물었다.
“이런 애도 있었나?”
“그, 그래.”
말라깽이는 계속 안절부절 못하며 대답했다. 승지가 등 바로 뒤에 인벤토리를 작게 열어둔 채 칼 끝을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얼른 문 좀 열어….”
“보스가 비각성자는 던전 문으로 못 다니게 하랬다.”
“뭐? 언제부터 그런 규칙이 생겼어?”
“네 분신이 센터에서 납치해온 인간들을 데리고 통과했을 때부터?”
…조졌다.
남자가 담배를 내던지는 것과 동시에 승지가 확 뒤로 물러났다.
“끼에엑!”
말라깽이가 기겁하며 쓰러지는 위로 승지가 뛰어올랐다.
승룡권을 쓰기엔 거리가 짧다!
[ 1콤보! ]
빠드득!
“큭!”
급하게 검을 내찔렀던 승지가 재빨리 거리를 뒀다.
[꺄아악! 검 끝이 뜯어 먹혔어!]
성좌가 비명을 질렀다. 잠깐 손에 잡혔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회수한 날 끝이 들쭉날쭉하게 잘려있었다.
“너도 각성자였나.”
“쳇,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이야.”
“처음부터 알았다. 그렇게 건방진 표정으로 도망쳐 온 자식이 어딨겠나.”
“아하, 몰랐네?”
승지는 몽둥이 다루듯 검을 휘둘렀다. 어차피 검술은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었으니 거리 확보가 최선이다.
[ 2콤보! ]
[ 3콤보! ]
퍽! 퍽!
분명히 타격감은 있는데 그때마다 검이 뭉텅뭉텅 잘려 나갔다.
젠장. 스킬이냐? 도대체 무슨 공격을 했는지 감도 안 잡히네.
남자의 손은 여전히 비어있었다.
유청이 줬던 칼이라 부서지는 건 아깝지 않지만 너무 쉽게 박살나니 어이가 없었다.
“젠장, 무기가 쓰레기잖아!”
“아니, 꽤 좋은 무기다.”
남자가 손을 활짝 펼치더니, 잘라낸 칼날을 떨그렁 떨어트렸다.
“다만 나에게 소용없을 뿐.”
승지가 반절만 남은 칼과 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너 정말 문지기 맞냐? 이 새끼랑 같은 조직이라길래 삐리할 줄 알았더니.”
“오해군.”
남자가 확 짓쳐들었다.
“네가 잘못 걸린 거다.”
그냥 자기만 세다는 소리를 더럽게 가오잡네.
맨손으로 달려드는 놈이 수상했지만, 상단 판정으로 판단한 몸은 자동으로 방어해냈다.
까앙!
[승지야! 보였어!]
“뭐가!”
[인벤토리야! 스킬을 쓰는 게 아니라 인벤토리로 삼켜서 칼을 잘라낸 거였어! 저쪽 성좌가 적극적으로 돕고 있는 거야!]
“그럼 너도 해봐!”
승지가 소리치자 성좌가 재빨리 움직였다.
[알았어!]
“!”
남자가 멈칫했다. 그의 팔 절반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남자가 했던 것처럼 칼이 잘리듯 팔이 잘리진 않았다. 오히려 열심히 이로 깨물 듯이 경계가 일렁이기만 했다.
어이가 없어진 승지가 성질을 냈다.
“야 잇, 저놈 성좌처럼 끊어놔야지!”
[그겅 어려어어어! ˚‧º·(˚ ˃̣̣̥⌓˂̣̣̥ )‧º·˚]
진짜로 입으로 물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성좌가 발음 새는 소리를 냈다.
내가 진짜 너 때문에 환장한다.
승지가 성좌 쪽은 포기하고 공격하려 했을 때, 갑자기 남자가 손을 들어올렸다.
“항복.”
“엉?”
[어어어?]
갑자기 멈춘 남자를 보고 승지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뭘 멈춰?”
“너도 성좌를 다루는 놈이면 공격할 수가 없지.”
남자가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악당 주제에 뭔 헛소리야.”
“난 아직 이거 말고 스킬이 없다. 공격 수단을 들켰는데 계속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
승지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러나 남자는 더 공격이 들어오지 않자 그냥 손을 내릴 뿐 더 싸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원래 양손을 내리려고 했던 그는 여전히 성좌가 물고 있어서 내려가지 않는 오른팔을 흘긋거렸다.
“네 성좌보고 팔 좀 놓아달라고 해주겠나.”
“…너 뭐하는 놈이냐?”
갑자기 침착하고 난리야?
어이가 없는 승지와 반대로 그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내 이름은 백정민이다. 각성한 지 일주일밖에 안 됐지.”
“뭐?”
“말도 안 돼!”
충격적인 발언에 내내 구경하고 있던 말라깽이마저 깜짝 놀라 뛰어올랐다.
[각성한지 일주일 만에 알러트에 들어갔단 말이야?]
“각성한 지 일주일이나 됐는데 스킬 하나가 없다고?”
동시에 외쳤던 승지와 성좌가 서로의 발언에 경악했다.
[헉, 그러게?]
나도 각성한지 얼마 안 되긴 했다만.
각성자 관리소에서 허둥거리던 다른 초보 각성자들을 떠올리면 백정민은 놀랄 만큼 비교되었다.
하지만 침착한 상황대처를 빼면 제대로 된 스킬이 없다는 점에서 확실히 어색하긴 했다.
“각성하자마자 조직에 들어와서 문지기 노릇이나 하고 있는 거냐?”
“문지기씩이나 된 거지.”
백정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조직이 능력주의라서.”
“아, 알았다!”
그때까지 휘둥그레진 눈이던 말라깽이가 소리쳤다.
“너 원래 조직에 있던 비각성자지! 나중에 각성한 거야!”
[아하!]
“그래. 덕분에 깡패에서 문지기로 전직했지.”
“하지만 어, 어떻게 미션도 안하고 자유자재로 인벤토리를 쓰는 거야? 게다가 그런 듣도보도 못한 방식으로….”
“네 성좌한테 물어봐라.”
백정민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승지도 처음 각성했을 때부터 성좌가 마음대로 인벤토리를 열어젖혔기에 별생각 없었다.
[뭐야아~ 저쪽에도 나 같은 애교쟁이 성좌가 있나 보지? 역시 각성자랑 성좌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사이라니까!]
좀 진지하게 추리 좀 해보자. 네 얘기는 방해 된다고.
하지만 그래봤자 승지 지능이다. 그가 단순과격한 답을 내놓았다.
“그래서 결론이? 안 싸우겠다고?”
“이미 항복이라고 했잖나.”
백정민이 대꾸했다.
승지가 여전히 의심스럽게 요구했다.
“그럼 열쇠 내놔.”
백정민은 진짜로 인벤토리를 열더니 던전 열쇠를 휙 던졌다.
말라깽이는 아예 턱을 바닥까지 떨어트렸다.
“그, 그건 배신이야!”
“너도 지금 날 속여서 저놈을 조직까지 데려가려고 한 거 아니었나?”
“우윽…….”
맞는 말이네.
던전 열쇠를 받은 승지가 백정민의 팔을 놓아주었다.
“어이 배신자. 기왕 배신 할 거면 네가 부순 무기도 하나 내놔.”
“없다. 말했다시피 각성한 지 얼마 안 되는 몸이라.”
말하는 게 묘하게 짜증이 갈 듯 말 듯한 놈이다.
승지가 던전 열쇠를 들고 문을 열려고 하자 갑자기 백정민이 끼어들었다.
“잠깐. 조직으로 가려면 던전 안에서 다른 열쇠 소지자와 접촉해야 한다. 그에겐 뭐라고 할 생각이지?”
“뭐라고?”
승지의 눈이 말라깽이에게 돌아갔다. 노려보는 시선에 그가 쭈뼛거렸다.
“너 왜 말 안 했냐?”
“아, 아니… 가서 설명하려고….”
“뒤통수에다 피어싱 하나 뚫어줘? 때릴 때마다 들어가게, 새끼야?”
“서, 선생님!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흥미진진한 눈으로 보고 있던 백정민이 되물었다.
“선생님?”
“헛소리에 신경 꺼.”
골치가 아파진 승지가 미간을 문질렀다.
“그냥 내가 너인척 하면 안 되냐? 뭐 암호 있어?”
“암호는 없지만, 우리 조직원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문지기들만은 경계 스킬을 갖고 있다. 둘 다 경계 스킬이 없으니 변장하긴 힘들겠지.”
“아오.”
“대신 내가 너희를 데리고 가 줄 수는 있다.”
뜻밖에도 백정민이 제안했다.
“…대가는?”
“어차피 항복했는데 무슨 대가를 바라겠나. 하지만 기왕 해준다면 네 성좌를 잠깐 보고 싶은데.”
[뭐어? 꺄악 싫어, 싫어! 어딜 감히 나한테 마수를 뻗치는 거야!]
갑자기 화려한 단어를 쏟아내며 성좌가 격하게 거부했다.
그냥 보겠다고 한 건데 저렇게까지 싫어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일단은 승지가 편을 들어주었다.
“내 성좌가 싫단다.”
“그럼 됐다.”
백정민이 심플하게 납득했다.
빠른 포기에 말문이 막힌 건 오히려 승지와 말라깽이 쪽이었다.
“성격 희한한 놈이네.”
“고맙군.”
칭찬 아니다.
어쨌든 자발적으로 도우려는 걸 굳이 말릴 필요가 없으니 백정민이 조직까지 그들을 데려다주기로 결정되었다.